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모두와 함께 왁자지껄 소동을 피우다가도 어느 틈엔가 예의 범상치 않은 눈길로, 술에 만취되어 큰 소리로 꽥꽥거리는 선원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리고는 알게 모르게 차가운 방관자가 되려 노력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오래도록 짓무른 상처나 비극적인 냄새가 푹푹 풍기는 환경에처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뜻 같다. 과연 그럴까. 만약 정말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직업을 찾으러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도 몇 편의 소설을 쓰리라 자신감에 넘쳐 있는 나는 책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소설들이 분노에차 있고 고뇌하는 작가들의 작품보다 질이 떨어지리라는 생각도하지 않는다. 참으로 당당한 자신감이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서 소설을 쓰는 나는 내 쪽이 정상이라고 믿는다. 볼티지가 높아진 틈을 타 단숨에 매듭을 짓는 타입의 소설가든 파상공격 타입의 소설가든 한 작품이 끝나면 방대한 에너지를진지하게 소비하느라 무척 지쳐 있을 터이므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소설을 한 편 쓰고 나면 당장이라도 레이오프(layoff)를 취해야 하는데, 술 같은 것으로 간편하게 기분을 전환하고는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천재이든지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미 주인공을 나‘로 하든 ‘마루야마 겐지‘로 하든, 더 나아가소재를 자기 체험에서 얻었다고 주석을 달든 아무도 소설을 진실그 자체라고 믿지 않는다. 만약 믿는 자가 있다면 세상 물정 하나모르면서 문학에만 심취해 있는 소녀든지, 행복한 인생을 보내다 노망이 들었는데도 문학을 좋아하는 풍류객 정도일 것이다. 소설뿐만아니라 영화나 연극에도 사람들은 옛날처럼 심취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어떤 시골에서도 마쯔리 (일본 고유의 전통 축제 -옮긴이)에서본 유랑 극단 때문에 이틀, 사흘을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 작품에 몇 가지쯤 감동할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힘이 있다 해도, 모두 마음속으로는 ‘이건 진짜 같은거짓 이야기‘ 라고 생각할 것이다. 텔레비전이 방방곡곡으로 보급된탓인지 활자의 범람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눈은 기름이 올랐고 의심이 많아졌다.

그 조건이란 우선 ‘풍경‘의 유무이다. 내가 말하는 풍경이란 단순히 회화적인 광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몸담고있는 확고한 ‘장소‘ 이다. 또 그 장소란 실재하는 도시나 동네가 아니고, 줄거리와 직접 관계가 있든 없든 등장인물이 유형 무형의 영향을 받는 ‘공간‘이다. 일본 문학에서는 ‘공간‘이 별 대접을 못 받아왔다. 필연성이야 있든 말든,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토지라는 변변치 않은 변명을 하거나 말거나, ‘공간‘은 늘 거기에 무표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은 우연으로 바라던 바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는
‘공간‘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로케이션의 경우 있는 그대로의 공간이 감독의 이미지에 충실한 경우는 드물다. 전봇대 하나나 둘쯤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소설과 달라서 날씨나 지형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감독들은 ‘공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타협을강요당하는 것이다.

한 작품이 완성될 무렵, 나는 이렇게 천연덕스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이 작품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다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만원 전철 속에서나 독신자 기숙사에서나 전신실에서나 그 생각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복권을한꺼번에 천 장이나 산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처럼 신나는 일이 달리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그야말로살아 있는 동안 천국에 가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취하도록 술을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수많은 여자들과 친분을 맺고 싶다는생각도 없었지만, 성가신 일 없이 혼자 살아보고 싶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조직의 목적이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인 이상, 집단이란 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이상, 나는 그런 마찰을 추악한 현상으로 파악하여 실망하지않는다.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결함을 지니고 있는 나와는 다른사람들이 굳세게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오히려 바람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울기

나는 지금 자유롭다. 내 주변은 자유로 가득하다. 오로지 좋아하는 일에만 눈길을 돌릴 수 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접하면 당장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한 입장이다. 제어 장치가 극단적으로 적은 이 생활이,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인이 생활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나날을거듭할 뿐인 이 생활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그리고 그안에서 과연 어떤 소설이 태어날 것인지.

그건 그렇고, 귀찮은 일을 맡아 가장 힘들었던 대목은, 왜 좋은가, 왜 싫은가 그 이유를 기술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냥 좋다라든가그냥 싫다는 말뿐이라면 아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랬다. 나는 깜박 잊고 있었다. 그 일에 돈이 지불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함정에 걸려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두 가지 인생길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시도를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샐러리맨을계속하였다면 지금 어떤 사나이가 되어 있을까, 하고, 내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늠름함을 과연 나 자신한테서도 느낄 수 있을까. 현실사회에 무수히 존재하는 벽과 충돌하는 사이에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을까. 아니면 반대로 타협만 배워가지고 별볼일 없는 사나이로 전락해 있을까. 아니면 또 지금의 나와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있을까. 역시 어리석은 상상이다.

영화의 원작자란 입장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각오는 이미 되어있다고 나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두세 번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진짜 영상보다 강렬하고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해왔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설과 영화를 대결시켜보는 것은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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