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진짜 문제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구식 문제, 즉 믿음의 문제다. 나는 고만고만한 여러 신들이 내게 말을 걸거나 나 대신 끼어드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많은 신들의 존재를 (내 왼손새끼손가락이나 노트북컴퓨터의 존재를 믿듯이)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차가운 현실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이 신들을 마음으로 불러내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어쩌면 이건 내가 제이미를 비롯한 여러 마녀들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내 우울증이 더 깊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샤먼들에게 자연스럽게 ‘미쳤다는 꼬리표를 붙인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판단인가? 정신이 멀쩡한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였던 카를 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물리적 존재만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의 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꽝스러운 편견이다.
사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양식은 정신적인 것이다."

샤먼은 자연을 사랑한다. 성 프란체스코의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그들은 자연계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 가족으로 본다. 샤먼은 동물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우월한 지혜를 끌어다 쓰는 것을목표로 삼는다. 샤먼의 또 다른 특징은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사람들(나도?)이 "침묵의 명상으로는 몇 년이나 걸릴수도 있는 경험을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영적인 지름길을 약속해준다. 인류학자였다가 샤먼으로 변신한 마이클 하너의 말이다. 내게는 이 말이 한없이 매력적이다. 솔직히 지름길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샤먼들은 예전에 모든 인간이 갖고 있던 능력, 즉 동물의 영과 소통하는 능력에 자신이 다시 접촉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이나 원래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돌아다닐 수있는 동물,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늑대 같은 동물은 특별히 강력한존재로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샤먼은 늑대를 흉내 내거나 늑대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라 늑대 그 자체다.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소용없다고 우리는 자신이 타고난 신화에서 결코 완전히 도망치지 못하며,
도망쳐서도 안 된다고 어렸을 때 머릿속에 자리 잡은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어차피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신화를 유창한 웅변으로 해석해내야 한다....….
그 신화의 노래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곧유대교의 수많은 아이러니 중 하나는 휴식일 직전의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날이 잠잠해지기전의 폭풍 같다고나 할까. 트즈파트 시내도 활동적인 에너지로 터질듯하다. 눈보라가 몰려오기 전의 워싱턴 같다. 모두들 정해진 시간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압박을 느끼며 물건을 사 모은다. 트즈파트는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움직임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모두들 같은 곳으로 향한다. 아니, 같은 시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안식일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존재하니까. 나도 움직인다. 나는 가게들이 문을 닫기 직전에 팔라펠 하나와 야르덴 포도주 한 병을 산다. 가게 주인들, 낯선 사람들이 샤바트 샬롬, 즉즐거운 안식일이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좋다. 이 딱딱한 땅에서 맛보는 부드러움이다.

이제 나는 책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존중해주는 길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다. 그 기분이 그어느 때보다 더 심하다. 불교나 도교에서 실패를 맛보는 것과, 나자신의 신앙에서 실패를 맛보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특히 내가 지금 정직하게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긋지긋한 암호 때문이다! 아람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글. 게다가 이 글은 처음부터 일부러 속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마치 전화로 배배 꼬인 장난을 치는 것 같다. 내게 장난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미친놈으로 무시해버릴 수만 있다면야 아무상관이 없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인 건사실이다. 핵융합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처럼.

한편 나의 도쿄 경험에는 아직 속편이 없다. 나는 이미 속편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기대야말로 경험의 커다란 적이니까. 그래도 나는 계속 기다린다. 가끔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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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더 신경 쓰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적은 일에 깊이 신경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도 안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현명해지는 기술은 곧 무심히 넘겨야 할 것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에너지는 기쁨." 블레이크는 이렇게 썼다. 중국 시인이라면 절대그런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자명한 말이니까. 중국인들에게는 에너지가 곧 생명이다. 우리를 감싸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활기, 즐거운 에너지를 중국어로는 기라고 한다. 기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기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머리가 정신없이 빙빙 돌아가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보면그건 확실하다. 문제는 기의 흐름이다. 어쩌면 나의 기가 막혀 있는건지도 모른다. 내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만 간신히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내가느끼는 피로는, 힘든 하루 일을 마친 뒤 또는 10킬로미터를 달린 뒤에 느끼는 만족스러운 피로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제자리 뛰기만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을 때의 피로에 가깝다. 막힌 나의 기를 뚫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중국식 배관공이라고나 할까.

LU우한의 어둠이 물러나고 곧 탁 트인 고속도로가 나온다. 모두들지쳐서 의자에 늘어져 있다. 하지만 솔랄라가 내게 가만가만 다가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산에 도착하면 우리가 ‘척추 비틀기’를 할 것이라고 왠지 마음에 안 드는 소리다. 솔랄라는 또한 우리가 침을 많이 삼킬 것(도교에서는 침을 ‘하늘의 음료‘라고 부른다)이라는 말도 한다.
이건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솔랄라가 우리가 삼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침이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는 ‘앉아서 잊어버리기’라는 도교 명상수련법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 말은 마음에 든다. 사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이런 수련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때는 여기에 종교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솔랄라는 이번수련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한다. 좌망(坐忘)이라고 불리는 이 명상수련법은 세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고요하고 빈 공간"을 찾는 것이다.

‘난 해답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경험을 바랄 뿐이에요."
나는 미끄러운 두부와 씨름하면서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동양 종교와 유대교-그리스도교를 구분 짓는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믿음보다 경험을 강조하는 것. 도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것은 서구의, 특히 그리스도교의 버릇이다. 동양의 특징은 행동, 경험, 결과다.
결국 우리의 화제가 기에 이른다. 불가피한 결과다. 아직 야광 정자는 전혀 보이지 않고, 나는 도대체 기가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기는 에너지예요. 전기와 거의 비슷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아
"아침에 마시는 맛 좋은 커피 한 잔 같은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도를 찾아 나선 이후 샌디는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쳐냈다. 〈보그〉지 구독도 취소했다. 샌디 자신의 말처럼, 이제 어느 정도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제는허영을 부추기는 그런 것들에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다. 샌디가전과는 달리 마음을 쏟지 않게 된 일들은 그밖에도 많다.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 직장일 등등. 적어도 예전처럼 일에 집착하지는않는다. 전에는 근무평가를 잘 받는 것에 마치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굴었다.
대개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신경 쓰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적은 일에 깊이 신경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도 안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현명해지는 기술은 곧 무심히 넘겨야 할 것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샌디는 요즘 많은 것들을 무심히 넘겨버린다. 그 편이 결정을 내리는 데 더 편하다고 한다.

나는 《도덕경》을 휙 꺼내서 샌디가 좋아하는 61장을 읽는다. "여성은 양보하고 낮은 자리에 섬으로써 항상 남성을 정복할 수 있다."
노자의 말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구절도 전통적인 지혜를 거꾸로뒤집어놓는다. 대개 우리는 양보를 부정적인 것, 약하다는 표시로생각한다. 적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워라. 네가 원하는 것, 네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쟁취해라. 나는 이런 마음가짐에 대해 노자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샌디에게 묻는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않는 것이라고 하겠죠. 무위라고."
"그 방법이 효과가 있던가요?"
"네. 하지만 밀어붙여야 할 시점이 언제인지 알아야 해요. 철저히수동적인 자세만 취하라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언제 힘을 써야할지 그냥 알 수 있어요. 지금처럼요. 내가 일행과 떨어져 산에 올라가서 뭔가에 마음을 열고 나를 이끌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는 여기에 뭔가 유용한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얼마나 훌륭한 건지는 몰랐지만."
이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음식이 또 나온다. 물고기가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우리는 접시에 달려들어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마구 먹어치운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먹어본 적이 없다는말을 할 때만 잠시 멈췄을 뿐이다.

비행기에서 나는 샌디를 생각한다. 샌디는 자신의 신을 찾은 것같다. 비록 이름 없는 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샌디 자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뒤집어엎지도 않았고, 은자처럼 살지도 않고, 내가 아는 한 몸에 경전의 글귀를 문신으로 새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도교가 샌디에게 자양분을 제공해주고 있다. 나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방식으로, 샌디가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샌디가 인심 좋게 넘겨준, 겉에 사탕물을 바른 마카다미아가 담긴 커다란 통이 이별의 아픔을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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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에서 자연은 기교와 만난다.
뿌리를 풀어주는 것은 자연을 되돌려주지만,
나무를 가둬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자연을
다시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친구이자 동료인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지금 나무에서 특별히 나무에 속하지만 나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있네." 이 벨기에의 화가가 그 해답을 찾자마자 거대한 잎으로표현된 나무는 그가 평생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 주제를 처음으로 반복해서 다룬 연작은 ‘거인La Géante‘이었는데, 마그리트 특유의 솜털 같은 구름이 떠 있는 밝고 파란 하늘이 특징적이다. 나무의 몸통은 줄기가 되고 거대한 잎의 잎맥은 생기를 공급한다. 〈절대자를 찾아서〉에서 뼈대만 있는 나뭇잎 모양의 나무는 겨울의 여명을 증언한다. 묘한흰색 공조차 삭막함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참고로 이 작품은 1940년 말에 그려졌는데 그해 봄부터 벨기에 브뤼셀은 독일에 점령되었다.
마그리트는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자가 되기 전 몇 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의 직접적이고 포스터와 같은 양식은 익숙한 것을 전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뭇잎 모양의 나무는 나뭇잎과 나무의 본질이긴 하지만 둘 중 어느것도 아니면서 두 가지 모두이기도 하다. 마그리트가명료하게 표현한 대로 "초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데자뷔의 개념을 제거하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찾는 것이다."

애니 오벤든의 나무는 그녀가 나무에 일평생 기울인 애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콘월 지방의 오래된 숲을 거닐곤 하는데 정작 그녀의 눈이 머무는 곳은 다듬어진 풍경 속의 키 크고 나약한 나무들이다. 겨울의 화창한 빛은 그녀를 바깥으로 이끈다. 나뭇가지의 선명한 윤곽선은맑고 차가운 하늘과 대비되어 나그네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나 의식할 수 있는 겨울의 매력을 더해준다.
오벤든 작품의 제목은 간혹 원초적인 측면이 있지만 있는 그대로를설명한다. 〈염려 없게 거뒀네All is Safely Gathered In〉(2010)는 농장에 있는한 무리의 너도밤나무를 보여준다. 잎이 반쯤 남은 윗부분은 바람에 흔들리고, 쿠션처럼 생긴 관목들이 나무 밑동을 보호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구름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경작지 풍경의 지평선을 강조한다. 햇빛으로 불 밝힌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면 수풀이 될것인데, 너도밤나무는 부지런히 번식하는 암수꽃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벤든은 그림을 세세하게 계획하고 ‘터무니없이 작은 붓으로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한 그림을 그린다. 너도밤나무는 가장 늦게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라 봄에도 서둘러서 초록 잎을 보여주지 않는다. 창백하고 헐벗은 이 나무는 추운 날에는 끝이 붉게 타는 듯 보인다.

‘로런스의 앞마당에 있는 나무 아래, 테이블 위에 누워 바라본 나무’라고한 이 그림에 대한 오키프의 설명은 나름대로 간결하다. 이 나무는 ‘폰데rence.
‘로사 소나무‘로 불리는 거대한 소나무로서 소설가 D. H. 로런스D. H. Law-ce의 뉴멕시코 집 근처에 있었다. 로런스가 1920년대에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아 글을 쓰며 두 번의 여름을 보낸 곳이다. 그는 수관보다 월등하게 튼튼한 몸통을 지닌 나무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라고 설명했다(폰데로사 소나무는 30미터가 넘게 자란다). 로런스는 글을 쓰는 데 작업대를 사용했지만 오키프는 작업대에 기대 나무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고자 했다.
〈로런스 나무〉는 오키프가 1929년 처음으로 뉴멕시코를 방문했을때 그린 그림으로 당시 오키프는 이미 잘 알려진 화가였다. 그녀는 로런스와 그의 아내 프리다가 소유한 타오스 목장에서 2개월 이상을 머물렀지만, 로런스는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고 다음 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뉴멕시코의 공기를 사랑했고, 뉴욕으로부터 피신 온 오키프에게는이곳의 하늘이 활력소가 되었다. 이 그림에서 그녀는 나무의 주요 기관을통해 밤하늘을 관찰한다. 검은 나뭇잎의 구름 속 동맥처럼 생긴 나뭇가지들은 생명의 피를 뿜어 올린다. 오키프의 의도대로 ‘거꾸로 서 있는’ 나무 그림을 보면 누워서 위를 바라보는 느낌이 더욱 고조된다. 이러한 이유로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위치한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WadsworthAtheneum Museum of Art)에는 이 그림이 거꾸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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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우리에게 이로운 쪽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것을 은총이라고 부른다. 불교도들은 이것을 ‘본질‘이라고 부른다. 아니면 간단히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 불교가 의도적이지 않은 종교임을 나는 깨닫는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몇 시간 뒤면 나는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신발을 벗은 뒤, 흔히 비행기라고 불리는 금속 튜브 안에 내 몸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은,
부처가 몹시 직설적으로 말했듯이, "겨우 1분 동안 빌려 쓰는 물건과 같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순간의 달콤함이 줄어드는가?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를 마시며 결론을 내린다.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고. 확실히 늘어난다고.

하느님이 명하신 임무라. 우리는 처음부터 꼬일 운명이었던 브루클린 여행에서 이 농담을 줄곧 주고받는다. 교통 체증에 갇히거나 차를 꺾어 들어가야 하는 지점을 놓치거나 완전히 길을 잃어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될 때마다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명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니까. 이것이긴장감을 흩어버리는 데 대단히 효과를 발휘한다. 내 긴장감이다.
크리스핀 수도사의 긴장감이 아니다.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서 긴장감을 감지할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뉴욕의 교통 체증 속에서 어떻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다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죠?" 내가 묻는다.
"그냥 그리스도께 맡길 뿐입니다."
"하지만 누가 앞으로 끼어들기라도 하면요?"
"그러면 브레이크를 밟죠."
"좋아요, 그건 말이 되네요.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분노는어떻게 처리해요?"
저들이 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재빨리."
이 말을 하자마자 마치 신의 섭리가 작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 차 앞으로 끼어든다. 크리스핀 수도사가 경적 위로 무겁게 몸을 기댄다. 나는 빙긋 웃는다. 정결, 순명, 청빈의 서약에 경적을 울리지 않겠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다들 분출구는 필요하니까.

심리학자인 차나 울면이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기념비적인 연구가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울면은 개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경험임을 밝혀냈다. 개종자들은 새로운 교리보다는 오히려새로운 형태의 "정서적 안도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라엘교도들은 망상에 빠졌든 아니든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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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포플러 나무 그림은 앞서 그린 건초 더미와 마찬가지로 정지 상태의 대상이 비치는 빛의 변화와 그 인상을 기록한 작업 이력에서 핵심적인동기가 되었다. 물론 나무는 무생물이 아니다. 모네가 이 그림들을 그리는동안 가지는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이파리는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색이바뀐다. 그 어떤 것도 영구적이지 않다.
포플러 나무는 가구 제작을 위한 값나가는 목재로 만들기 위해 반듯하게 줄지어 재배되었다. 모네는 센 강 지류를 떠다니는 배를 작업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이 나무들이 이미 경매에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거래가 성사되었고 구매한 사람은 모네가 작업을 마치자마자 나무들을 베었다. 8개월이 넘는 동안 모네는 비와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나무의 인상을 담은 수십 점의 작품을 그렸다. 포플러 나무는 격자처럼 화폭을 채우면서 강의 굽이를 따라 서 있다. 어느 가을날 오후 나무의강렬한 색이 수면에 반사되었다. 모네는 보색의 물감을 맞붙여 짧은 붓질로 채색했고 나무들은 화면 위에서 빛으로 일렁였다.
주제가 있는 모네의 그림은 비평가와 대중 모두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네는 건초 더미와 포플러 나무를 그린 작품을 판매한 돈으로 지베르니의 오래된 사과주 짜는 집을 살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남은반평생을 보내며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는 작품들을 그렸다.

1930년대에 잡지 〈타임Time〉은 순수미술 중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복제되는 작품이 반 고흐와 폴 세잔Paul Cézanne 그리고 맥스필드 패리시의 그림이라고 발표했다. 이 무렵 미국의 삽화가 패리시는 유명세를 얻는 데큰 힘이 된 ‘바위 위의 소녀’ 이미지를 그만 그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그린어여쁜 소녀들을 맨해튼 길모퉁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가 그린 아름다운 풍경은 한층 활기가 넘쳤다. 그가 소녀를 나무와 맞바꿨을때에도 인기가 여전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언덕배기〉는 이 전환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특별히 포스터로 기획되었다. 화가가 구사하는 특유의 색조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의 영향을 받은 소녀들에서 초점을 옮겨 참나무를 ‘영웅’의 자리에 둔다. 패리시는 뉴햄프셔에 있는 자신의 집을 ‘참나무(The Oaks)’라고 이름 붙였는데잘 자란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았으며 남쪽으로 애스커트니산을 향한경치가 펼쳐진 이 집은 그의 변함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그의하얀 ‘참나무’는 암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잎이 짙어지고 낮게 드리워진 해가 풍경에 불을 밝히는 계절인 가을을 담은 작품에 반복해 등장한다.
패리시는 유리 슬라이드를 사용했고 슬라이드를 하드보드지에 투사했다.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된 나뭇잎과 나무껍질에 채색된 물감 층은 모두 광택제로 처리되어 뛰어난 반짝임을 보여준다.

극적으로 개무는 해가 생기를 불어넣는 클레어 캔식의 검푸른 숲 그림은감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적으로 사실적이다. 노퍽은 그녀가 평생 알고 지낸 풍경이지만 그림에 사용한 매체는 신선했다. 미술을 독학한 화가인 캔식이 유화 물감을 사용하는 모험을 한 것은 색채와 형태 그리고 유화 고유의 질감에 그녀가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물감의 조합은 매우 강렬한 색의 조합만큼이나 중요하다. 이것은 환영을 빚는 얼룩무늬 군복처럼 표면의 패턴을 통해 추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추상화가 아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존재한다. 높이 솟은 전나무의 시점은 화가에게 작품 속 상황을 알려준다. 앞을 향해다가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뒤에 숨은 이야기는 불가사의한 내용일 수도, 누군가가 다른 곳으로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고 있다는 평범한 내용일 수도 있다. 캔식은 그림을 그리는 전 과정에 걸쳐 초기 단계에 그린 드로잉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펼친다. 그녀는 최근 사건에서 비롯된 이미지도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연기가 타오르는 어두운 아마존 정글의 한부분을 그리기도 했다(108~109쪽).
또한 캔식은 나무파(Arborealist)로 알려진, 나무에 집중하는 미술가그룹의 일원이다. 이들은 20세기 초 런던에서 활동한 독립적인 미술 집단에서 일부 영향을 받았다.

화가이자 만화가인 조앤 다나트는 겨울날 작업실에서 나무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겨울나무〉는 상상력을 발휘해 제작했다. 이 작품은 감자를 파서 만든 판화 이래 가장 민주적인 판화 형식인 드라이 포인트 기법으로 제작된 동판화다. 필요한 것은 유리판 한 장이 전부다(또는 표면에 잉크를 바를수 있는 한 장의 판이면 족하다). 판면에 종이를 얹고 펜이나 연필로 선을 새긴다. 선을 새긴 부분에는 잉크가 고이면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섬세한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의 가치를 아는 누군가의 정원같은 인상을불러일으킨다.
다나트의 판화에는 나무를 응시하며 보낸 90년 세월이 담겨 있다.
녹음이 우거진 런던에서 나고 자란 다나트에게 결코 소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도시에서는 나뭇가지보다 높은 곳에서 생활하거나 일하는 것이 선호되는데, 그녀는 런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무를 내다볼수 있었다. 1950년대에 광고회사인 J. 월터 톰슨J. Walter Thompson에서 미술품 구매 담당자로 있는 동안 다나트는 버클리 스퀘어에서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보이는 높이의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빅터 파스모어VictorPasmore나 앤터니 암스트롱존스Antony Armstrong-Jones 같은 전도유망한젊은 미술가들이 다나트에게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줬다. 다나트는피츠로이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강둑 위, 지금의 캐논베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정원 담장 안에는 철학자이자 정원사였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심은 엘리자베스 뽕나무가 서 있다.

르네 마그리트는 친구이자 동료인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지금 나무에서 특별히 나무에 속하지만 나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있네." 이 벨기에의 화가가 그 해답을 찾자마자 거대한 잎으로표현된 나무는 그가 평생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 주제를 처음으로 반복해서 다룬 연작은 ‘거인La Géante‘이었는데, 마그리트 특유의 솜털 같은 구름이 떠 있는 밝고 파란 하늘이 특징적이다. 나무의 몸통은 줄기가 되고 거대한 잎의 잎맥은 생기를 공급한다. 〈절대자를 찾아서〉에서 뼈대만 있는 나뭇잎 모양의 나무는 겨울의 여명을 증언한다. 묘한흰색 공조차 삭막함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참고로 이 작품은 1940년 말에 그려졌는데 그해 봄부터 벨기에 브뤼셀은 독일에 점령되었다.
마그리트는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자가 되기 전 몇 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의 직접적이고 포스터와 같은 양식은 익숙한 것을 전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뭇잎 모양의 나무는 나뭇잎과 나무의 본질이긴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면서 두 가지 모두이기도 하다. 마그리트가명료하게 표현한 대로 "초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데자뷔의 개념을 제거하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찾는 것이다."

애니 오벤든의 나무는 그녀가 나무에 일평생 기울인 애정을 드러낸다. 그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콘월 지방의 오래된 숲을 거닐곤 하는데 정작 그녀의 눈이 머무는 곳은 다듬어진 풍경 속의 키 크고 나약한 나무들이다. 겨울의 화창한 빛은 그녀를 바깥으로 이끈다. 나뭇가지의 선명한 윤곽선은맑고 차가운 하늘과 대비되어 나그네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나 의식할 수 있는 겨울의 매력을 더해준다.
오벤든 작품의 제목은 간혹 원초적인 측면이 있지만 있는 그대로를설명한다. 〈염려 없게 거뒀네All is Safely Gathered In>(2010)는 농장에 있는한 무리의 너도밤나무를 보여준다. 잎이 반쯤 남은 윗부분은 바람에 흔들리고, 쿠션처럼 생긴 관목들이 나무 밑동을 보호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구름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경작지 풍경의 지평선을 강조한다. 햇빛으로 불 밝힌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면 수풀이 될것인데, 너도밤나무는 부지런히 번식하는 암수꽃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벤든은 그림을 세세하게 계획하고 ‘터무니없이 작은 붓으로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한 그림을 그린다. 너도밤나무는 가장 늦게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라 봄에도 서둘러서 초록 잎을 보여주지 않는다. 창백하고 헐벗은 이 나무는 추운 날에는 끝이 붉게 타는 듯 보인다.

초상화가로 유명한 존 싱어 사전트에게 ‘올리브 나무 화가‘라는 별칭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색의 크기와 모양을 한 그의 올리브 나무들은 첼시에 있던 작업실 바깥 세상에 대한 사전트의 호기심을 드러낸다. 1905년, 세계주의 사상가였던 이 화가는 상점을 닫고 ‘얼굴’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상류층 사람들의 얼굴로부터 말이다. 그는 바로 매 여름을 알프스에서, 가을은 남부 유럽에서 몇 달씩 보내며 가족, 친구들과 함께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여행을 했다.
사전트는 1909년에 그리스의 섬 코르푸에서 알찬 6주를 보냈다. 이젤이나 책에 그려진 그림 속 유유자적 거니는 염소들은 그가 자신의 여행동반자들에게 선사했던 평온함을 보여준다. 사진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의 크롭(사진이나 그림의 일부를 잘라내는) 방식은 다음해 그려진 〈올리브 나무金The Olive Grove〉에 등장하는 마을 노동자들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그가 왕립아카데미를 위해 <알바니아의 올리브 따는 사람들Albanian Olive Pickers)을 제작하던 중 유화 물감으로 스케치한 것이다. 염소치기부터 평범한 동네 사람들, 그리고 민속의상을 입은 일용직 노동자들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사전트는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인류에대한 낭만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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