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신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신의 가명이다."

그림 형제는 자신들이 편찬한 사전에서 "우연은 뜻밖에 다가오는 일들이다"라고 간결하게 정의하고는 "이성이나 의도를 벗어나는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우연이라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런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아무런 규칙을 인식할 수 없거나,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날 악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어요. ‘어제 친구랑 카우핑거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우리는 마침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해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러자 악장이 물었어요.
‘그래서요? 그가 말이라도 걸던가요?‘ ‘아뇨. 그는 그냥 우리를 지나쳐서 가버렸어요.‘ 그러자 악장은 시큰둥하게 말했어요. ‘카우핑거 거리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야. 그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하도 많아 몇 발짝 못 가 자전거탄 사람과 계속 마주칠 지경이니까.‘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막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지나가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매우 이성적인 사람조차 이런 질문 앞에서는 양다리를 걸친다.
노벨상을 받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도 그랬다. 닐스 보어는 엄격한 법칙을 추구하던 자연과학에 우연의 중요성을 도입한 현대 원자물리학의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별장 현관 위에 행운의 상징인 말편자를 걸어놓고 살았다. 그리고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정말로 말편자가 액운을 막고 행운을 가져 온다고 믿느냐고 물으면 그는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준다오."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는 사람은 원인과 결과의 끝없는 행렬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얼마나자세히 알든 상관없이 그 남자가 왜 하필이면 그 지점에서 사고를당해야 했으며, 다행히 그 불행이 가벼운 부상으로 그쳤는지에 대한필연성을 찾아낼 수 없다. 만약에 그가 도중에 직원을 만나 수다를것이라는 사실과 이날 공사장 인부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일을 할것이며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행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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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덫이 무엇인지를 안다. 미끼가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실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참담한 결과를 잘 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반드시) 무기력에 빠뜨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세상 물정에 밝고 지적으로 뛰어나, 이 세계를 덫을 놓는 자와 덫에 걸리는 자의 완전히 정지한 대립 상황으로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명석한 인식에는티끌만큼도 우스운 요소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명석함이 사람을 우스운 상황에서 영원히 구원해줄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물정에 밝아 위험을 다 알아서 겁을 먹고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그 위험의 매혹은 그의 최대의 신중함을 무너뜨릴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꾸어진 위험은 점점 비대해진다. 그가 소유했다고 일단은 믿은 미래를 송두리째 뽑는듯한, 그의 존재의 본질 전체에 대한 부정 위에 성립하는 듯한 그 위험은 그의 ‘미래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만 작용할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의 최대의 유용성일 것이다. 그를다시 ‘미래를 갖지 않은 존재‘로 환원시킬 그런 위험. 즉, 늙은 여우를 매혹하는 최대의 위험이란 바로 ‘청춘‘일 것이다.

소설 습작을 하고, 친구와 문학에 대해 긴 편지를 주고받고,
만나면 문학 이야기만 하고, 문학서만 읽으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다이쇼시대의 문학청년의 표현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문학을 하며 산다‘라니! 그 풍부한 교양주의적 자기 형성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활감. 그만큼 당시의 나와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원고용지에 글을 쓰는 것은, 시대에 저항해 자신이 일종의 추상적 인간,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한 닌자 훈련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시대적 정신의 은둔처, 갈 길이 먼 인생의 은둔처…, 더구나 거기에는 아무런 영웅적 요소는 없었고, 시대의 비적격자인 나를 시인하기 위한 최후의 은둔처로서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 쳐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고백하기에는 가장 불편한 장르이고, 이
‘가짜의 기록‘인 장르에는 고백의 신빙성을 보증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고백과 소설을 연결 지은 낭만파의 편견은 인종적 편견과 엇비슷한 불명예스럽고 어리석은 생각이며, 문학은 시, 희곡, 소설 순으로 고백에 부적합하다.

이십몇 년 전에 학교 선배가 말했던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말은 지금 내게 점점 가슴속을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다가온다. 과거의 작품은 이른바 모두 배설물이고,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해 희희낙락하며 떠드는 작가는자신의 배설물을 주무르며 좋아하는 광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어쨌든 문학을 하며 사는 것은 지성과 육체에 대한 양면작전이었다. 문학 덕분에 나는 모든 학구적 지성을 경멸할수 있었고, 육체의 덧없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만은 문학은 정신에 (엄밀히 나 한 사람만의 정신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심지어 나는 남에게즐거움을 주는 거리공연자들의 기술조차 얼마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학의 본질은 요약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그 정도로 간단하다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가능한 한 요약 불가능한 요소를 더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는 이 요약 불가능성의 근거를 ‘개성‘에서찾고, 결국 낭만적인 개성의 자동기술법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끝으로 모든 것이 이상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진정한 낙천주의다. 어떤 희망적인 관측과도 상관없는 낙천주의다. 나는내가 숲속의 대장장이처럼, 계속 낙천적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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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완전히 상징화되어 작품의 질량을 재는 추상적인단위가 된다면 그것은 그 소설을 시간과 비슷한 구조로 이끌게 된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간 예술로서 거기에는 회꼭 같은 대사도 틀리지 않고 그저 냉엄한 시곗바늘 소리만들린다.

삶의 끝에,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문학이 있다. 그것을 순수한 문학이라고 나는 부르겠다. 백조는 최후의 한마디를 아름답게 노래하기 위해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산다고 한다. 작가는 임종의 순간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침묵을 맛보기 위해서 평생을 계속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한다. 백조의 평생의 침묵과 작가의 평생의요설, 그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장편소설은 하나의 순수를 얻기 위해 천의 순수함을 희생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에서 연기하는것이다. 극히 짧은 소설은 그 지독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농간이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밖에서 이루어지는지의 차이에 불과하다. 가공할 마키아벨리즘은 어쨌든 완전히 수행되어야 한다. 이 농간의 질량이 없는 작품은 현대에 살아갈 수 없다. 한 편의 뛰어난 장편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손바닥 소설은 무의미하다. 한 편의 뛰어난 손바닥 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장편소설은 무의미하다. 장편소설은 육지로 옮겨진빙산의 전체 모습이다.

‘극히 짧은 소설‘을 쓰면서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설을 쓰면서 그는 현대에서 순수함과 투명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그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을 말살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었는지를 알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쩌면 현대에서의 시라는 것의 존재방식, 시의 비정상적인 어려움이 이해될지도 모르기에.

다.
따라서 내 소설은 소송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암시를 내포하고 매우 완만히 시작해 처음에는 진척이 느리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도록 해 두고, 서서히 크레센도가 되어,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정석을 밟고 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예술의 기본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형태를 무너뜨리기는 싫다.

일본인 중에는 체력 문제도 있어서 이런 초인적 괴물이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일반인을 백이라고 하면 고작 백이십 정도가 초인의 한도이고, 그 백이십의배분을 통해 각각의 재능이 정해지는 셈인데, 법대 출신 소설가는 어설프게 법학을 공부하는 바람에 그중 칠십 퍼센트정도를 지성에 빼앗겨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일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불리하고, 얼마나 사람의동정심을 끌지 못하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을 원망해야 할지 법대 출신인 것을 원망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추상성, 다소 나의 독단에 따르면 시대라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를 이 추상성을 기초로 하여 순수소설을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 순수소설을 주장하며 시대와 결별해야 했던 것과 달리, 문학 그리고 소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시대의 완전한 투영, 시대의 가장 정확한 투영이라는 주장을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독단으로 가득찬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바라지않는 날이 없다. 바라건대 한 마리의 불길한 검은 나비여, 이제부터 나의 작품 위로 끊임없이 그 정처 없는 비상의 그림자를 드리워주려무나.

내 문체에 대한 글은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는 상황이 된 것은 아마 내가 남의 작품을왈가왈부하면서 문체, 문체 하며 앵무새처럼 떠든 대가일 것이다.

"말을 마친 소년은 다시 오열했다. 떨리는 목덜미는 꽃이핀 억새처럼 나긋나긋하고, 어깨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떨렸다. 저절로 흘러내려 마치 얼굴의 반에 고운 버드나무 같은그늘을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선사는 무심코 손을 대고 그것을 살짝 치워 보았다. 사원에는 중후한 만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밀한 밤이 빛나며 내려앉았다. 번을 서는 스님이 통로에서 통로로 불을 켜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시간의 경과라는 건 무섭다. 나는 괜히 현재의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손이 오그라들지만, 과거의 ‘우리‘는 아름다웠던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청춘‘의 동의어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청춘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우리‘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예술가가 미래를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사람들의 빛나는 실용적인 미래상을 미리 주도면밀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모독하는것이 아니라, 심지어 완전한 계획과 기획에 기반하여 이성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미래를 먼저 차지하고, 모독하고 점유하는 것. ・・・단 문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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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랜 세월 이런 유의 심사에 관여하면서, 단 한 번,
육필원고로 읽고 전율을 경험한 건, 후카자와 시치의 나라야마 부시코考」를 접했을 때이다. 오코론신인상은 400자 원고지 백 장 이상의 중편을 육필원고로 열편 이상 읽어야 하니, 결코 편한 심사는 아니다. 몇 개의 후보작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후에, 잊히지도 않는 어느 깊은 밤 고타쓰에 발을 집어넣고,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손글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느슨해서, 깔보며 읽고 있었는데, 다섯 장을 읽고 열 장을 읽는 동안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클라이맥스까지 쉬지 않고 다 읽고, 반박의 여지 없는걸작을 발견했다는 감동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 자체를 유년기라 생각하고, 다시 성인이 될때의 가열한 성인식을 드라마로 구성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전부 다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절대자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 지적인 구축성 뛰어난 SF에서 독자는 한순간 엄청난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너무나 불쾌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신자가 이 소설을 읽은 때의 불쾌감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이 상쾌한 불쾌감은 작품의 완성도에 만족하느냐 아니냐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 이게 무슨 불쾌감인가를 설명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 지금부터가 아마 남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나의 음울한 독백이다.

부유하던 것이 확정되어 하나의 작품 속에 봉인되는 순간에 겪는 일종의 아픈 경험에 관해서 작가는 아무리 요란을떨어도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한 권이 남아 있다. 마지막 권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이 끝나면‘이라는 말은 지금 내게 최대의 금기어다.
이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를 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세계를 상상하기 싫기도 하고 두렵다. 거기서 결정적으로 이 부유하는 두 현실이 결별하고 한쪽이 폐기되고 한쪽이 작품 속으로 감금된다면, 나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일하게 남겨진 자유는 그 작품의 ‘작가‘라 불리는 일일까. 마치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 어쩔 수없이 그의 자식의 대부가 되듯이

사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노리는 효과도 이런 것이다. 효과 그 자체에 그런 범죄적 의도가 있더라도, 소설은 근대사회 특유의 관대함 덕에 좀처럼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유유히 법률이나 사회도덕을 무시한 윤리적 긴장감을 줄 수 있고, 말하자면 법률상의 ‘확신범‘의 체계를 미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범인은 현실의 법률에 굴복할수밖에 없지만, 소설은 만일 성공하면 그 소설을 재판할 자로 신밖에 없는 곳까지 자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소설가는 문체로써 세상과 대결하므로, 저절로 그가 평생쓰는 소설의 주제는 모두 문체의 문제에 포함되는 셈이다.
독자는 테마소설이라 불리는 주제를 노출한 소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체의 중심이 골격이라고는 해도, 엑스레이로 찍은 미인의 해골은 미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문학과 파생 장르인 사소설의 피해를 받은건작가 본인보다 오히려 소설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소설은정당한 독자를 잃은 것이다. 즉 독자는 소설을 소설로 읽는습관을 잃은 것이다.

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우선 첫째로 대단히 곤혹스럽다. 속수무책일 정도로 곤혹스럽다. 내가 일본에서 도쿄의 한구석에서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소설은 이불가능한 일과 얼마간의 타협을 하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도 한 명의 부도덕한 인간일 것이다.

사실 쓰기 시작하자마자, 유쾌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 줄 한 줄이 벽이 되고, 조각끌에 반항하는 대리석이 된다. 이 작업이 일상의 훈련이다. 독일어의 이른바 일상의 일ugenerk 인 것이다. 군인에게 훈련이 실전이며, 실전이 동시에 훈련이듯이, 실전 경험 없이 훈련만으로 좋은 군인이만들어질 리가 없고, 소설을 쓰지 않고 소묘만으로 소설가가될 리가 없다. 하나의 새로운 소설의 제작은 하나의 새로운훈련의 장이다.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재료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 다만 어느 시점의 나의 내적 욕구에 딱 맞는 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소설가는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는 사람 같은 존재다. 어느 때 길 위의 맥주병 조각이 회중전등의빛을 받아 강하게 빛난다. 그 순간 나는 재료와 함께 주제를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글자를 통해, 그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내 안에되살려주고, 지금 나는 다시 그 풍경을 마주하며 거기서부터뭔가 어떤 ‘구체적인 것‘을 수확한다. 그것이 땅 밑을 흐르며감시하고 있는 까다로운 ‘주제‘를 만족시킬 때에 소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호흡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수십번, 수백 번이고 죽음에서 되살아나면서 한줄기 길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근대소설이 다다른 궁극의 기술적 시도가 근대소설의 근본적인 결함의 보완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조이스는 여기에서 다시 기술적 예술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인 결합의 보완 없이는 소설의 기술은 기술로서의 안정을 얻지못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에 머물러 금세 내팽개쳐질 수밖에없고, 다시 소설은 기술을 경시하면서 기술에 추적을 받으며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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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프랑스에 가서 화가가배워 오는 건 매일 아침 반드시 캔버스 앞에 제대로 앉아서일을 시작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이 단순한 습관이 일본에돌아온 후에 크게 발전하는 원천이 된다니 일본인의 게으른기질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텔레비전이 발달하면서 라디오는 상당히 쇠퇴했다. FM방송과 자동차 라디오로 되살아났다는 말도 있지만, 가장 빠른 뉴스를 오로지 라디오에 의존했던 시대에 비하면, 그 근본적 유효성이 상실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이차세계대전 전에 올림픽 수영에 출전한 마에하타 히데코秀子선수의 경기를 물보라 소리와 함께 들으며 흥분하던 시절을떠올리면,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유의 활발한 상상력을 수반한 흥분을 라디오에서 찾지 않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영향은 묵과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건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골치 아픈 독자를 양성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쉬운 독자의 마음을 지배할 의도로 만들어진 다양한 사이비 예술 즉 ‘인생론적 소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이라는 근시안적인 현상을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고백과 자기방어는 언제나 미묘하게 맞물려 있기에, 고백형 소설가를 상처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마치 인도의 수행자처럼 자신의 입술이나볼에 바늘을 통과시켜 보여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타인이하도록 내맡겨 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타인의 가해에 앞서 선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바꿔말하면 몸의 안전을 위해서!

언어예술에서야말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 꿈과 현실, 환상과 사실의 완전한 등질성을 마주할 수 있다. 역사소설과 환상소설은 이 특징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 것인데, 역사소설이나 환상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여 독자들이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이 현명하지 않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음악이나 미술에서는 소리와 색채 그 자체가 이미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소리나 색채와 다른 법칙성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꿈과 현실에는 동질성이 없고, 그 대신 예술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 상징기능의 순화를 획득하고 있는셈이다.

작자에게는 처참함, 괴기, 신비, 색채의 취향이 넘쳐흐른다. 소설은 우선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야 한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다. 무엇을?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알고 싶다.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소설 본연의 기능이라고한다면 신슈 홀치기성』은 그것만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소설일 것이다.

전기소설의 이점은 수수께끼가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수수께끼가 신비로움이라는 이점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니에다 시로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알고 싶다는 목적과 작자의 알려 주고 싶다는 목적이 실은 어딘가에서 어긋나 있고, 작자 역시 독자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매혹된 게 아닐까 하고 직감할 것이다. 이 뭔가 달콤하고 가슴이 설레는 불신감은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알몸은 백조처럼 하였다. 등불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보라색을 띤 그림자였다.
그녀는 어떤 자세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등을 구부렸다.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 위로 턱을 올렸다.
그 모습을 등불이 정면에서 비추었다. 팔꿈치 바깥쪽이 어슴푸레하게 빛났다. 엷은 마노색 빛이었다. 세운 무릎에서 정강이에 걸쳐, 그리고 발바닥까지 희미하게 빛났다. ..."

이 ‘언어 표현에 의한 최종완결성‘이야말로, 아마 예술로서의 소설의 가장 본질적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정말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장르라 생각되고 있는 만큼 이 점에 대한 인식을 등한시한 채 쓰인 소설이 많은데 일본어의오랜 교양이 무너지면서 이 인식 자체가 소설가 내부에서나날이 쇠퇴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공허하고 미칠 것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아치문밑에 선 검은 옷차림의 에드와르다를 ‘내‘가 볼 때, 이미 성적 해방을 통해 그녀로부터 풀려나 도취에서 벗어난 ‘나‘는에드와르다가 자칭한 것처럼 ‘신‘이었음을 인식한다.

바타유의 소설은 흡사 그 반대 같아서 타락의 교양소설이라고 부를 만한데, 기본 구조는 아주 비슷하다. 즉 독자의 순수한 진리 탐구 욕구, 지적 분석 욕구, 자의식, 서정성, 성욕등을 ‘내‘가 대표하고, 본의 아니게 그러한 욕구의 필연적 결과로서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진상을 직면하고, 그 혐오와 전율을 겪어야 비로소 강림 체험을 하도록 설계된 소설이다.

‘물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준적 전형적인 개념과좋아하는 소설, 싫어하는 소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 취향이나 감각의 선택은 종종 애매하고 혼동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취향적 감각적으로 싫은 소설이라도 자신의 감각을 거스르기까지 하면서 객관적인 비평 기준을 적용하려는 양심적노력은 충분히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종종 엉뚱한노력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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