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은 소멸하면서 동시에 그 소멸에 의해 탄생한다.
불꽃은 살아 있는 것을 태워서 생과 멸의 차이를 지운다.
시베리아의 불꽃에는 인간이 수행하는 언어화와 의미화를 끝없이 유예시키고 무력화시키고 부정하는 힘이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 자체이고, 의미와 의미의 격렬한 투쟁이고, 정의와 불의가뒤섞이고 혼재된 역사의 이미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바깥의 무구하고 무정하며 물질적인 세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의 모습인지도.

PR그 도시의 북구인들은 저 격변의 후유증과 밥벌이의 곤핍으로 거칠고 앙상했으나, 한편으로 그네들의 삶에는 전세기적前世紀的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낯선 향기가스며 있었다. 그것은 혁명과 몰락의 시대를 온몸으로 거쳐 온 이들의 체취이자, 가망 없이 피로한 삶을 문학과 종교에 의탁해온 이들의 향기였다.

총살 직전, 사형수들은 한꺼번에 ‘구원’된다. 황제의 은사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는 선언문이 낭독된 것이다.
방금까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형수들은 유배형으로 감형된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목숨을 구한다.
그 순간의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느낌이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격렬한 안도였을까. 환희였을까. 그도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배신감이었을까. 아마 그 자신도 온전히 기억을 복원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이미 삶의 감각이 소진되어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을 테니까.
봉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애초부터 총살형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지하 서클 멤버들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일종의 ‘연극‘을연출한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그런 의미에서 내러티브는 살아 있는 것의 존재 방식이아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와는 무관한 수많은 ‘디그레션‘으로 가득하다. 실은 그 ‘디그레션‘들 자체가 삶이라고 해야 한다. 삶은 삶이 존재하는 구체적 순간들의 평등한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현재도 느낄 수 없고, 진짜 삶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삶의 의미와 무의미조차도.

바흐친이 즐겨 다루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역시 그런 의미에서만 ‘사랑의 소설‘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분노와 증오와 질투와 사랑이 동시에 들끓는, 인간의 것이기때문이다. 소위 아가페적 사랑은 도스토옙스키의 것이 아니고, 소설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 ‘동시에‘라는 것은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지, 모순적 상황의 수락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위해 자신을 기투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어쩌면 그것은, 가능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넘어서서, 단지 글쓰기라는 실천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정신적지향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나 신기루와 같은, 하지만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삶은 사실 무엇으로도 승화되지 않는다. 그것 자체이기때문이다. 삶은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도 모른다.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불가피하게 그 직접성으로만 존재한다. 시적 승화도 불가능하고 소설적 아이러니도 불필요한 지점, 그곳이삶의 현장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질문을 답습하는 것, 알려져 있는 답안을 반복하는 것.
알랭 바디우의 생각을 따르자면, 이런 반복에서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은 그 자체로이미 창조적이다. 기존의 공통 지평과 공통 감각을 와해하고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 바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진리‘는 어딘가에 정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만, 또는 사건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반대로 스토리텔링 코드에서는 사건이 대개 공통 감각의 경계 내에서 움직인다. 독자의 기대를 적절한 수준에서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히어로물을 보는 이유는 ‘새로운‘ 영웅 서사를 기대하면서 동시에 익숙한 권선징악 코드를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클로즈업으로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면 비극의 요소가 강해지고, 롱숏으로 거리를 두면 희극의 요소가 강해진다고.
당연하게도 삶이 그 자체로 비극이거나 희극인 것은 아니다. 삶은 차라리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희비극적 어긋남 속에서 흘러간다. 시선이 바뀌면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고 각도가 바뀌면 희극과 비극이 뒤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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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팽이는 나를 비웃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내 앞에서 돈다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으로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나는 한밤 내 운다.

뭇 발에 밟히어 진탕이 될 때까지눈을 희다고만 할 수는 없다.
눈은우모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거기 모인 구리빛 건강의 힘을 쌓아 둔다.
톱날에 잘려지는 베니어의 섬세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파고 들어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 한다 잘 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을 몰아 쥐고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사랑을 보듬고 울고 있는 사람들, 한 하늘과한 세상의 목마름을 나누어 지니면서저렇게 저렇게 용감한 사람들, 가는 사람들.
아직은 똑똑히 우리도 보고 있어야 한다.

시를 쓸 때는 언제나 굶주림으로, 술이 깬다음날 새벽의 목마름으로, 저 혼자 억울한 자유로,
그렇게 나는 나의 예술을 키워 왔다.
내 시는 무디어 칼을 무찌르지 못하지만어리석게 어리석게 나를 이겨 낸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곁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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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조롱하거나 파멸시키는 진짜 바보는 자신을 모르는사람이야. 난 너무 오랫동안 그런 인간이었어. 당신도 너무오랫동안 그런 인간이었지. 이젠 그러지 마. 최고의 악덕은경박함이야 깨닫는 것은 뭐든 옳은 법이지.
*****ᆞ체면을 잃고 몰락한 인간이 되어 죄수복을 입고 이 캄캄한 감방에 앉아서 나는 자책하고 있어. 괴로워서 마음이 술렁이고 잠을 설치는 밤에, 고통스럽도록 지루한 낮에 나 자신을내 삶을 완전히 장탓하지.
· 지적이지 못한 우정이******악하도록 허용했으니.
.

그럼에도 이 회고록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놀라운 묘사는 우리에게 불쾌감보다는 감동을 준다. 와일드의 글은 강박적인 반복의 괴로움을 반영하면서-지성은 흔들리고 미사여구는 무거워진다-고립 상태에서의 통찰이 가져오는 갑갑함을 전력으로 재현한다. 따라서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글 자체가 속박된 삶의 등가물이된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은 자기 관찰의 훌륭한기록이다. 『심연으로부터』처럼, 신경증적인 정체停滯 자체를구현함으로써 강박적 글쓰기라는 비난을 피한다. 내적 유배의농축물이자 자멸의 정수.
드퀸시의 고독은 자신과 연결될 수 없기에 타인과도 연결될 수 없는 영혼의 고독이다. 이 주제는 다음 세기까지 쭉 이어져, 간접적으로만 아는 것도 말할 줄 아는 작가들이 외로움의진정한 본질을 근원적으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최고의 회고록들이 나왔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그래야만 우리의 한계를 알고 연민으로 삶을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과거라 해도 과거를 건드리면, 이미 다 끝나버려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정신 속에 보이지 않게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주위를 맴돌고 주르르 미끄러지며 우리를 터무니없이 외롭게 만드는 공포가 일어날 때도 있다.

아프리카는 내 어린 시절의 숨결이자 삶이었다. 그 땅은 여전히 내 가장 어두운 공포의 숙주이자, 언제나 흥미롭지만 한번도 완전히 풀어본 적 없는 수수께끼들의 요람이다. …………바다처럼 무자비하고, 그곳의 사막들처럼 타협을 모르며가혹함과 베풂에 절제가 없다. 모든 인종에게 많은 것을 주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 하지만 아프리카의 영혼, 온전함, 느리면서도 거침없는 삶의 맥동은 고유하며 이리듬이 너무도 독특하기에, 어릴 적부터 그 규칙적이고 끝없는 박자에 물들지 않은 이방인이라면 제대로 체험할 수가 없다. 음악도 스텝의 의미도 모른 채 마사이족의 출전 무용을 구경하는 사람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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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강렬하고, 감정은 생생하며, 관점은 일관성 있지만,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더 강해지지도 더 약해지지도 않는단 하나의 어조로 비난과 책망을 퍼붓고 있다. 현대 사회의 병폐와 불만의 원인을 찾아 쭉쭉 거슬러 올라가 보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산된 듯한 행동을 하는 ‘해방된‘ 여성들의음흉하고 천박한 의도가 있다. 단 한 순간도-단 한 단락이나단 한 문장에서도ㅡ서술자는 서술 대상에 공감하지 않는다.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 현대 여성을 바라보지 않으며, 현대 여성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할 마음이 없다. 글에서내적 움직임을 자극하는 데 꼭 필요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는것은 공감이다. 소설에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들-『아들과 연인』에 등장하는 난폭한 아버지가 가장 유명하다-에게까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는 로런스가 이 에세이에서는
‘끈질기게 ‘다른‘ 존재로 남은 여성들 때문에 퇴락한 세상을 끊임없이 관조할 뿐이다.

상상력으로 쓰는 글에서는 대상에 대한 공감이 꼭 필요한데,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온당함 때문이 아니라, 공감이없으면 마음이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교류는 실패하고, 연상의 흐름은 말라버리고, 작품은 편협해진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공감이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입체감을 부여하는 수준의 공감이다.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타자‘를 타자 자신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감정이입이야말로 글을 진전시킨다. 『존경하는 어머니 Mommie Dearest *처럼 서술자는 아무잘못 없는 사람, 서술 대상은 괴물로 묘사되는 회고록은 상황이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기에 실패작이 된다. 드라마가 깊어지려면, 괴물의 외로움과 무고한 자의 교활함이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서술자가 단순하지 않아야 대상에게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자기 신화화에 열을 올리는 미국 남부 출신 작가 해리 크루스는 자신이 자란 조지아주의 늪지 문화를 배경으로 길고 짧은 소설들을 쓴다. 에세이 나는 왜 내가 사는 곳에 사는가에서는 대리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이용하여 ‘고향‘에 대한 지독한 양가감정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심리의 치명적 급소를 탐구하기도 한다. 이 에세이 역시 작가의강렬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비밀은,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인물이 되고픈, 더 다채로운 인간이 되고픈, 우리가 경험한 모든 정체성과 환상적인 활극을 통합하고픈, 무엇보다 포리스트론 묘지로 향하기전까지 쭉 우리네 삶을 실험해보고픈 웅장한 염원이 여전히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보겠다.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결국 우리 자신이었다. 마치 우리는 ‘약속의 땅‘이라는 옛날 옛적의 고리타분한 슬로건을 문자 그대로받아들여, 주변 공간이 아닌 우리 존재의 구덩이 속으로 흡수해버린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가 되어간다는 흥분에,
심지어는 되어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서는 바지가 내려가 더러운 속옷과 앙상한 다리가 드러나기도 한다. 내 장담컨대, 웃음을 사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것도 우리를 아주오랫동안 막지는 못한다. 우리는 일찌감치 걸려들었다.

‘내가 쓰는 것은 한 시간을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다. 퍽퍽한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정****신의 고양을 선사할 교향곡이 아니다. 이 글은 절망 속에 쓰인 인생 이야기이다. ..……… 하층민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
나는 30년을 살았으며, 이 세월 동안 인생의 쓴맛을 보았다.
죽음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을 위해 죽는 자들에 속해 있지 않다. 나는 다른 원인들로, 즉 가난에 지쳐서, 부와 권력에 희생되어,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는자들에 속해 있다. 사랑의 고통이나 환멸 때문에 절망에 빠져죽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지진은 새로운샘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대지의 존재이며 우리의 투쟁은곧 대지의 투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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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주제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상상한다. 이 연관성은 밀접하다. 사실, 결정적이다.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이 서술자가 페르소나가 된다. 그의어조, 그의 시각, 그가 구사하는 문장의 리듬, 관찰하거나 무시할 대상은 주제에 맞게 선택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은 서술자 혹은 페르소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이 서술자-페르소나에게 충실했고, 머지않아 더할 나위 없이 몰입하게 되었다. 나 혼자서는,
일상의 나로서는 할 수 없었을 이야기를 하는 이 타자와의 만남을 날마다 고대했다. 그를 발견한 행운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행운이라고). 그의 스타일, 너그러움, 초연함(나로부터의 휴식이라니!)이 감탄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깨달음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회고록과 에세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논픽션 페르소나가 얼마나 기나긴 역사를 살아왔는지, 문화적 변화에 얼마나잘 적응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세기가 저물어가면서 ‘자아 찾기‘의 개념이-실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 자아가 온전하는 파편적이든, 현실적이든 이질적이든, 친밀하든낯설든,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소설과 시의 페르소나가 그렇듯놀라우리만치 강하게, 지략을 발휘해 계속해서 자신을 재창조해왔다. 새천년의 도래와 함께, 무슨 이야기가 됐건 그것을 담을 상황과 이를 해석하여 진실을 말할 서술자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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