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형식이 그 내용들의 모든 암담함과 슬픔 저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긍정은, 실패한 추구의 이면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면서 멀리서 아른거리고 있는 의미일 뿐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는 바로 이 헛된 추구와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충만이기도 하다. 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다. 즉 소설이 들려주는 위안의 노래는 잃어버린 의미의 맹아와 족적이 어디에서나 가시화된다는 것을, 그리고 적대자도본질의 기사(騎士)와 같은 고향, 그 잃어버린 고향 출신이며, 그렇기때문에 의미 내재성이 어디에서나 똑같이 현존하기 위해서는 의미내재성이 삶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는통찰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소설의 고상한 서사적 포에지의 담지자가 된다. 즉시간은 가차 없이 현존하게 되었는바,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시간의흐름이 지닌 명확한 방향을 거슬러 갈 수 없으며, 또 그 흐름의 예측할 수 없는 진행을 선험성의 둑으로 통제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모종의 체념적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즉 이 모든 것은 어딘가에서 나와 어딘가로 갈 수밖에 없으며, 또 비록 그 방향이 어떠한 의미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하튼 하나의 방향은 있다는 것이다.
시대에 의해 주어진 문제성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못하며, 실현불가능한 의미를 일별하고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는것은, 그리고 작가로 하여금 요청의 차원에서는 보편 타당성을 지닐수도 있을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을 현실의 존재해 있는 형성적 의미로 정립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바로 작가의 유토피아적의향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러한 의미 수준으로 억지로 끌어올려질 수 없으며, 또 위대한 형식의 모든 결정적인 문제에서 그렇듯이-이러한 심연을 건너갈 수 있을 만큼 위대하고도 노련한 형상화기예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