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내내 그녀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물렁해진다.
두 자매에게 단 한 점의 희망을 얘기해 주지 못한 게 마음의 짐이 되었다.
20년 후 그녀들을 다시 불러낼 일이 생겼다.
"성대한 만찬석은 아니지만 소담스럽고 정성을 들인 테이블로 초대할 일이 생겼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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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은 아빠를 기다렸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소산의곁에서 한참 놀았다. 소산은 카스텔라를 뜯어 부수었다. 황금 가루를 닮은 카스텔라 부스러기를 새들은 기분 좋게 쪼아 먹었고 어두워지기 전 다시 숲으로 날아갔다.

이젠 기다릴 필요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되지만 그 가엾은 것은 바보처럼 기다릴 거야.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가 계속 기다리다가 늙어 할머니가 되겠지. 하지만 톨게이트가 곧 폐쇄될 텐데 그것은 어디에서 아빠를 기다리려나.
주윤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공허함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동을 걸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어두운 산과 붉게 물드는 하늘을 봤다. 파스칼은 고구마를 먹다 말고 주윤을바라보고 있었다. 주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자신에게 고구마를 주는 그 좋은 사람을 더 이상 볼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마음 약한 사람이 실망을 이기지 못해 우울이 얼굴에 내려앉듯 파스칼의표정이 딱 그랬다.

파스칼은 슬픈 얼굴로 앞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윤은 속으로 조용히 셈을 했다.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또래일 것 같았다. 겨울에 태어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만 살다 간 아이. 내 배 속에서 살았던 날보다 짧게 살다간 아이. 강에 뿌렸고 그 물길을 따라 바다에 도착했을 때몇 번이고 저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했던 시절들. 그 후로 바다에 가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지만 보러 가면 안고 싶을 것 같았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손과 발이 저릴 것만 같았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깜깜한 아스팔트에 두 개의 빛기둥을 만들어냈다. 주윤은 옆 좌석에 앉은 소산의 헝클어진머리를 만졌다. 빗으로 곱게 빗고 하나로 모아 고무줄로단정하게 묶었다. 머리를 묶은 소산은 갑자기 용감해진 듯총명한 눈을 크게 떴다. 트럭은 출발했다. 주윤은 빛이 비추는 도로를 바라봤고소산은 단정하게 앉아 떨리는 눈으로 모요의 어두운 산을 바라봤고 파스칼은 새 친구의 무릎에 앉아 길게 하품을 한 뒤 곧 눈을 감았다.

급브레이크. 앞으로 쏠리는 섬뜩함에 잠에서 깼다. 상체를 조금 일으킨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사고가 났다거나 특이한 문제는 없어 보였고 버스도 계속 잘 달렸다. 시간을 확인했다. 7시30분. 앞에 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돌발 상황이 생긴 것도아닌데, 버스는 자꾸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력이 갑자기 빨라지고 느려지는 불쾌한 느낌.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더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나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보다 정연을 만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내가 가면 정연이 싫어할 것 같지만 그래도 거기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사과를 받아야겠다.

막막하고 하염없어도 눈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라. 눈과 비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지. 천국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좋은 곳에 있으니 슬퍼 말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기쁘게 나를 만나러 오렴.

엄마는 창고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통에 말린차와 꽃을 저장했다. 긴 겨울 동안 평생 마셔도 부족함이없을 것 같던 쑥과 꽃이 다 사라졌다. 엄마는 알았다. 겨울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것을. 둘째는 몰랐다. 평생보다 긴시간이 있다는 것을. 둘째는 마지막 통 속에 반쯤 남은 까만 쑥을 보며 시간의 끝을 예감했다. 첫째가 식탁 맞은편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춥다. 나무를 해야겠어.

이제 해는 질 것이다. 지는 해는 노랗고 그 빛은 따뜻하고 예뻐 보인다. 둘째는 셋째의 신발 위에 동그랗게 고여있는 햇빛을 봤다. 수저로 뜨면 떠질 것 같고 손가락을 대면 손끝에 묻을 것 같다. 빛을 마실 수 있다면, 빛을 옮길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걸 두 손에 가득 담아 슬픈 셋째의 입술에 흘려 넣어주고 아픈 첫째의 허리에 더운 열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가증한 저 빛. 겨울의 차가운 눈과얼음을 조금도 녹이지 못한다. 해가 졌다. 산과 하늘과 마당과 지붕과 창문과 언덕과 나무와 바위.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얼굴.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래전 내 얼굴이다. 젊고 단단하고 오만했던 표정이 그에게 있다. 그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와 나는원래 쌍둥이였다. 약했던 엄마는 커져가는 배에 손을 얹고두려움에 떨었다. 둘은 느꼈다. 한 배에서 함께 자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둘 다,
아니 셋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약속했다. 하나의 몸으로 삶을 절반씩 나눠 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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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에 서 있는 한 사람. 신 씨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칠판에 적힌 글씨를 지우개로 닦아내는 것처럼, 그렇게하면 기억이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걸까. 신 씨는 들고 있던 고구마 한 조각을 접시에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절벽 위 커다란 범선 모양의 도서관. 먼 옛날 그 자리엔 등대가 있었다. 평생 수평선과 하늘만 바라보던 등대지기. 그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려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 뜻대로 해줘야 할까요. 아니면 설득해서 완벽한꿈의 세계에 순응하며 살도록 한 번 더 도와줘야 할까요."
P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J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앉아 차분하게 대답을기다렸다.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왜 한계 앞에 무너진 사람의 등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커지는 걸까.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헛된 꿈을꾸는 사람의 손은 왜 잡아주고 싶은 걸까. 왜 나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는 그것이 진정한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담아 당신은 멋졌고 나는 그런 사람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고 당신의 말과 노래를 더 들어주고싶다고 했다. 허락해준다면 당신의 매니저를 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레릭이라고 하는 거야. 가치 있는 유물이라는 뜻이지.
쉽게 말해 레릭은 망가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악기를가치 있는 유물로 만드는 과정인 거야. 고귀하게 재탄생시키는 거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에이징된 악기는 소리부터 다르거든."

실패한 가수는 왼쪽 어깨엔 멀쩡한 기타를 오른쪽 어깨엔 내가 사준 망가진 기타를 메고 작은 소리로 중얼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다고 했다가 고마워라고 했다가 마지막엔 너무한다고 했다. 그가 떠난 침대엔 그의 실패의 기록을 담은 얇디얇은 노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해가 지는 군청색 해변,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며서서히 물드는 저녁. 수상한 자가 겨울 바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이 묘한 시간이라는 걸 안다. 어떤 이는 ‘매직아워‘라 부르고 어떤 이는 저것이 내 개인지 내 개를 물어 죽일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여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부른다.

소년은 장작 하나를 벽난로에 집어넣고 창가에 서서 밝아오는 바다를 바라봤다. 소년의 몸을 통과한 흰빛이 식탁을 환하게만들었다. 나무를 먹은 불꽃이 몸을 키우며 힘차게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온기가 퍼지는 새벽. 빵은 맛있고 커피는끝내줍니다, 라고 후기에 남겨야 할 것 같다.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있다. 단정하지만 단호한 음성의 닥터. 자, 이제 이야기를 나눕시다. 간밤엔 왜 그러셨나요? 그제야 난 이마와 왼쪽 눈을 덮고 있는 붕대를 감각한다. 따뜻하다. 부드러운 젤리처럼 따뜻한 것이 안에 둥지를틀고 있는 것 같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구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그의 입에서 당나귀, 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가족들은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돼. 이건 불가능해.
가족들의 힘으론 그를 도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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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반응은 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화제가 점점 어긋나기만 한다는것을 그들이 화제에 올리는 이야기는 보너스를 얼마나 받았느냐는: 지독한 직속 상관이 걸렸다는 둥, 유급 휴가를 어떻게 이용하면좋겠냐는 둥 모두 나와는 무관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자네들 신세가 부럽군"이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십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시절로 보인다. 이십대란,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한 힘을 체득해야 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득도 해도 안 되는 어중간한 친구를 잔뜩 갖고 있어봐야, 그저 외로움이나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지리멸렬한 만남을 거듭한다면 자립과 독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따름이다. 한 사람의 어엿한 남자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마는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아부 아니면 거만이라는 두 가지 태도밖에 취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 그냥 평범하게 타인과 접할 줄을 모른다.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며 대화를 나누고 일을 추진해나갈 줄을모른다. 어쨌든 이 세계에서는 필자 쪽에 그런 경향이 강한데 유치해서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편집자는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것도 일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는지시시껄렁한 칭찬까지 곁들인다. 그리고 내가 대등한 관계에서 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몇 사람은 오히려 거드름을 피운다.
대출판사, 또는 대신문사의 인간들은 그러한 나의 태도를 자기들에대한 아첨이라고 해석하는지, 유난스레 목청을 높인다. 같잖은 그엘리트 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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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출판사의 젊은 사장이 영화에손을 댄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참 능구렁이들은 위험하다는 둥어떻다는 둥 그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죽 늘어놓는 모양인데,
그들에게는 신참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나 같은 영화팬으로서는차제에 어떤 세계에 있는 사람이고를 막론하고 영화 만들기에 힘을 쏟는 자가 있다면 박수를 보내고 싶고 기대를 걸고 싶다. 실패와 성공을 문제삼기 전에, 그런 계기로 우리나라 영화계가 재기해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상정하고 0246〈댈린저〉는 좋았다. 그런 영화야말로 진정한 영화다.

겨울밤, 이불 속에서 이 책을 펼치면 나는 아주 행복했다. 피가요동쳤다. 그런 나머지 어른이 되면 바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박 통신사를 양성하는 전문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백경』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어도 멜빌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웬일인지 작가한테는 전혀 흥미가 일지않았다. 그런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하다. 소설 같은 것을 쓰는 타입의 인간을 이리저리 들쑤셔보았자 어차피 별 재미도 없는에피소드가 몇 가지 드러날 뿐인데 그것을 억지로 작품세계에 끼워맞추는 그럴싸한 해설 따위는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하얗고 거대한 고래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운운하는 억지 평론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저 가만히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느닷없이 엉뚱한질문을 퍼부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시골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있는 모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쓴 작품이 「버스 정거장이고, 질문을 잔뜩 퍼부은 일로 태어난 작품이 「늦은 오후의 거짓말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두 편의 중편소설과 한 편의 전작 장편소설이 자리하고 있다. 일인칭을 위한 열두 편이 다 끝나면 비교적 쉽사리 그 작품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시사회에 참석하여 완성된 작품을 보았다. 감독에게 감상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중간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찍으면 이렇게 되리란 예상이 적중했다.
나는 화면이 아름다웠다고 느낌을 말했다. 그러자 젊은 감독은갑자기 침묵하더니 혼자 도로를 건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로서는 자신이 있었으리라. 굉장히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칭찬을 해줬어야 했나,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적절한 기회를 만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재능을 잠재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적절한 기회라고 해서 딱히 선생에게 돈을주고 배우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은 문학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려 사면초가가 되자 소설을 썼다. 하기야 운도 재능의 일부분이라는 일설이 있으니 뭐라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아마 그림은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란 것은 자유와 변화였을 것이다. 넘쳐흐를 정도의 자유와 격렬한 변화,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듯 반듯한 정의의 깃발아래, 마음에 들지 않는 치들을-그게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는 짐작도 못 했지만-전부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증오의 대상인 가상의 적이 필요했는데, 행동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은아이였던 나로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 대상을 설정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손에 넣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까. 그것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나나 둘도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나 둘을 잃었다고 해서, 손에 넣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뭐 그리 대수로운가.

나는 문학 팬 대부분이 좋아하는 소설들이 형편없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당신들 멋대로 몸부림쳐봐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 감수성에 휘말린 채,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이에 작가는 여장 남자가 되고 말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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