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영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영이는 남편의 딸인데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 아이를 남편과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사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재영이가 아직도 남편과 한 달에 한 번쯤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남편은 내게 그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주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아다주었다. 짐보에게 그애 이야기를 몇 번인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매끈한 얼굴을 커터 칼로 그으면 어떤 느낌일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짐보는 나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기에 그에게는 마치 땅을 파서 비밀을 이야기하고 묻어버리는 것처럼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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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애인이었다. 준우는 받기 싫은 마음과 함께 전화가 끊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다.
대여섯 번의 신호 후에 급히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는 비가 내리는데, 당신은 좋아? 애인의 목소리는 방금 잠에서 깬 듯 나른했다.
저쪽에서는, 그랬어? 그랬어? 하며 아이를 달래는 듯한 홍의 목소리와 기사의 웃음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휴지를 버리고 싶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휴지통이 없었다. 손에 쥔 휴지는 점점 더 축축해졌다. 준우는 휴지통을 찾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른 마음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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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식사를 마친 후 하나가 더빙에 참여한 영화를 보았다. 007시리즈였는데, 하나가 맡은 건 주디 덴치가 연기한 M 역이었다.
솔직히 주디 덴치는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했거든. 근데 되게 잘 어울린다. 카리스마 있어, 지환은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지환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잘 안 늙거든. 제일 천천히 간대, 목소리가.
간다고? 슬프다.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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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언덕을 올라가면, 그러면 바로 병원이 나올 터였다. 병원에서, 진료소에서 일단 검사를 받고 나면 분명 괜찮아질 것이다. 은채는 들고 있던 고장난 우산을 바닥에 버렸다. 한영은 은채의 팔을 잡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은채도 한영을 따라 발을 떼었다.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컴컴해지고 비가 더욱 맹렬히 내렸다. 발등까지 고였던 물이 발목을 넘어섰다. 마치 세찬 폭포를 거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은채와 한영은 우산 하나를 나란히 받쳐 쓴 채 나아갔다. 언덕 위에 어렴풋이 불빛이 보였다.
둘은 계속해서 그 빛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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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던 디지털마케팅팀에 심상치않은 바람이 불었다. 15층으로 올라간 게 호재만은 아니었다. 타부서의 사람들과 임원들이 디지털마케팅팀을 두고 온갖 말로 찧고 쌓기 시작했다. 유연근무제를 빌미로 근태가 엉망진창이라는둥, 출장은 핑계고 법인 카드로 놀러 다닌다는 둥 모함과 헛소문이 돌았다. 한영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사실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임원 승진 기간이 되자. 마케팅 2부의 진연희 부장이 상무 자리를 두고 마케팅1부의 김무진 부장과 경합을 벌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둘은 공채 동기이며 수십 년 동안 나란히 승진가도를 달려왔다.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마케팅 본부에는 지나가는 새조차 숨죽일 만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다 곧 문제가 터졌다. 월요일, 주간 회의 직전에 진연희 부장이 은채와 한영을 급하게 호출했다. 둘은 12층의 마케팅2부 사무실로 내려갔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진연희는 책상 앞으로 다가온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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