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바라는 것을 함께 도모했던 우리가, 이제는 각자 살아남을 길을 찾기 위해 흩어지는 사람들로 남아야 한다는 걱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더이상 남겨지는 방식으로 살지 말자.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내가 지금껏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왔던건 둔감해서였다고 해두자. 하지만 행복과 둔감이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어떤 단어라도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잘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호영의 답장이 늦는다. 견디다보면 결국 누군가를 닮게 될 뿐이라는걸 호영은 알까. 엄마가 사다리를 오르더니 지붕의 눈을 털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을 끼다 말고 서둘러 썼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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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은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음악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별로 할말이 없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상일은 내게 주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 물었다. 클래식. 상일은 자기도 클래식은 잘 모른다고 했고 나는 내심 다행스러웠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를 알면 섹스 스타일도 알 수 있는데, 상일의 말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웃음기 섞인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상일은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내가 뭘 좀 썼는데 한번 봐줄래? 맞춤법도 맞지 않는 문장 몇 개가 영어문장들 사이에 간혹 섞여 있는 짧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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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영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영이는 남편의 딸인데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 아이를 남편과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사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재영이가 아직도 남편과 한 달에 한 번쯤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남편은 내게 그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주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아다주었다. 짐보에게 그애 이야기를 몇 번인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매끈한 얼굴을 커터 칼로 그으면 어떤 느낌일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짐보는 나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기에 그에게는 마치 땅을 파서 비밀을 이야기하고 묻어버리는 것처럼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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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애인이었다. 준우는 받기 싫은 마음과 함께 전화가 끊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다.
대여섯 번의 신호 후에 급히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는 비가 내리는데, 당신은 좋아? 애인의 목소리는 방금 잠에서 깬 듯 나른했다.
저쪽에서는, 그랬어? 그랬어? 하며 아이를 달래는 듯한 홍의 목소리와 기사의 웃음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휴지를 버리고 싶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휴지통이 없었다. 손에 쥔 휴지는 점점 더 축축해졌다. 준우는 휴지통을 찾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른 마음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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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식사를 마친 후 하나가 더빙에 참여한 영화를 보았다. 007시리즈였는데, 하나가 맡은 건 주디 덴치가 연기한 M 역이었다.
솔직히 주디 덴치는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했거든. 근데 되게 잘 어울린다. 카리스마 있어, 지환은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지환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잘 안 늙거든. 제일 천천히 간대, 목소리가.
간다고? 슬프다.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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