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상처의 실개천엔 저녁해가 빠지고 바람같이 장난같이시시덕거리며 세월도 빠졌습니다산들은 활처럼 둥글게 사라져버리고 이 실개천 꽃다주름이 어둠을 다림질하며 저만치 저만치 가버릴 때 바닥에서 스며드는 먹물, 저녁해는 물에 빠져나오지 않고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이쁜 당신.………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린 푸른 가시들은 햇빛으로 나를 향해 저의 침을 겨누고 있었지요 나는 일종의 포획된 짐승 같은 거였는데 그러니까 저 수성의 내가 느끼는 건 뭐였겠습니까 나는 저 여린 가시들 속에 그러나 혼곤해 있었는데 가시들이 몸을 뚫고 들어와 나는 꿈틀거리며 가시를 바투어내느라 팥죽같이 끓어올랐는데요 그러나 그렇게 약든 마음은 푸른 여린 가시만이 보였을 터지요 일종의 포획된 짐승이었던 나는 실히 기린이나 한마리 되어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금은 잣이나쏟아내는 거였는데……..

럭키슈퍼마켓 저 적벽에 붙은 한 구멍가게에서 술병가쟁이를 닦아 한잔 한다 늙은 여자가 속옷바람으로 나와 저녁 밤, 찬 찌꺼기를 찌뜨리고 간다한 시절 갈아입지 못한 속옷에서 나는 냄새여

애처로움이여
버스에서 내려 나는 홍제암 그이는 부산다방 이같이
어딘가를 찾아가는 의욕도 필경은 쓸쓸하게 되고 말겠지만
마지막 의욕조차도!

갈꽃이 한 시야를 메우고 저 창창한 여름이 몸을 건너올 때 마음의 꿈, 마음의 집, 나는 서울의 한 횡단보도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어질 때마다 김사인의 매를 생각했다. 이 화상아 정을 주었다 하면 어째 그러나 혈친 같은정을 꾸벅이면서 주고는 어깨를 경사지게 하고는 물 건너듯 무심하게 가버리느냐

뽀얀 물안개가 꼼짝도 않고 그러나 움직임의 경계를지우며 우리가 내버리고 온 다른 등성이를 감싸고 있었는데 다만 연보라의 안개 저쪽에는 어떤 우중인지 그리고 우중 아니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의내여 바람이여 아버지와 나는인간의 육으로 들어가 즙액의 탕을 만들어내는 곤죽의땀과 그러나 말라 비틀어진 마음의 한켠이 기울어져 이대도록 멀고 긴 길을 나섰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저 아른거리는 물안개 저편저편이래봤자 손으로 젖히면 열릴 거였지만 그러나 손을 내밀기는 천근처럼 무거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성큼성큼 물안개를 건너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았고 망연히 쳐다보는 나는

201애처로운 저 개를 데리고 한때의 저녁 속으로 당신을남겨두고 그대, 내 늙음 속으로 슬픈 악수를 청하던 그때를 남겨두고 사라지려 합니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슬금슬금 산책이 오래 아프게 할 이 저녁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 살릴 때까지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오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무수한 생이 끝나고 또 시작하는 옛사랑 자취 끊긴 길그 길이 모오든 시작을 주관하고 마침내 마감마저 사해주는 것을

빈 마을인데 텅 빈 마을 들창 놓듯 빈집인데 웬 술 익는 내가 진동하나 했더니 사람은 없고 누렁개가 새끼를낳았구나 아직 어미배가 익숙한 놈들 서로 혀를 내밀고배내피를 핥아내고 있구나 그 핏내가 술 익는 내였구나눈님이 저리도 장할시고 눈님도 저놈들 해털 사이를진저리치며 반짝이는 얼굴을 부벼대고 있더이 이 마을눈이 익을 곳 저 생명 눈부심 손가락 잘리듯 빨갛게 익어가는구나이 치운 날 조선 산천에 햇것들이 몇 개 더 보태져

저문 산길 채이는 밤서리 밟으며
저자 천덕꾸러기 재실이가 내 탯줄을 묻었는데요.
내 탯줄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여도가 꽃종이 접던 도갓꾼 오줌 기운에

육지의 불빛이 꺼져가는 아궁이 쑥냄새 같은 저녁이었고 모래 구멍엔 낙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수만의 다리로 머리를 감추고 또한 머리와 다리가 무슨 양성兩性처럼엉기면서 먼 저녁의 구멍을 지탱하고 있었는데요 그 구멍마다 저 또한 어둠이겠지만 엉겨붙어 살아 남는 것들이여 멀리 무덤 같은 인가에도 엉겨붙는 저녁과 밤과 새벽이 있을 거구요 이리 어둑하게 서 있는 나는 저 미역저 파래 저 엉겨붙는 그리움으로 육지를 내치고 싶었습니다 진저리치는 저 파도 저 바위 저 굴딱지처럼 엉겨붙어 엉겨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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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함께 일어날 일이다
매일 낮 함께 하늘을 우러르고
매일 저녁 함께 어두워질 일이다

폭풍처럼 폭우처럼 폭설처럼
쓰나미처럼 화산처럼 지진처럼 눈사태처럼
정전처럼 감전처럼 단전처럼 누전처럼
신종플루처럼 광우병처럼 조류독감처럼 구제역처럼
전파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었다
한때 다들 그 섬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섬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이 다른 것이 들어섰다
사람과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었다
아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스마트폰이 있지 않았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아니
스마트폰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다시

수덕사로 글 쓰러 간 친구 연락 없다
속리산에서 소 키운다는 후배
강화도에서 자연농법 하신다는 선생님
히말라야 하이웨이에서 엽서를 띄운 옛 애인
다들 본지 오래
눈꺼풀 들어올리는 일도
다 중력을 이기는 일내가 저 검은바위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것도
인력에 지지 않는 것

그해 여름
폭염주의보가 경보로 바뀐 날
양짓말 늙은 삼촌은
비닐하우스에서 나오자마자
제초제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벌
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우리 생의 뿌리는 미래에 있다.
저 칙칙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렇다면 미래에서 돌아보자
미래로 가서 지금 여기를 뒤돌아보자
두번째 생일인 오늘을
두번째 생일 아침에 지은
우리의 새 이름을

자기 고집을 피우는 순간
수직을 버리고 한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
땅에 뿌리박은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풍향계는 바람의 역사를 놓친다

더 큰 소리로 말해그해 가을 처음 들어간 연극부빙 둘러선 낯선 부원들우두둑우두둑 스트레칭에 이어아에이오우 발성 연습 시간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턱관절까지 푼 다음더 큰 소리로 말해를 가장 낮은 데서 시작해목소리의 끝까지 밀어올려야 했다

마음약한 좋은 자들이
스스로 강해지는 약자다
그런 약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강자다

색안경을 끼자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쓰자
색안경을 써야 더 잘 보인다
문제는 색안경을 내가 골라야 한다는 것
내가 고른 것을 당당하게 쓰고 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색안경을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일과 일 사이가 일보다 크지 않아서
보가정이 가족보다 크지 않아서
결국 생활이 생존보다 크지 않아서

그리고 밥인데요, 남녀 벗이 사십구재 때 함께 나눈 이야기라며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요지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밥이라는 게 원래 공양이라는 뜻이다. 자기희생이라는 뜻. ‘너는 내 밥이야‘란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데사실은 ‘너‘ 때문에 내가 산다는 얘기 아닌가. 지금 우리가누군가의 밥이 되지 않고 저 혼자만 먹으려 하니까 세상이지옥으로 변한 거다. 그러니 우리가 서둘러 돌아가야 할 곳은 저 밥의 마음, 공양의 정신이다. 긴말 필요 없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밥이 돼야 한다. ‘네가 내 밥이다‘에서 ‘내가 네밥이다‘로 전환해야 한다. 우주 질서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자기희생인데 그게 결국 밥이다. 알고보니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더군요.

음식 만들기도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혼자 먹는음식에 정성을 다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음식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식재료에서 상차림까지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낯선 사람도 식탁에서 마주하면 달라집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식탁이 환대의 식탁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대에서 우애로!

혼자가 연락했다혼자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우리가 모닝커피를 마시며 미팅할 때밥상머리 교육 확대 방안에 관해 논할 때세대 간 대화 촉진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인류세의 미래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 참가할 때혼자가 혼자 있었던 것이다우리가 산책로 공원 광장을 늘려야 한다고모든 공동주택의 설계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고거대 도시를 마을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고 외칠 때전세계 기득권 세력의 완고한 프레임을 바꾸고시민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감성적 담론을 마련할 때그레타 툰베리 같은 청년들에게 부끄러워할 때노년세대의 행동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모색할 때지구 평균 기온 상승과 관련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지구촌 모든 대통령궁 앞에서 치켜들 피켓을 고민할 때양자역학과 저항운동을 연결시킬 수 없을까 궁리할 때혼자는 혼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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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뜰이 생기면
두어평 앞뜰이 생기면
옮겨 심으리라
마음속 피고 지던
모란
모란이 피어나면
마당에 나가서 보리라
엄동설한에도 피고 지던
그 마음속
백모란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저 멀리 초겨울 첫눈에게 눈짓하는
춘삼월 마지막 눈발처럼

맨 끝에서 맨 처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리하여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러고 보니 우리 네 식구가
한달에 한번 밥 한끼 같이 먹기 힘든
우리 집은 여전한 대가족이다

그러면 그렇지 겨울이 옷소매를 놓아주려나보다 싶었다이른 아침 겨울의 언 발치에 보슬비 내린다 잔설 듬성듬성한 산등성이 나무들이 극세사 같다 열한시 방향 시야가조금 흐리다 내륙 산간의 가장 깊은 데를 넘어가는 늦겨울보슬비

그러면 그렇지 보슬비가 진눈깨비로 바뀌고 있다겨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설 리 없다 겨우내 쌓인 눈이 한나절 보슬비에 녹아내릴 턱이 없다 겨울이 며칠더 머물러도 괜찮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병을 고치려면병이 드는 데 걸린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침묵의 중심에서 가장 먼 곳까지 다시 다녀오기로 한다그러면 그렇지 이건 아예 투석전이다진눈깨비가 열두시 방향에서 들이닥친다 하늘이 급하게낮아지고 고드름 끝이 다시 빳빳해진다 장작불 괄괄하게 지피고 감자부터 한솥 쪄내야겠다

술기운이 대장까지, 충분히 내려가 있었다
고향 집 지붕에 찬 이슬 내릴 시간
장독대 해바라기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시간

오지 않는 당신 때문에
여럿이면서 하나입니다
가지하나이면서 여럿입니다

낮에는 더 낮아지고저녁에도 두 팔 벌려 기지개 켜는 곳높지도 크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느릿느릿 산의 북면(北面)달 우러르기 괜찮은 거기향월암으로 가자봅니다.
월광욕 가자백사장이나 몽돌 해변 일광욕 말고옥상이나 테라스에 누워해에게 다 보여주는 그런 적나라 말고그윽한 숲이 아니라도 좋다끝간데 없는 초원이 아니라도 좋다터질 듯 부푼 만월이 아니라도 좋다

땅 이름이
당신땅에서 떨어지지 않듯이
경기도 남양주 별내
그 먼 곳
당신이
기내 생에서 떨어지지 않듯이

봄보다 먼저 떠난 당신꽃진자리 새카맣게 영그는빛나는 열매는 생각하지 않는정작 봄의 완성은 외면하는매번 그랬듯이 앞만 보는 당신 자가당신은 거기서 무얼 하는 건가요

그래서 저는가로등 디자인이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불이 꺼진 낮에 그러니까가로등이 가로등이 아닐 때가로등을 많이들 보니까요재차 말씀드리지만가로등의 모습은 낮에 잘 보입니다

제 몸을 다 태워야가장 높이 날아오르는가장 높이 날아올라제 몸을 불살라버리는저것은 가장 높은 자진이다승화다아침 이슬이유난히 차고 맑은 까닭이다

그러다보면 등꽃 향기에 취해오월 한낮이 새카매지고 놀다가까운 지구 밖 어디선가는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이 땅이하늘의 끝, 천장일 수도 있겠거니 하다가아니지, 모든 나무의 하늘은여기 땅이 마땅할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아니지, 등나무가 땅속에서 수고하는모든 뿌리를 위해 걸어놓는연등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

입춘 우수 사이대설경보 나흘째백두대간 백색 산록 금강송우지끈 제 가지를 내려놓는다우지끈 뿌리까지 번개가 친다눈발을 받아내며낙엽송 가만히 서 있다가만히 제자리에 서서하늘로 치솟는다

지금 여기얼마나 많은 꿈이얼마나 많은 안부가 안타까움이저 달을 향하고 있는가지금 한밤인 곳곳은저마다 밤의 한가운데지금 하늘 밝은 곳을 올려다보는곳곳의 한밤의 중심은저마다 얼마나 어두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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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명상이 어떤 새로운 상태, 혹은 경험을 얻기 위해마음이 행하는 어떤 활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명상이 마음의 속성, 혹은 본질 그 자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명상은 우리의 존재 방식이지,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서 자기로서 머무르고, ‘아이엠‘ 안에 휴식하며, 신의 존재를실천하는 것. 이것만이 경험의 개별적인 주체인 에고를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자 기도이며, 최고의 궁극적인 명상이자 기도입니다. 다른 모든 형태의 명상은 바로 이궁극적인 명상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밤이라고 태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같은 밝기로 계속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뿐이지요. 그래서 지구의 한 부분이 어두워지는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돌면 어두워졌던 부분이 다시 또 밝아집니다.

나알아차림의 존재는 모든 경험의 안과 뒤에서 늘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알아차림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그 빛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돌아설 때‘, 즉 대상적인 경험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찾아 헤매던 것을 멈출 때, 그리하여 방향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마음의 근원인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더 깊이 가라앉을 때.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생 갈망해 온 영원한 평온함과 만족감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외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면으로 돌아서는 것,
즉 마음의 돌아섬을 초기 정교회는 헤시카즘 Hesychasm 36 또는 마음의 고요함이라 불렀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사야가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평안을 주신다" 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이러한 비활동non-activity 안에서 지식으로의 길과 사랑,
혹은 헌신으로의 길이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탐색과 자기 굴복은 하나이며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 보통 사람들의 측은한 처지를 감안하여, 불이론적 가르침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내면의 평온함행복의 원천으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끄는 활동이나수행을 제안합니다.

불이론적 가르침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우선 마음을 준비시킬 수 있는 중간 단계 정도의 수행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이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본 모습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리어왕이 겹겹이 쌓인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면서 생각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 등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게 된다면, 그의 마음의 본모습이 외관상의 모호함으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모두 다 버려지는 순간, ‘나는 존 스미스다‘라는 앎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만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립니다. 유한한 마음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은 존스미스가 연극의 극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것은 알아차림이 대상적 지식과 경험을 알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제외하고 그를 본 사람은 없으며,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에게 이르지못하며,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는 그를통해서만 그를 알며 그에 의해서만 그를 본다. 오직 그만이그를 본다."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인 유한한
‘나‘는 곧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의 진정하고 유일한 ‘나‘
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앞으로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이지요. 거기에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 등의 색깔이 덧입혀진다하더라도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만이 "자"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존재가 되기 위해서 개별적인 자아를 제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거해야 할 개별적 자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개별적인 자아를 해체하고 완전히 뿌리뽑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환상적인 존재를 영속시킬 뿐입니다. 개별적인 자아를 길들이겠다는 것은 개별적인 자아를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현자 아트마난다 크리슈나 메논AtmanandaKrishna Menon, 1883~1959 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 안착하게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생각, 감정, 감각, 지각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게 되었을 때입니다."

리어왕이란 하나의 환상입니다. 하지만 모든 환상과 마찬가지로 리어왕에게도 실체가 있습니다. 리어왕의 실체는 존스미스입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에서 환상적인 요인을 모조리제거했을 때, 존 스미스라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됩니다. 다시 말해서 존 스미스가 새롭게 무언가를 알게 된것은 아닙니다. 다만 존 스미스에게서 무명이 제거되었을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경험조차 아니지요.
이러한 인식을 통해 본질적이고도 환원할 수 없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존재는 외관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실체를드러냅니다. 그것은 열려 있으며, 투명하고, 환히 빛나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실체입니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라고 부를 수있듯이,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물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잦아든다고 해서 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잦아든다고 해서 어떤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자신의 본질로 점차 가라앉으면서 고요해지고 넓어집니다. 그 내면의 유한하고 조건적이며 제한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정수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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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는 과정이 없는 이 여정을 마음을 가슴속으로 가라앉히는 것sinking the mind into the hear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이 여정 동안 마음은 가라앉고 이완되고, 뒤로 안으로, 그리고 ‘자아 쪽으로 향합니다. 여정을 거치며마음은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문득 순수한 마음으로,
본연의 무한한 알아차림으로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점진적으로, 가끔은 아주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지요.

마음은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색칠하는 활동입니다. 반대로 색칠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색깔이 지워진 마음의 본래상태인 순수한 알아차림을 드러내는 것이 명상입니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알아차림이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비대상적경험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난 후의 본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순수한 마음이며 알아차림 그 자체입니다. 내재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불멸의 정수를 아는 것입니다. 선의 전통에서는 이를 ‘본래면목our26original face‘ 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attention 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봅시다. [a]는 라틴어로 ‘~로‘, ‘~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tendere)는 신축성있게 늘어난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의란 지식, 혹은 경험의 대상을 향하여 알아차림을 쭉 뻗어낸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분 자신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라고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내딛으시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는 한 발짝도 갈수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 나 자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는 한 발짝도 멀어질 수없습니다. 어디로 가든 나는 항상 나 자신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앎, 단 하나의 ‘불이론적인 삶으로부터 모든 상대적인 앎이나 경험이 파생되어 나옵니다. 마치 자면서꿈을 꿀 때 여러 사람과 다양한 사물들이 나오지만, 이것은모두 꿈꾸는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왜곡되고 파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 다른 어떤행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그저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나 ‘주의‘라는 형태를 띨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 홀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나는 나의 신을 통해서 나의 신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은 순수한 앎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알며, 스스로 알아차립니다.
우리들의 존재와 우리들의 존재를 아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태양의 존재와 태양의 빛남 사이에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알아차림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으로부터 알아차림까지는 어떤 공간도 거리도간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길이나 수행 practice 의 가능성도없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이닙니다.

명상은 주의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 결과 알아차림이 스스로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정수입니다.
이는 마음을 어딘가로 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집중하거나 통제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지요.
무엇을 수행하든 우리 본연의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는 본연의 존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아를 일시적이고도 유한한 실체라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확고히 믿고 있으니, 이를 감안하여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불이론적 가르침은 자기 탐색 self-enquiry, 또는 자기 굴복self-surrender의 형태로서 명상을 수행하라고 권유하게 되었지요.

주먹을 쥐려면 처음에는 애를 써야 하지요. 하지만 주먹을쥔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주먹을 쥔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손을 펴려고 한다면, 손을 펴기 위해서 또다시 애를 써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알아차림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리고 있다는경험, 존재의 느낌, ‘아이엠 I am‘이라는 앞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엠‘이라는 삶은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알아차림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앎은 모든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마지막순간에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잠깐 빛나지만, 워낙 짧기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텅 빈 스크린이 잠깐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아이엠‘이라는 앎, 즉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앎은 모든 유한한 마음의 상대적 지식과 경험보다 앞서고 이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절대적인앎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앎이 곧 신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삶이 곧 신에 대한 신의앎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알아차림의심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 실습 the practiceof the presence of God, 또는 무한한 신의 존재에 대한 마음의굴복 surrender 이라고 하지요.

수피 격언도 바로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헤맸으나 결국 신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지요. 같은 이유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신을 안다"

이를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트마 비차라 atma vichara"라고합니다. 이는 주로 ‘자기 탐구self enquiry ‘나 ‘자기 탐색 selfinvestigation‘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서양 문화에서 ‘탐구‘와
‘탐색‘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과정이나 작용을 시사하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준수self-abidance‘ 혹은 ‘자기 휴식 self-resting‘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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