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도 우리에게 이로운 쪽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것을 은총이라고 부른다. 불교도들은 이것을 ‘본질‘이라고 부른다. 아니면 간단히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 불교가 의도적이지 않은 종교임을 나는 깨닫는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몇 시간 뒤면 나는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신발을 벗은 뒤, 흔히 비행기라고 불리는 금속 튜브 안에 내 몸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은,
부처가 몹시 직설적으로 말했듯이, "겨우 1분 동안 빌려 쓰는 물건과 같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순간의 달콤함이 줄어드는가?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를 마시며 결론을 내린다.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고. 확실히 늘어난다고.

하느님이 명하신 임무라. 우리는 처음부터 꼬일 운명이었던 브루클린 여행에서 이 농담을 줄곧 주고받는다. 교통 체증에 갇히거나 차를 꺾어 들어가야 하는 지점을 놓치거나 완전히 길을 잃어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될 때마다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명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니까. 이것이긴장감을 흩어버리는 데 대단히 효과를 발휘한다. 내 긴장감이다.
크리스핀 수도사의 긴장감이 아니다.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서 긴장감을 감지할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뉴욕의 교통 체증 속에서 어떻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다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죠?" 내가 묻는다.
"그냥 그리스도께 맡길 뿐입니다."
"하지만 누가 앞으로 끼어들기라도 하면요?"
"그러면 브레이크를 밟죠."
"좋아요, 그건 말이 되네요.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분노는어떻게 처리해요?"
저들이 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재빨리."
이 말을 하자마자 마치 신의 섭리가 작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 차 앞으로 끼어든다. 크리스핀 수도사가 경적 위로 무겁게 몸을 기댄다. 나는 빙긋 웃는다. 정결, 순명, 청빈의 서약에 경적을 울리지 않겠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다들 분출구는 필요하니까.

심리학자인 차나 울면이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기념비적인 연구가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울면은 개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경험임을 밝혀냈다. 개종자들은 새로운 교리보다는 오히려새로운 형태의 "정서적 안도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라엘교도들은 망상에 빠졌든 아니든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