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봄. 하늘까지 잔인하여 봄철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지독한 가뭄이 초여름까지 이어지던 어느 날, 나는 오랫동안 몸을의탁했던 그 고장을 떠나기 위해 역 대합실에 있었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영등포까지 가는 기차표를 산 뒤, 나는 문득 일 년 전의 그여자를 떠올렸다. 똑같이 송 과장한테 당했다는 동료의식이었는지아니면 그 여자 때문에 이 꼴이 되었다는 원망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아주 잠깐 그녀를 떠올렸을 뿐 곧 나는 내 미래에 사로잡혀 착잡한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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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도 곧 애쓰기 시작했었다. 맥이 풀린 상태였지만 그런대로 우리 인생의 짜깁기를 시도했다. 감쪽같이 지울 수는 없더라도보기 흉한 자국이 남지 않게 일을 꿰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나는 가끔씩 잠든 성준이의 연약한 목덜미에 코를 묻고 아이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는데 그 무렵의 나에게희망은 곧 그 달콤한 향기였다. 내가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던져져있더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마주하는 어둠은 음흉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다. 불행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다만 때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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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했던 대로 그의 문체는 수준 이상의 숙련된 솜씨였다. 그럴 줄알았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인간임을 간파했다. 내가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트는 시작부터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꼬박 한나절에 걸쳐 나는 그것을 다 읽어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강렬하게 담배 생각이 솟구쳤다. 나는 연달아서 두 개비의 담배를 필터가 타들어 가도록 빨아들인 뒤 현기증으로 핑글 돌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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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누나는 분명히 더 나은 생활을 보장받고 집을 버렸을 것이다. 집보다 더한 남루함으로 자리를 옮길 누나는 절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저씨가 차를 끓였다. 감잎차였다. 그는 등산용 버너를 가지고 있었다. 물을 끓인 다음 어느 정도 식혀서 감잎을넣어 우려낸 차를 한 잔씩 마셨다. 찻잔은 여기저기 이가 빠진 싸구려였어도 나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나성여관 같은 곳에서는 식사후의 차 한 잔 같은 문화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 이웃들 대개가 다 그러하였다. 운이 좋으면 제철 과일 한 조각을 얻어먹거나손님이 남기고 간 청량음료를 물컵에 나누어 마신 것이 내가 아는후식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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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선풍기날개가 돌기나 한 듯 찬바람이 휘잉 몰려왔다. 정말 대단한 힘이었다. 쥬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계집애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마른침만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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