라마나 마하리쉬는 과정이 없는 이 여정을 마음을 가슴속으로 가라앉히는 것sinking the mind into the hear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이 여정 동안 마음은 가라앉고 이완되고, 뒤로 안으로, 그리고 ‘자아 쪽으로 향합니다. 여정을 거치며마음은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문득 순수한 마음으로,
본연의 무한한 알아차림으로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점진적으로, 가끔은 아주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지요.

마음은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색칠하는 활동입니다. 반대로 색칠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색깔이 지워진 마음의 본래상태인 순수한 알아차림을 드러내는 것이 명상입니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알아차림이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비대상적경험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난 후의 본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순수한 마음이며 알아차림 그 자체입니다. 내재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불멸의 정수를 아는 것입니다. 선의 전통에서는 이를 ‘본래면목our26original face‘ 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attention 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봅시다. [a]는 라틴어로 ‘~로‘, ‘~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tendere)는 신축성있게 늘어난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의란 지식, 혹은 경험의 대상을 향하여 알아차림을 쭉 뻗어낸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분 자신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라고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내딛으시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는 한 발짝도 갈수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 나 자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는 한 발짝도 멀어질 수없습니다. 어디로 가든 나는 항상 나 자신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앎, 단 하나의 ‘불이론적인 삶으로부터 모든 상대적인 앎이나 경험이 파생되어 나옵니다. 마치 자면서꿈을 꿀 때 여러 사람과 다양한 사물들이 나오지만, 이것은모두 꿈꾸는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왜곡되고 파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 다른 어떤행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그저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나 ‘주의‘라는 형태를 띨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 홀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나는 나의 신을 통해서 나의 신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은 순수한 앎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알며, 스스로 알아차립니다.
우리들의 존재와 우리들의 존재를 아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태양의 존재와 태양의 빛남 사이에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알아차림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으로부터 알아차림까지는 어떤 공간도 거리도간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길이나 수행 practice 의 가능성도없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이닙니다.

명상은 주의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 결과 알아차림이 스스로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정수입니다.
이는 마음을 어딘가로 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집중하거나 통제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지요.
무엇을 수행하든 우리 본연의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는 본연의 존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아를 일시적이고도 유한한 실체라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확고히 믿고 있으니, 이를 감안하여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불이론적 가르침은 자기 탐색 self-enquiry, 또는 자기 굴복self-surrender의 형태로서 명상을 수행하라고 권유하게 되었지요.

주먹을 쥐려면 처음에는 애를 써야 하지요. 하지만 주먹을쥔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주먹을 쥔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손을 펴려고 한다면, 손을 펴기 위해서 또다시 애를 써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알아차림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리고 있다는경험, 존재의 느낌, ‘아이엠 I am‘이라는 앞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엠‘이라는 삶은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알아차림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앎은 모든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마지막순간에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잠깐 빛나지만, 워낙 짧기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텅 빈 스크린이 잠깐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아이엠‘이라는 앎, 즉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앎은 모든 유한한 마음의 상대적 지식과 경험보다 앞서고 이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절대적인앎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앎이 곧 신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삶이 곧 신에 대한 신의앎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알아차림의심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 실습 the practiceof the presence of God, 또는 무한한 신의 존재에 대한 마음의굴복 surrender 이라고 하지요.

수피 격언도 바로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헤맸으나 결국 신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지요. 같은 이유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신을 안다"

이를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트마 비차라 atma vichara"라고합니다. 이는 주로 ‘자기 탐구self enquiry ‘나 ‘자기 탐색 selfinvestigation‘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서양 문화에서 ‘탐구‘와
‘탐색‘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과정이나 작용을 시사하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준수self-abidance‘ 혹은 ‘자기 휴식 self-resting‘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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