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은 아빠를 기다렸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소산의곁에서 한참 놀았다. 소산은 카스텔라를 뜯어 부수었다. 황금 가루를 닮은 카스텔라 부스러기를 새들은 기분 좋게 쪼아 먹었고 어두워지기 전 다시 숲으로 날아갔다.

이젠 기다릴 필요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되지만 그 가엾은 것은 바보처럼 기다릴 거야.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가 계속 기다리다가 늙어 할머니가 되겠지. 하지만 톨게이트가 곧 폐쇄될 텐데 그것은 어디에서 아빠를 기다리려나.
주윤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공허함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동을 걸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어두운 산과 붉게 물드는 하늘을 봤다. 파스칼은 고구마를 먹다 말고 주윤을바라보고 있었다. 주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자신에게 고구마를 주는 그 좋은 사람을 더 이상 볼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마음 약한 사람이 실망을 이기지 못해 우울이 얼굴에 내려앉듯 파스칼의표정이 딱 그랬다.

파스칼은 슬픈 얼굴로 앞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윤은 속으로 조용히 셈을 했다.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또래일 것 같았다. 겨울에 태어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만 살다 간 아이. 내 배 속에서 살았던 날보다 짧게 살다간 아이. 강에 뿌렸고 그 물길을 따라 바다에 도착했을 때몇 번이고 저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했던 시절들. 그 후로 바다에 가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지만 보러 가면 안고 싶을 것 같았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손과 발이 저릴 것만 같았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깜깜한 아스팔트에 두 개의 빛기둥을 만들어냈다. 주윤은 옆 좌석에 앉은 소산의 헝클어진머리를 만졌다. 빗으로 곱게 빗고 하나로 모아 고무줄로단정하게 묶었다. 머리를 묶은 소산은 갑자기 용감해진 듯총명한 눈을 크게 떴다. 트럭은 출발했다. 주윤은 빛이 비추는 도로를 바라봤고소산은 단정하게 앉아 떨리는 눈으로 모요의 어두운 산을 바라봤고 파스칼은 새 친구의 무릎에 앉아 길게 하품을 한 뒤 곧 눈을 감았다.

급브레이크. 앞으로 쏠리는 섬뜩함에 잠에서 깼다. 상체를 조금 일으킨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사고가 났다거나 특이한 문제는 없어 보였고 버스도 계속 잘 달렸다. 시간을 확인했다. 7시30분. 앞에 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돌발 상황이 생긴 것도아닌데, 버스는 자꾸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력이 갑자기 빨라지고 느려지는 불쾌한 느낌.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더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나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보다 정연을 만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내가 가면 정연이 싫어할 것 같지만 그래도 거기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사과를 받아야겠다.

막막하고 하염없어도 눈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라. 눈과 비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지. 천국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좋은 곳에 있으니 슬퍼 말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기쁘게 나를 만나러 오렴.

엄마는 창고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통에 말린차와 꽃을 저장했다. 긴 겨울 동안 평생 마셔도 부족함이없을 것 같던 쑥과 꽃이 다 사라졌다. 엄마는 알았다. 겨울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것을. 둘째는 몰랐다. 평생보다 긴시간이 있다는 것을. 둘째는 마지막 통 속에 반쯤 남은 까만 쑥을 보며 시간의 끝을 예감했다. 첫째가 식탁 맞은편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춥다. 나무를 해야겠어.

이제 해는 질 것이다. 지는 해는 노랗고 그 빛은 따뜻하고 예뻐 보인다. 둘째는 셋째의 신발 위에 동그랗게 고여있는 햇빛을 봤다. 수저로 뜨면 떠질 것 같고 손가락을 대면 손끝에 묻을 것 같다. 빛을 마실 수 있다면, 빛을 옮길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걸 두 손에 가득 담아 슬픈 셋째의 입술에 흘려 넣어주고 아픈 첫째의 허리에 더운 열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가증한 저 빛. 겨울의 차가운 눈과얼음을 조금도 녹이지 못한다. 해가 졌다. 산과 하늘과 마당과 지붕과 창문과 언덕과 나무와 바위.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얼굴.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래전 내 얼굴이다. 젊고 단단하고 오만했던 표정이 그에게 있다. 그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와 나는원래 쌍둥이였다. 약했던 엄마는 커져가는 배에 손을 얹고두려움에 떨었다. 둘은 느꼈다. 한 배에서 함께 자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둘 다,
아니 셋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약속했다. 하나의 몸으로 삶을 절반씩 나눠 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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