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뒤라는 시간을 의식하고, 자신이 그 일부라고 여기게 된다. 거리와 골목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자기 존재가깊은 뿌리, 또 먼 미래와 이어져 있음을 믿게 된다. 현수동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존중하고 대화한다.
이런 역사 감각은 조선시대 궁궐이나 민속촌을걸을 때에는 얻지 못한다. 그런 장소들에는 현재가너무 희박하며, 나는 그 공간의 방문객일 따름이다.
궁궐에 살았던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신분도 아니었다.
궁궐이나 민속촌의 존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곳이 내 고향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흰 꽃이 피고 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 아래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웃통을 벗은 채땀을 뻘뻘 흘리며 금속을 달구고 두드리는 대장장이들, 콩을 삶는 가마솥에 장작을 넣는 소년 소녀, 그앞으로 새로 만든 독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들 막배에서 내린 소금장수와 얼굴이 까맣게 탄 새우젓장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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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그들의 인식은 행동이 되었고, 그들의 사유는 한갓 논증적인 인식을 떠났으며, 인간에 대한 그들의 고찰은 지적 직관이 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행동의 영지주의자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것이 그들의 행동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달리 당신에게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선은 모든 것을 환히 비추어주는 인간 인식, 객체와 주체의 일치가 일어나는 인식입니다. 선한 인간은 더 이상 타자의 영혼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읽듯이 타자의 영혼을 읽습니다. 그가 타자로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기적이요 은총이자 구원입니다. 천상의 것이 지상으로 하강한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참된 삶, 생생한 삶입니다.(그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든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든 상관없습니다.) 선은 윤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선은 윤리학적 범주가 아니며, 당신은 논리 정연한 그 어떤윤리학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터인데,
윤리는 일반적이고 의무를 지우는 것이며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통상적인 삶의 혼돈에서 인간을 떼어내는 최초의 고양, 가장 소박한 고양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서자신의 경험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은 진정한 삶으로의 귀환이자, 인간의 참된 귀향입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삶이라부르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두 가지 삶을 서로 엄격하게구분하는 일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선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믿음 역시 마찬가지로 절대적이며 확고합니다. 선이란 신들림입니다. 그것은 온화하지 않고, 세련된 것도 아니며, 정적주의(靜寂主意)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거칠고 잔혹하며 맹목적이고 모험적입니다. 선한 사람의 영혼에는 이유와 결과 같은 심리학적 내용이 일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운명이 부조리한 명령을 적는 순결한 백지이며, 그 명령은 맹목적으로, 앞뒤를 돌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끝까지 수행됩니다. 이러한 불가능성이 행동이 되고, 이러한 맹목성이 투시가 되며, 이러한 무자비함이 선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이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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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루틴이 내게도 통할 거라는 생각은 빨리 버리는 게좋아요. 그냥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주는 지독히도 커다란 장소입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해 서로 다른 옳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지독히도 많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지요."
제가 우주의 비밀을 하나 더 알려 드릴까요? 사람들은 당신한테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관심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라, 왜 그렇게 살고 있냐, 운동 좀 해라, 살 좀 빼야 하지 않겠냐, 제발목표를 갖고 살아라………….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당신이 왜 운동을 할 수 없는지,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뭐였는지, 남들은 괜찮다는데 나만 이상하게 예민한 상태가 되는 이유가 뭔지,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질때 얼마나 삶이 끔찍한지, 쥐뿔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사세요. 좋아하는걸 더 좋아하고,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으면서 살아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의문이 생길 겁니다. 작가님은책을 보는 시간이 없네요? 글을 쓰는 시간도 없네요?
맞습니다. 일부러 책 보는 시간과 글 쓰는 시간은 뺐습니다. 왜냐하면, 책 읽기와 글쓰기는 언제나 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시간을 빼 두지 않아도 문자를 읽고 문자를 씁니다. 그건 작가라는 직업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활자중독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자를 읽습니다. 내 마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문자를 사용해 글을 씁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고, 시간이 날 때마다글을 씁니다. 메모 형태의 글을 쓸 때도 있고 소설을쓸 때도 있습니다. 글쓰기에도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쓰고 싶을 때 자리에 앉는다‘입니다. 쓰고 싶지 않은데도 마감 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앉으면,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는 산책을 하거나 책 속으로여행을 떠나거나 잠깐 눈을 붙입니다. 그러다 보면 최소한 하루에 몇 번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앉아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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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내적인 중요성이 역사적 정점에 도달했다. 개인은 더 이상추상적 이상주의에서처럼 초월적 세계들의 담지자로서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 아니,
존재의 가치들은 이제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개인의 영혼에 대해 그것들이 갖는 의의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타당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138너의 율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방주(方舟)가 텅 비어있다면,
너의 춤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의 춤은 대상이 없으니 고갈되지 않을 것이고,
사막을 위한 춤, 너른 공간을 위한 춤이 될 것이다.
-앙리 프랑크

언제나여기서 희망은 삶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예술 작품이 아니다. 삶에부딪쳐 좌초됨으로써 모독당하고 더럽혀지는 그런 예술 작품이 아닌것이다. 희망은 그 자체로서 삶의 한 부분이다. 희망은 삶에 달라붙어서 그리고 삶을 장식하는 가운데 삶을 지배하려 시도하는, 그렇지만 항상 삶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이부단한 투쟁이 회상에서는 흥미롭고도 파악할 수 없는 길, 그렇지만체험되는 현재적 순간과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런길로 변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미끄러져 들어오고 미끄러져 나가는지속-이러한 지속의 정체(停滯)로서 그 순간은 의식적 직관의 순간을 제공하는데ㅡ으로 아주 풍부해서, 그 풍부함은 지나간 것과 잃어버린 것에도 전달되며, 심지어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쳐버린 것을 체험의 가치로써 장식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여 실패했던 것이 가치의 계기가 되고, 삶이 거부했던 것에 대한 생각과 체험이 삶의 충만함이 흘러나오는 듯 보이는 원천이 되는, 기이하고도 멜랑콜리한 역설적 사태가 생겨난다. 모든 의미 실현의 전적인 부재가형상화되어 있지만, 그 형상화는 진정한 삶의 총체성이 갖는 풍부하고 원환적인 충만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환멸소설의 분위기 있는 의사(擬似) 서정성은, 회상을 통한 체험속에서 대상과 주관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데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즉 회상은 실제로 존재했던 그대로의 객관, 그리고 주관이 이상으로 열망했던 전범, 이 양자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현재적인 주관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와 같은 형상화에 내재하는 신랄함과 불쾌함은 형상화된 내용의 암울함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형식에서 그대로 방치된 불협화음에서 유래한다. 즉 체험의 대상은 극의 형식 법칙들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그 대상을 체험하는 주관성은 서정적인 주관성인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과 서정시 그리고 서사문학은 그 위계를 어떻게 생각하든-하나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정 반, 합으로 존재하는 것이아니다. 그것들 각각은 서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 형상화 방식이다. 따라서 각 형식의 긍정성이란 각기 고유한 구조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다. 각각의 형식에서 기분으로서 발산되는 듯이 보이는 삶의 긍정은, 각 형식에 의해 요구된 불협화음의 해소, 각 형식에 의해창조된 고유한 실체의 긍정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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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형식이 그 내용들의 모든 암담함과 슬픔 저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긍정은, 실패한 추구의 이면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면서 멀리서 아른거리고 있는 의미일 뿐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는 바로 이 헛된 추구와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충만이기도 하다. 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다. 즉 소설이 들려주는 위안의 노래는 잃어버린 의미의 맹아와 족적이 어디에서나 가시화된다는 것을, 그리고 적대자도본질의 기사(騎士)와 같은 고향, 그 잃어버린 고향 출신이며, 그렇기때문에 의미 내재성이 어디에서나 똑같이 현존하기 위해서는 의미내재성이 삶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는통찰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소설의 고상한 서사적 포에지의 담지자가 된다. 즉시간은 가차 없이 현존하게 되었는바,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시간의흐름이 지닌 명확한 방향을 거슬러 갈 수 없으며, 또 그 흐름의 예측할 수 없는 진행을 선험성의 둑으로 통제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모종의 체념적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즉 이 모든 것은 어딘가에서 나와 어딘가로 갈 수밖에 없으며, 또 비록 그 방향이 어떠한 의미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하튼 하나의 방향은 있다는 것이다.

시대에 의해 주어진 문제성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못하며, 실현불가능한 의미를 일별하고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는것은, 그리고 작가로 하여금 요청의 차원에서는 보편 타당성을 지닐수도 있을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을 현실의 존재해 있는 형성적 의미로 정립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바로 작가의 유토피아적의향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러한 의미 수준으로 억지로 끌어올려질 수 없으며, 또 위대한 형식의 모든 결정적인 문제에서 그렇듯이-이러한 심연을 건너갈 수 있을 만큼 위대하고도 노련한 형상화기예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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