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모두와 함께 왁자지껄 소동을 피우다가도 어느 틈엔가 예의 범상치 않은 눈길로, 술에 만취되어 큰 소리로 꽥꽥거리는 선원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리고는 알게 모르게 차가운 방관자가 되려 노력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오래도록 짓무른 상처나 비극적인 냄새가 푹푹 풍기는 환경에처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뜻 같다. 과연 그럴까. 만약 정말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직업을 찾으러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도 몇 편의 소설을 쓰리라 자신감에 넘쳐 있는 나는 책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소설들이 분노에차 있고 고뇌하는 작가들의 작품보다 질이 떨어지리라는 생각도하지 않는다. 참으로 당당한 자신감이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서 소설을 쓰는 나는 내 쪽이 정상이라고 믿는다. 볼티지가 높아진 틈을 타 단숨에 매듭을 짓는 타입의 소설가든 파상공격 타입의 소설가든 한 작품이 끝나면 방대한 에너지를진지하게 소비하느라 무척 지쳐 있을 터이므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소설을 한 편 쓰고 나면 당장이라도 레이오프(layoff)를 취해야 하는데, 술 같은 것으로 간편하게 기분을 전환하고는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천재이든지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미 주인공을 나‘로 하든 ‘마루야마 겐지‘로 하든, 더 나아가소재를 자기 체험에서 얻었다고 주석을 달든 아무도 소설을 진실그 자체라고 믿지 않는다. 만약 믿는 자가 있다면 세상 물정 하나모르면서 문학에만 심취해 있는 소녀든지, 행복한 인생을 보내다 노망이 들었는데도 문학을 좋아하는 풍류객 정도일 것이다. 소설뿐만아니라 영화나 연극에도 사람들은 옛날처럼 심취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어떤 시골에서도 마쯔리 (일본 고유의 전통 축제 -옮긴이)에서본 유랑 극단 때문에 이틀, 사흘을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 작품에 몇 가지쯤 감동할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힘이 있다 해도, 모두 마음속으로는 ‘이건 진짜 같은거짓 이야기‘ 라고 생각할 것이다. 텔레비전이 방방곡곡으로 보급된탓인지 활자의 범람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눈은 기름이 올랐고 의심이 많아졌다.

그 조건이란 우선 ‘풍경‘의 유무이다. 내가 말하는 풍경이란 단순히 회화적인 광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몸담고있는 확고한 ‘장소‘ 이다. 또 그 장소란 실재하는 도시나 동네가 아니고, 줄거리와 직접 관계가 있든 없든 등장인물이 유형 무형의 영향을 받는 ‘공간‘이다. 일본 문학에서는 ‘공간‘이 별 대접을 못 받아왔다. 필연성이야 있든 말든,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토지라는 변변치 않은 변명을 하거나 말거나, ‘공간‘은 늘 거기에 무표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은 우연으로 바라던 바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는
‘공간‘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로케이션의 경우 있는 그대로의 공간이 감독의 이미지에 충실한 경우는 드물다. 전봇대 하나나 둘쯤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소설과 달라서 날씨나 지형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감독들은 ‘공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타협을강요당하는 것이다.

한 작품이 완성될 무렵, 나는 이렇게 천연덕스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이 작품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다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만원 전철 속에서나 독신자 기숙사에서나 전신실에서나 그 생각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복권을한꺼번에 천 장이나 산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처럼 신나는 일이 달리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그야말로살아 있는 동안 천국에 가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취하도록 술을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수많은 여자들과 친분을 맺고 싶다는생각도 없었지만, 성가신 일 없이 혼자 살아보고 싶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조직의 목적이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인 이상, 집단이란 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이상, 나는 그런 마찰을 추악한 현상으로 파악하여 실망하지않는다.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결함을 지니고 있는 나와는 다른사람들이 굳세게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오히려 바람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울기

나는 지금 자유롭다. 내 주변은 자유로 가득하다. 오로지 좋아하는 일에만 눈길을 돌릴 수 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접하면 당장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한 입장이다. 제어 장치가 극단적으로 적은 이 생활이,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인이 생활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나날을거듭할 뿐인 이 생활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그리고 그안에서 과연 어떤 소설이 태어날 것인지.

그건 그렇고, 귀찮은 일을 맡아 가장 힘들었던 대목은, 왜 좋은가, 왜 싫은가 그 이유를 기술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냥 좋다라든가그냥 싫다는 말뿐이라면 아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랬다. 나는 깜박 잊고 있었다. 그 일에 돈이 지불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함정에 걸려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두 가지 인생길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시도를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샐러리맨을계속하였다면 지금 어떤 사나이가 되어 있을까, 하고, 내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늠름함을 과연 나 자신한테서도 느낄 수 있을까. 현실사회에 무수히 존재하는 벽과 충돌하는 사이에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을까. 아니면 반대로 타협만 배워가지고 별볼일 없는 사나이로 전락해 있을까. 아니면 또 지금의 나와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있을까. 역시 어리석은 상상이다.

영화의 원작자란 입장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각오는 이미 되어있다고 나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두세 번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진짜 영상보다 강렬하고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해왔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설과 영화를 대결시켜보는 것은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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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생각하면 이들 이미지의 각 장면은 본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전혀 무의미하고 각기 무관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과거의 어떤 이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사고를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미묘한 형태로, 더구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을깨닫는 일이 있다. 그야말로 진리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은 경우마저있다. 동물원에서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나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새끼 원숭이를 질질 끌고 가는 어미 원숭이를 보았을 때가 그랬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어느 누구의 설명 없이도, 커다란 진실을 획득한 느낌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확실한 이미지에 무슨 가공과 장식이 필요하랴. 설사 그것을 원고지 수백 매에 장황하게 써본다 한들, 필시 진실에서 빗나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 그 자체가 사상이며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현상론에가까울지도 모르겠으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투명한 세계에서도, 실제로 거기에 몸담고보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짤막한 한 장면이 되어 가슴에 새겨지고,
사물에 대한 사고 방식을 미묘하게 좌우하며,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유발한다.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지식인보다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노인 쪽이, 눈길이나 몸짓에 있어서는 훨씬 더 중후함DE #1을 풍기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작가인 이상 논(論)보다는 소설로 승부를 내고 싶다.

달이 떠 있든 떠 있지 않는 산촌의 밤에는 무시무시함이 떠다닌다. 도시에서는 밤이 시간을 두고 점차 깊어가지만 산촌의 밤은, 해가 떨어진 그 순간 느닷없이, 깊은 수조 가득 채워진 물이 일시에빠져나가는 것 같은 놀람과 함께 찾아온다. 줄줄이 이어진 산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인가에 켜진 불은 나무숲에 가려 가물가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하지만,

바스락 하고 무슨 이상한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단박에 튀어일어나 그 녀석을 침묵시켜야겠다는 일념에, 한시라도 빨리 안도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공격 수단을 분망하게 떠올린다. 마음 한구석에는 ‘바보 같은 짓‘ 이란 생각이, 다른 한구석에는 나 자신을비웃고 있는 웃음이 자리하고 있지만, 나머지 팔 할은 완전히 불미스런 밤의 페이스에 빨려들어가 있다. 만약,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면 이렇게 격퇴해야지, 하고 생각할 때마다, 그때 사용될 근육 여기저기가 피부 밑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그러나전혀 나타날 기미가 없다. 물론, 그런 것이 출현할 턱이 없다. 만약정말 나타난다면, 전신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손가락 끝 하나옴짝달싹 못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잊으려 애쓰는 과거의수많은 사건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나의 의지에 반하여 저지른 일이다. 나쁜 것도 틀림없는 나자신이고, 나쁘지 않은 것 또한 나 자신이다. 양자는 서로에게 죄를전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일도 나를 감싸고 있는 어둠처럼무한한 것이 기분좋게 해결해줄 것이다. 그야 물론 먼먼 앞날의 일이겠지만,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열심히 싸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옷을 두툼하게 입고 숨가쁘게 산길을 오르내리며 땀을 흠뻑 흘리리라. 자신의 마음을 질책하고 싶을때는 육체를 질책하는 길이 최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그때 불현듯, 장지문에 밤의 빛이 비쳐 무슨 형상이 만들어지는듯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반쯤은 잠에 빠져 있다.

‘글은 곧 사람이다‘ 라는 명언이 지적하고 있듯, 문체에 변화를준다는 것은 성격을 바꾸는 것에 비견될 만큼 힘든 일일까. 아니면,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붓과 문체를 동일시하는 것이 잘못이고, 오히려 화가의 터치나 색의 특징과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무래도그쪽이 타당한 듯하다. 이렇게 간단한 해답을 그리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고 몇 년이나 갈팡질팡하였던 것은 아마도 내가 통신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문체 얘기로 돌아가자. ‘여름의 어쩌구 하는 제목의 소설(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여름의 흐름」ㅡ옮긴이)을 쓰기 시작했을무렵, 나에게는 빈틈없는 문체가 있었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새삼스럽게 문장력을 터득하기 위하여 공부해야 할 필요가 전혀없었다. 왜냐하면, 모르스 부호의 발신기나 텔렉스의 키를 두드리는것이 통신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일손이 모자라는 직장에 있었던 덕분에 글자수를 줄이기 위한 체크며, 암호문을 해독하고 짜맞추는 일도 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시와는 바람직한 상태에서 조우하지 못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시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쓰면 무슨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그리 대수롭지 않다. 딱히 시 자체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시의주변에 모여 있는 작자들이 남자 샹송 가수처럼 샘나는 패거리들이었다는 그런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나에게는더없이 그럴싸한 이유였다. 늘 그렇게 나는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는 식으로, 내가 손대도 되는 것과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시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소설은 지나치게 이완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영화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한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내 나름대로 시와 소설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여겼던 영화를 대신할 수 있으면서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끈질기게 살아가면서 몇 편의 소설을 쓰려고40 4하는 나한테는, 이제 시간이 조금만 경과되면, 혹은 다음 소설에 착수하면 죄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사건이고 마음의 동요라 해봐야탱크 로리가 폭발 사고를 일으켰을 때 받은 가벼운 충격 정도라고결론을 내리는 편이 상책일 것이다.

밤도 꽤 깊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그덕분에 상당히 흥분하였다. 어쩌자고 또 이렇게 흥분하고 말았는지.
불을 끄고, 빚은 지지 않는 건데 그랬다고 문득 후회를 하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흥분했나. 동업자가일으킨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떤 평론가가 말한미학의 귀결이란 해석에 마음 한구석이 공명한 것인가. 아니면 또,
자살 행위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감상적인 감정의 포로가 된 것인가. 아무튼 나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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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한 며칠 눌렀다가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횐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여편네와 아이들도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가을의 창가에 넘쳐 흐르는 하늘가을의 하늘로 피어오르는 안개그 사이로 기러기떼 흐르며우는 듯, 우는 듯, 흐느끼는 듯.
기러기발 사이로 활을 튕기며,
땅을 치며, 술대를 밀며,
소리 죽여, 죽여, 죽여넘치는 하늘, 피어오르는 강물부르는 소리.

그리고 또 다음다음 날인가빛 벌레들이희디흰 섬의 옷자락에내려앉던 그날그만 두 개의 섬도 차례로파도에 먹혀 버렸습니다.

사랑방 장지문을 여니 날 선 단도가 나는 듯이 발 앞에떨어집니다. 안방 보료 위엔 나리꽃 수천 송이가 허벅지를 내놓고 흐드러지게 옷습니다. 대청에서 둥그런 밧줄이 천천히 내 모가지를 겨냥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첫간 짚더미 속엔 쉰 마리 독사가 한 마리 개구리를 놓고독을 품고 있습니다. 목욕탕 가마인 물이 펄펄 끊고 놋대야에선 날 선 장도가 누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엌에선 복어알 댓 근과 독버섯을 섞어 버무린 국이 끓고 있습디다. 뒤뜰엔 쏟아질 듯, 쏟아질 듯 벌통들이 거꾸로 매달려 흔들립니다. 담장은 돌들을 잘 깎아 두 길씩 쌓고 문을 내지 않았답니다.

은지銀紙로 도배를 한 방에 우리 식구 넷이 둘러앉았습니다. 남편 왈, 복숭아 속 같지? 아내 왈, 박하 냄새가나는데? 어린 것들 왈, 환하니까 배가 더 고파, 거울 속같아서 창피해. 오늘 남편의 일당은 금붕어 네 마리, 개구리 세 마리, 민물 가재 한 마리. 남편 왈 거기에 아들 둘을보태, 아내 왈, 어제도 보태구선, 남편은 오늘의 일당을한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듭니다. 아내는 얼른 구겨진 은지 밑에 개구리 두 마리를 감습니다. 어린 것 왈, 금붕어목걸이보담 수제비 목걸이가 나올 거야.

바람은 한 겹 저고리를 벗고 머얼리 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나라의 창문이 열리고, 세 나라의 창문이열리고, 일곱 나라의 창문이 열리고, 열린 창문마다 물을버리던 늙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무너져내리던 스무 나라, 백 나라. 불쌍한 그 나라도 보았습니다. 파도가맨발을 비비며 뛰어다니던 그 나라의 모래밭도 보았습니다.
<바다야, 그대 가슴엔 바람만 가득.>

빈 방에 의자가 하나 의자는 쓰러져 침을 흘렸습니다.
먼지들이 조금씩 모여서 낮게낮게 이야기하는데 느닷없이 먼지 하나가 먼지 하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바람이수염을 흔들며 들어오자 먼지 열 개가 먼지 열 개의 뺨을쳤습니다. 그림자가 보이니? 먼지 하나가 제 몸을 갈라놓고 물어 보다가 슬쩍 뺨을 쳐 보았습니다. 먼지들은 온방을 낮게 더 낮게 헤매며 그림자가 보이니? 그림자가보이니? 빈 방에 의자가 하나. 의자는 문득 일어서서 창가로 갔습니다.

한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사람들이 돌아온다.
불개미 한 마리에 불개미 한 마리가 앉혀서사각사각 사람들이 돌아온다.
잠시 수그려 보면여기서 소리들은 잦아들고잦아드는 소리마다 은밀한 불꽃이 튀긴다.

우리들이 던지던 종이 조각도 고별 스물 두 개도. 차례로 고우고우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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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말합니다. 내가 배워야 할 사람인지, 가르쳐야 할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나서 누구에게 배워야 할 것인지를 파악하라고 말입니다.

일방적인 소통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이는 국가건, 사회건 그리고 가정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흐르는소통은 진보를 막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라는 구분부터 해체해야합니다. 위와 아래라는 건 상황에 따른 것이지, 나이나 지위에 의함이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도 가능하고 또 발전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묻고 싶습니다. 소통, 정말 잘되고 있습니까. 당신이 상사라면, 가장이라면, 나이가 많다면, 부하 직원, 가족, 나이가 어린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묵자의 이야기에 비추어 혹시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엎어져!‘ 하면 엎어지고 ‘자빠져!‘ 하면 자빠지며 평상시에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길 바랍니다. 왜냐고요? 그림자와 메아리에 기대할 건 없으니까요.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보통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정말인지 아닌지 망설이며,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가 아닙니다.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가 아닙니다"라는 말, 즉 ‘下士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穙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는 도에 대해 정진해야 함을 권고하는듯합니다. 바르게 살면 바보가 되는 세상, 법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 보는 세상…. 하지만 바른 것은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래야 좋은 세상이 될테니까요.

사랑이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건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고요. 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도란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서 적용하는 것이니까요. 사랑도 하고, 도도 깨우치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건1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는 것은 적당할 때 멈추는 것만 못합니다.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게 되면 오래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부귀와 명예는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합니다.
공을 세웠으면 물러나는 것, 그것이 하늘의 도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641오직 말뿐이 아닙니다. 일도 그러합니다. 일을 많이 벌이면 근심이많은 법이니까요.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이 없다‘라는 <도덕경》의화두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故君子居必擇鄕고군자거필택향
그러므로 군자는사는데 반드시 좋은 곳을 선택해야 한다

色從而後可與言道之致색종이후가여도지치
얼굴빛이 부드러운 뒤에야 비로소 도의 극치를 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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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남의 악함을 말하는 자를 미워한다.
둘째, 밑에서 윗사람을 훼방하는 자를 미워한다.
셋째, 용기만 있고 예의가 없는 자를 미워한다.
넷째, 융통성 없는 자를 미워한다

염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제가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가 답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너는지금 스스로 선을 긋고 있구나?

옳아야 당당할 수 있고, 당당해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공자가말하는 생각의 기술 아홉 가지를 모두 일상에 적용하는 게 힘들다면견득사의만 마음에 잘 담아 보세요. 군자와 같이 마음의 자유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며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거친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추천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
子曰(자왈) 我非生而知之者(아비생이지지자) 好古敏以求之者也(호고민이구지자야)

고전을 잘 읽으면 우리는 자기 삶의 역사를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효과를 누립니다. 《논어》와 같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인간의 삶은결국 똑같기에 앞서 고민한 고전에서 해답을 찾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 그 자체, 즉 일상의 본질에 집중하는 고전의 가치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 인(仁)을 좋아한다면서 호학(好學)하지 아니하면 어리석어지며, 지혜(知)를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은 허황되게 되며, 신의(信)를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아니하면 남을 해치게 됩니다. 정직(直)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아니하면 각박하게 되고, 용맹(勇)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아니하면 난폭할 뿐이며, 강함(剛)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아니하면 광기에 빠지게 됩니다.

공자가 옛것을 살피고 또 살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깨달은 것처럼 우리 역시 과거의 것을 잘 공부함으로써 필요하면 노래가사, 만화 대사 속에서도 삶의 이치를 찾아내면서 우리가 사는 이세상을 즐겁고 기쁘게 일궈 냈으면 합니다. 그것들이 과연 지금 이시대에 여전히 유용한지, 앞으로도 가치가 있는지는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검증하면 될 테니까요.

묵자가 말했습니다.
"힘든 일을 하는 사람만이 반드시 하고자 하는 바를 얻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하기 싫은 것을 면한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이롭게 한 후에다른 사람이 나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이롭게 함으로써나에게 보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효자가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기껏해야 자기 얼굴 모습이나 볼수 있으나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은 객관식이 아닙니다. 물론 내 앞에 놓인 인생이 평이한 객관식 수준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늘 주관식으로 다가옵니다. 몇 줄 안 되는 질문지에 답을 할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원한다면 갑작스러운 주관식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둑에 관한 격언 중 ‘작은 것을 버려야 시야가 넓어져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적 해석에 의하면 이때 ‘사(捨)‘는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온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가치를 버리고 큰 가치를 취하는 것, 이지중취대(利之中大)의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이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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