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하니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내 머릿속에가장 강하게 남은 파도는 수학여행 이후 처음 온 대학교 2학년 때의 제주도 금능 포구에서 보았던 파도다.
그때도 역시 다짜고짜 떠났던 나는 하필 유독 바람이거셌던 10월 말에 그곳을 찾았고, 정말 작은 집 한 채만 한 파도가 포구의 비죽이 튀어나온 곳을 집어삼키는 장면을 보았다. 위험 진입 금지 팻말이 너덜거리고, 그 근처에 사람이 가지 않을 뿐 대부분의 가게들이 정상 영업이었던 걸 봐서는 종종 있는 풍경인가 싶었다. 나는 난생처음 마주한 자연의 박력에 압도당했었다. 그 파도를 다시 보고 싶어 묵었던 기간 내내 금능 포구에 들렀지만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능력은 부족하지만 애정이 넘치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도 그런 대상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술이다. 주량은 평균을 밑돌지만 꾸준히, 그리고 자주 마셔온 사람, 나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 중 하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경험이 누락된 내 삶과 글쓰기가 어디로 향할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내가 엄청난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아니다. 삶에는 파고와 리듬이 있고 질량보존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나는 믿는다. 행복한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시간은 미래로부터 다가오게 마련이고 끝나지않을 것 같은 고통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나 인연으로 희석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마이너스된 분량만큼 플러스된 무언가가 인생을 살찌우기도 한다. 완벽한 상실과 영원한 충만은 없다. 적어도 내가 내 인생으로부터 혹독하게 체득한 바로는 그렇다.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숨어 사는 호랑이를꿈꾼다. 장편소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에는 인간을 피해 숨어 사는 회색늑대가 나온다. 멸종되었다고알려졌지만 회색늑대는 사실 인간이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회색늑대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펑펑 내리는 눈이 회색늑대들의 발자국을 덮었다. 완다는회색늑대들이 영원히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를바랐다. 회색늑대가 사라졌다고 인간들이 슬퍼하든 말든 회색늑대들끼리 이 세계 어딘가에서잘 살고 있기를.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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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뒤라는 시간을 의식하고, 자신이 그 일부라고 여기게 된다. 거리와 골목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자기 존재가깊은 뿌리, 또 먼 미래와 이어져 있음을 믿게 된다. 현수동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존중하고 대화한다.
이런 역사 감각은 조선시대 궁궐이나 민속촌을걸을 때에는 얻지 못한다. 그런 장소들에는 현재가너무 희박하며, 나는 그 공간의 방문객일 따름이다.
궁궐에 살았던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신분도 아니었다.
궁궐이나 민속촌의 존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곳이 내 고향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흰 꽃이 피고 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 아래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웃통을 벗은 채땀을 뻘뻘 흘리며 금속을 달구고 두드리는 대장장이들, 콩을 삶는 가마솥에 장작을 넣는 소년 소녀, 그앞으로 새로 만든 독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들 막배에서 내린 소금장수와 얼굴이 까맣게 탄 새우젓장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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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그들의 인식은 행동이 되었고, 그들의 사유는 한갓 논증적인 인식을 떠났으며, 인간에 대한 그들의 고찰은 지적 직관이 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행동의 영지주의자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것이 그들의 행동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달리 당신에게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선은 모든 것을 환히 비추어주는 인간 인식, 객체와 주체의 일치가 일어나는 인식입니다. 선한 인간은 더 이상 타자의 영혼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읽듯이 타자의 영혼을 읽습니다. 그가 타자로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기적이요 은총이자 구원입니다. 천상의 것이 지상으로 하강한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참된 삶, 생생한 삶입니다.(그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든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든 상관없습니다.) 선은 윤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선은 윤리학적 범주가 아니며, 당신은 논리 정연한 그 어떤윤리학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터인데,
윤리는 일반적이고 의무를 지우는 것이며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통상적인 삶의 혼돈에서 인간을 떼어내는 최초의 고양, 가장 소박한 고양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서자신의 경험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은 진정한 삶으로의 귀환이자, 인간의 참된 귀향입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삶이라부르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두 가지 삶을 서로 엄격하게구분하는 일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선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믿음 역시 마찬가지로 절대적이며 확고합니다. 선이란 신들림입니다. 그것은 온화하지 않고, 세련된 것도 아니며, 정적주의(靜寂主意)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거칠고 잔혹하며 맹목적이고 모험적입니다. 선한 사람의 영혼에는 이유와 결과 같은 심리학적 내용이 일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운명이 부조리한 명령을 적는 순결한 백지이며, 그 명령은 맹목적으로, 앞뒤를 돌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끝까지 수행됩니다. 이러한 불가능성이 행동이 되고, 이러한 맹목성이 투시가 되며, 이러한 무자비함이 선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이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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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루틴이 내게도 통할 거라는 생각은 빨리 버리는 게좋아요. 그냥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주는 지독히도 커다란 장소입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해 서로 다른 옳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지독히도 많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지요."
제가 우주의 비밀을 하나 더 알려 드릴까요? 사람들은 당신한테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관심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라, 왜 그렇게 살고 있냐, 운동 좀 해라, 살 좀 빼야 하지 않겠냐, 제발목표를 갖고 살아라………….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당신이 왜 운동을 할 수 없는지,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뭐였는지, 남들은 괜찮다는데 나만 이상하게 예민한 상태가 되는 이유가 뭔지,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질때 얼마나 삶이 끔찍한지, 쥐뿔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사세요. 좋아하는걸 더 좋아하고,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으면서 살아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의문이 생길 겁니다. 작가님은책을 보는 시간이 없네요? 글을 쓰는 시간도 없네요?
맞습니다. 일부러 책 보는 시간과 글 쓰는 시간은 뺐습니다. 왜냐하면, 책 읽기와 글쓰기는 언제나 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시간을 빼 두지 않아도 문자를 읽고 문자를 씁니다. 그건 작가라는 직업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활자중독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자를 읽습니다. 내 마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문자를 사용해 글을 씁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고, 시간이 날 때마다글을 씁니다. 메모 형태의 글을 쓸 때도 있고 소설을쓸 때도 있습니다. 글쓰기에도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쓰고 싶을 때 자리에 앉는다‘입니다. 쓰고 싶지 않은데도 마감 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앉으면,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는 산책을 하거나 책 속으로여행을 떠나거나 잠깐 눈을 붙입니다. 그러다 보면 최소한 하루에 몇 번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앉아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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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내적인 중요성이 역사적 정점에 도달했다. 개인은 더 이상추상적 이상주의에서처럼 초월적 세계들의 담지자로서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 아니,
존재의 가치들은 이제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개인의 영혼에 대해 그것들이 갖는 의의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타당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138너의 율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방주(方舟)가 텅 비어있다면,
너의 춤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의 춤은 대상이 없으니 고갈되지 않을 것이고,
사막을 위한 춤, 너른 공간을 위한 춤이 될 것이다.
-앙리 프랑크

언제나여기서 희망은 삶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예술 작품이 아니다. 삶에부딪쳐 좌초됨으로써 모독당하고 더럽혀지는 그런 예술 작품이 아닌것이다. 희망은 그 자체로서 삶의 한 부분이다. 희망은 삶에 달라붙어서 그리고 삶을 장식하는 가운데 삶을 지배하려 시도하는, 그렇지만 항상 삶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이부단한 투쟁이 회상에서는 흥미롭고도 파악할 수 없는 길, 그렇지만체험되는 현재적 순간과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런길로 변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미끄러져 들어오고 미끄러져 나가는지속-이러한 지속의 정체(停滯)로서 그 순간은 의식적 직관의 순간을 제공하는데ㅡ으로 아주 풍부해서, 그 풍부함은 지나간 것과 잃어버린 것에도 전달되며, 심지어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쳐버린 것을 체험의 가치로써 장식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여 실패했던 것이 가치의 계기가 되고, 삶이 거부했던 것에 대한 생각과 체험이 삶의 충만함이 흘러나오는 듯 보이는 원천이 되는, 기이하고도 멜랑콜리한 역설적 사태가 생겨난다. 모든 의미 실현의 전적인 부재가형상화되어 있지만, 그 형상화는 진정한 삶의 총체성이 갖는 풍부하고 원환적인 충만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환멸소설의 분위기 있는 의사(擬似) 서정성은, 회상을 통한 체험속에서 대상과 주관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데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즉 회상은 실제로 존재했던 그대로의 객관, 그리고 주관이 이상으로 열망했던 전범, 이 양자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현재적인 주관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와 같은 형상화에 내재하는 신랄함과 불쾌함은 형상화된 내용의 암울함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형식에서 그대로 방치된 불협화음에서 유래한다. 즉 체험의 대상은 극의 형식 법칙들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그 대상을 체험하는 주관성은 서정적인 주관성인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과 서정시 그리고 서사문학은 그 위계를 어떻게 생각하든-하나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정 반, 합으로 존재하는 것이아니다. 그것들 각각은 서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 형상화 방식이다. 따라서 각 형식의 긍정성이란 각기 고유한 구조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다. 각각의 형식에서 기분으로서 발산되는 듯이 보이는 삶의 긍정은, 각 형식에 의해 요구된 불협화음의 해소, 각 형식에 의해창조된 고유한 실체의 긍정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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