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학자 그레고리 차이틴은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이터들 사이에 내적인 연관관계가 있는지 확인하는 시금석 따위는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이틴에 따르면 임의의 숫자들이든, 하마터면 치명적이었을 뻔한 사고든 간에 어떤 사건의 고리들이 정말우연히 맞물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우연은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그냥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더 깊은 원인을 찾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규칙은 그것이 어떤 일을 더 간단한 분모로 통합할 수 있을 때,
전체의 이야기를 더 적은 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성립된다.
그렇지 않고 규칙이 너무 복잡하면 일은 미궁 속에 빠진다. 그럴 때는 규칙을 가늠할 수 없고 그 일을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리하여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너무 복잡한 규칙은 규칙이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페르마와 밀라노 출신의 의사 지롤라모카르다노 같은 선구자들은 실러의 표현처럼 "우연이라는 무시무시한 현상 속의 친숙한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카르다노는 "나는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적지 않은 위안을 얻었다"라고 고백했다.

우연의 효과는 돌로 언덕을 쌓는 경우와 비슷하다. 돌덩이 몇 개만 쌓아서는 그럴듯한 형태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돌을 많이 모아놓으면 가까이에서 보면 여전히 표면이 삐죽삐죽하고 구멍이 뻥뻥뚫려 있다 해도 멀리서 보면 그런 울퉁불퉁한 것들이 보이지 않고제법 매끈한 언덕이 생겨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개별적인 우연들도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 즉 수많은 동종의 사건들을 관찰하면조화로운 전체로 어우러진다.

그럼에도 이런 연속적인 비극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하지만만약 이런 이상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일이기때문이다. 미국의 수학자 존 앨런은 말했다.
"가장 놀라운 우연은 우연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파머의 승리는 300년 전 인간 인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물리학의 승리였다. 정원에서 사과가 머리에 떨어졌을 때 농부의 아들아이작 뉴턴은 하늘과 땅에 똑같은 자연 법칙이 통용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다면 천체를 운행하는 힘과 사과를 떨어뜨리는 힘은(룰렛 회전판 위에서 구슬을 회전시키는 힘도 같을 거라고,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역학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해와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우연한 일이 아닐 거라고 말이다.

"모든 데이터를 분석할 만큼 포괄적이고 완벽한 지성은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완벽한 지성의 눈에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없으며 미래는 과거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런 완벽한 지성의 희미한 그림자다."

그러므로 어떤 시스템이 법칙을 따르고 우리가 그 법칙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그 시스템의 행동을 아무 때나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리 예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기때문이다. 지식이 언제나 인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뉴턴이후의 낙천적인 지식인들에게 이런 통찰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모든 일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카오스적인 시스템에서도 이런 현상이 잦다. 룰렛 구슬이 튀거나 당구공이 부딪힐 때 초기의 불확실성은 지수적인 원칙에 의거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현자의 체스판에서 쌀알이 점점 빨리 불어나듯이 부정확성도 매초 배가적으로 증가한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물리학에서보다 더 많은 영향이 작용한다.
더 먼 미래일수록 더 많은 우연에 대비해야 한다. 하늘을 쳐다보면다음 몇 시간 동안의 날씨가 어떨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사에 대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 지 수백 년이지난 후에도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시간에 ‘공간의 네 번째 차원‘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던 아인슈타인은 바로 그런 생각이었던 듯하다. 죽기 한 달 전인 1955년 3월,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상을 당했고 그 친구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애도의 편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오랜 환상일 뿐"이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의 사고 자체는 무리가 없지만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느낌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맨 아래 놓인 편지를 꺼내면 그것은 아마도 Z로 시작하는 차카리아스의 편지가 아니라 다른 편지일 것이다.
이제 편지의 배열은 우리 눈에 완전히 우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 지식의 제한성일 뿐, 더 높은 지능은 아마도 순서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단열통의 편지라면인간의 뇌로도 파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인식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우연을 보는 것이다.

볼츠만은 당시 모든 전문가가 알고 있던 룰렛 게임에서의 우연의 법칙이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룰렛 게임에서우리는 구슬이 언제 빨간색, 검은색에 떨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게임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빨간색과 검은색에 떨어지는 비율이상당히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룰렛 게임에 대해 일반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 카지노에서 하루 저녁 내내 빨간 숫자만 나오는 경우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극히 드물다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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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신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신의 가명이다."

그림 형제는 자신들이 편찬한 사전에서 "우연은 뜻밖에 다가오는 일들이다"라고 간결하게 정의하고는 "이성이나 의도를 벗어나는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우연이라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런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아무런 규칙을 인식할 수 없거나,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날 악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어요. ‘어제 친구랑 카우핑거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우리는 마침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해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러자 악장이 물었어요.
‘그래서요? 그가 말이라도 걸던가요?‘ ‘아뇨. 그는 그냥 우리를 지나쳐서 가버렸어요.‘ 그러자 악장은 시큰둥하게 말했어요. ‘카우핑거 거리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야. 그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하도 많아 몇 발짝 못 가 자전거탄 사람과 계속 마주칠 지경이니까.‘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막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지나가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매우 이성적인 사람조차 이런 질문 앞에서는 양다리를 걸친다.
노벨상을 받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도 그랬다. 닐스 보어는 엄격한 법칙을 추구하던 자연과학에 우연의 중요성을 도입한 현대 원자물리학의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별장 현관 위에 행운의 상징인 말편자를 걸어놓고 살았다. 그리고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정말로 말편자가 액운을 막고 행운을 가져 온다고 믿느냐고 물으면 그는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준다오."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는 사람은 원인과 결과의 끝없는 행렬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얼마나자세히 알든 상관없이 그 남자가 왜 하필이면 그 지점에서 사고를당해야 했으며, 다행히 그 불행이 가벼운 부상으로 그쳤는지에 대한필연성을 찾아낼 수 없다. 만약에 그가 도중에 직원을 만나 수다를것이라는 사실과 이날 공사장 인부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일을 할것이며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행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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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덫이 무엇인지를 안다. 미끼가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실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참담한 결과를 잘 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반드시) 무기력에 빠뜨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세상 물정에 밝고 지적으로 뛰어나, 이 세계를 덫을 놓는 자와 덫에 걸리는 자의 완전히 정지한 대립 상황으로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명석한 인식에는티끌만큼도 우스운 요소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명석함이 사람을 우스운 상황에서 영원히 구원해줄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물정에 밝아 위험을 다 알아서 겁을 먹고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그 위험의 매혹은 그의 최대의 신중함을 무너뜨릴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꾸어진 위험은 점점 비대해진다. 그가 소유했다고 일단은 믿은 미래를 송두리째 뽑는듯한, 그의 존재의 본질 전체에 대한 부정 위에 성립하는 듯한 그 위험은 그의 ‘미래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만 작용할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의 최대의 유용성일 것이다. 그를다시 ‘미래를 갖지 않은 존재‘로 환원시킬 그런 위험. 즉, 늙은 여우를 매혹하는 최대의 위험이란 바로 ‘청춘‘일 것이다.

소설 습작을 하고, 친구와 문학에 대해 긴 편지를 주고받고,
만나면 문학 이야기만 하고, 문학서만 읽으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다이쇼시대의 문학청년의 표현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문학을 하며 산다‘라니! 그 풍부한 교양주의적 자기 형성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활감. 그만큼 당시의 나와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원고용지에 글을 쓰는 것은, 시대에 저항해 자신이 일종의 추상적 인간,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한 닌자 훈련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시대적 정신의 은둔처, 갈 길이 먼 인생의 은둔처…, 더구나 거기에는 아무런 영웅적 요소는 없었고, 시대의 비적격자인 나를 시인하기 위한 최후의 은둔처로서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 쳐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고백하기에는 가장 불편한 장르이고, 이
‘가짜의 기록‘인 장르에는 고백의 신빙성을 보증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고백과 소설을 연결 지은 낭만파의 편견은 인종적 편견과 엇비슷한 불명예스럽고 어리석은 생각이며, 문학은 시, 희곡, 소설 순으로 고백에 부적합하다.

이십몇 년 전에 학교 선배가 말했던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말은 지금 내게 점점 가슴속을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다가온다. 과거의 작품은 이른바 모두 배설물이고,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해 희희낙락하며 떠드는 작가는자신의 배설물을 주무르며 좋아하는 광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어쨌든 문학을 하며 사는 것은 지성과 육체에 대한 양면작전이었다. 문학 덕분에 나는 모든 학구적 지성을 경멸할수 있었고, 육체의 덧없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만은 문학은 정신에 (엄밀히 나 한 사람만의 정신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심지어 나는 남에게즐거움을 주는 거리공연자들의 기술조차 얼마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학의 본질은 요약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그 정도로 간단하다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가능한 한 요약 불가능한 요소를 더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는 이 요약 불가능성의 근거를 ‘개성‘에서찾고, 결국 낭만적인 개성의 자동기술법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끝으로 모든 것이 이상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진정한 낙천주의다. 어떤 희망적인 관측과도 상관없는 낙천주의다. 나는내가 숲속의 대장장이처럼, 계속 낙천적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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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완전히 상징화되어 작품의 질량을 재는 추상적인단위가 된다면 그것은 그 소설을 시간과 비슷한 구조로 이끌게 된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간 예술로서 거기에는 회꼭 같은 대사도 틀리지 않고 그저 냉엄한 시곗바늘 소리만들린다.

삶의 끝에,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문학이 있다. 그것을 순수한 문학이라고 나는 부르겠다. 백조는 최후의 한마디를 아름답게 노래하기 위해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산다고 한다. 작가는 임종의 순간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침묵을 맛보기 위해서 평생을 계속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한다. 백조의 평생의 침묵과 작가의 평생의요설, 그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장편소설은 하나의 순수를 얻기 위해 천의 순수함을 희생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에서 연기하는것이다. 극히 짧은 소설은 그 지독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농간이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밖에서 이루어지는지의 차이에 불과하다. 가공할 마키아벨리즘은 어쨌든 완전히 수행되어야 한다. 이 농간의 질량이 없는 작품은 현대에 살아갈 수 없다. 한 편의 뛰어난 장편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손바닥 소설은 무의미하다. 한 편의 뛰어난 손바닥 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장편소설은 무의미하다. 장편소설은 육지로 옮겨진빙산의 전체 모습이다.

‘극히 짧은 소설‘을 쓰면서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설을 쓰면서 그는 현대에서 순수함과 투명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그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을 말살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었는지를 알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쩌면 현대에서의 시라는 것의 존재방식, 시의 비정상적인 어려움이 이해될지도 모르기에.

다.
따라서 내 소설은 소송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암시를 내포하고 매우 완만히 시작해 처음에는 진척이 느리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도록 해 두고, 서서히 크레센도가 되어,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정석을 밟고 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예술의 기본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형태를 무너뜨리기는 싫다.

일본인 중에는 체력 문제도 있어서 이런 초인적 괴물이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일반인을 백이라고 하면 고작 백이십 정도가 초인의 한도이고, 그 백이십의배분을 통해 각각의 재능이 정해지는 셈인데, 법대 출신 소설가는 어설프게 법학을 공부하는 바람에 그중 칠십 퍼센트정도를 지성에 빼앗겨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일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불리하고, 얼마나 사람의동정심을 끌지 못하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을 원망해야 할지 법대 출신인 것을 원망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추상성, 다소 나의 독단에 따르면 시대라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를 이 추상성을 기초로 하여 순수소설을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 순수소설을 주장하며 시대와 결별해야 했던 것과 달리, 문학 그리고 소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시대의 완전한 투영, 시대의 가장 정확한 투영이라는 주장을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독단으로 가득찬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바라지않는 날이 없다. 바라건대 한 마리의 불길한 검은 나비여, 이제부터 나의 작품 위로 끊임없이 그 정처 없는 비상의 그림자를 드리워주려무나.

내 문체에 대한 글은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는 상황이 된 것은 아마 내가 남의 작품을왈가왈부하면서 문체, 문체 하며 앵무새처럼 떠든 대가일 것이다.

"말을 마친 소년은 다시 오열했다. 떨리는 목덜미는 꽃이핀 억새처럼 나긋나긋하고, 어깨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떨렸다. 저절로 흘러내려 마치 얼굴의 반에 고운 버드나무 같은그늘을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선사는 무심코 손을 대고 그것을 살짝 치워 보았다. 사원에는 중후한 만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밀한 밤이 빛나며 내려앉았다. 번을 서는 스님이 통로에서 통로로 불을 켜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시간의 경과라는 건 무섭다. 나는 괜히 현재의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손이 오그라들지만, 과거의 ‘우리‘는 아름다웠던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청춘‘의 동의어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청춘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우리‘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예술가가 미래를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사람들의 빛나는 실용적인 미래상을 미리 주도면밀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모독하는것이 아니라, 심지어 완전한 계획과 기획에 기반하여 이성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미래를 먼저 차지하고, 모독하고 점유하는 것. ・・・단 문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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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랜 세월 이런 유의 심사에 관여하면서, 단 한 번,
육필원고로 읽고 전율을 경험한 건, 후카자와 시치의 나라야마 부시코考」를 접했을 때이다. 오코론신인상은 400자 원고지 백 장 이상의 중편을 육필원고로 열편 이상 읽어야 하니, 결코 편한 심사는 아니다. 몇 개의 후보작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후에, 잊히지도 않는 어느 깊은 밤 고타쓰에 발을 집어넣고,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손글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느슨해서, 깔보며 읽고 있었는데, 다섯 장을 읽고 열 장을 읽는 동안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클라이맥스까지 쉬지 않고 다 읽고, 반박의 여지 없는걸작을 발견했다는 감동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 자체를 유년기라 생각하고, 다시 성인이 될때의 가열한 성인식을 드라마로 구성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전부 다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절대자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 지적인 구축성 뛰어난 SF에서 독자는 한순간 엄청난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너무나 불쾌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신자가 이 소설을 읽은 때의 불쾌감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이 상쾌한 불쾌감은 작품의 완성도에 만족하느냐 아니냐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 이게 무슨 불쾌감인가를 설명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 지금부터가 아마 남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나의 음울한 독백이다.

부유하던 것이 확정되어 하나의 작품 속에 봉인되는 순간에 겪는 일종의 아픈 경험에 관해서 작가는 아무리 요란을떨어도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한 권이 남아 있다. 마지막 권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이 끝나면‘이라는 말은 지금 내게 최대의 금기어다.
이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를 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세계를 상상하기 싫기도 하고 두렵다. 거기서 결정적으로 이 부유하는 두 현실이 결별하고 한쪽이 폐기되고 한쪽이 작품 속으로 감금된다면, 나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일하게 남겨진 자유는 그 작품의 ‘작가‘라 불리는 일일까. 마치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 어쩔 수없이 그의 자식의 대부가 되듯이

사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노리는 효과도 이런 것이다. 효과 그 자체에 그런 범죄적 의도가 있더라도, 소설은 근대사회 특유의 관대함 덕에 좀처럼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유유히 법률이나 사회도덕을 무시한 윤리적 긴장감을 줄 수 있고, 말하자면 법률상의 ‘확신범‘의 체계를 미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범인은 현실의 법률에 굴복할수밖에 없지만, 소설은 만일 성공하면 그 소설을 재판할 자로 신밖에 없는 곳까지 자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소설가는 문체로써 세상과 대결하므로, 저절로 그가 평생쓰는 소설의 주제는 모두 문체의 문제에 포함되는 셈이다.
독자는 테마소설이라 불리는 주제를 노출한 소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체의 중심이 골격이라고는 해도, 엑스레이로 찍은 미인의 해골은 미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문학과 파생 장르인 사소설의 피해를 받은건작가 본인보다 오히려 소설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소설은정당한 독자를 잃은 것이다. 즉 독자는 소설을 소설로 읽는습관을 잃은 것이다.

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우선 첫째로 대단히 곤혹스럽다. 속수무책일 정도로 곤혹스럽다. 내가 일본에서 도쿄의 한구석에서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소설은 이불가능한 일과 얼마간의 타협을 하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도 한 명의 부도덕한 인간일 것이다.

사실 쓰기 시작하자마자, 유쾌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 줄 한 줄이 벽이 되고, 조각끌에 반항하는 대리석이 된다. 이 작업이 일상의 훈련이다. 독일어의 이른바 일상의 일ugenerk 인 것이다. 군인에게 훈련이 실전이며, 실전이 동시에 훈련이듯이, 실전 경험 없이 훈련만으로 좋은 군인이만들어질 리가 없고, 소설을 쓰지 않고 소묘만으로 소설가가될 리가 없다. 하나의 새로운 소설의 제작은 하나의 새로운훈련의 장이다.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재료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 다만 어느 시점의 나의 내적 욕구에 딱 맞는 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소설가는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는 사람 같은 존재다. 어느 때 길 위의 맥주병 조각이 회중전등의빛을 받아 강하게 빛난다. 그 순간 나는 재료와 함께 주제를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글자를 통해, 그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내 안에되살려주고, 지금 나는 다시 그 풍경을 마주하며 거기서부터뭔가 어떤 ‘구체적인 것‘을 수확한다. 그것이 땅 밑을 흐르며감시하고 있는 까다로운 ‘주제‘를 만족시킬 때에 소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호흡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수십번, 수백 번이고 죽음에서 되살아나면서 한줄기 길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근대소설이 다다른 궁극의 기술적 시도가 근대소설의 근본적인 결함의 보완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조이스는 여기에서 다시 기술적 예술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인 결합의 보완 없이는 소설의 기술은 기술로서의 안정을 얻지못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에 머물러 금세 내팽개쳐질 수밖에없고, 다시 소설은 기술을 경시하면서 기술에 추적을 받으며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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