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옥희와 한철, 정호 간의 삼각관계를 잠시 논했었는데, 그 때는 옥희가 정호를 밀어내는 장면이었고, 오늘은 한철이 옥희를 밀어내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밀어냈을 때, 거절당했음을 자각했을 때 느껴지는 마음의 고통은 정호나 옥희나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 정호와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던 옥희의 반응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면에 입은 마음의 상처 혹은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듯 하다.
또한 옥희가 정호를 밀어내고 난 뒤 한철에게 거의 비슷하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보면 사람이라는게 자기가 한 행동을 거의 그대로 돌려받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은 꼭 자신이 상처를 줬던 상대방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곳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극 중의 옥희도 그러했고,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사람들로 부터 동일하게 그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인 복수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어딘가에서 자신이 뿌렸던 악한 행동들을 뿌린대로 거둘 것이라는 것을 오늘 읽은 부분에서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갑자기 좀 생뚱맞은 얘기일수도 있는데, 세상이 아무리 나쁘고 더럽고 치사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괜시리 와닿는다. 그게 복이 되고 덕이 되어 다른 어디에선가 내게로 돌아올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큰 그림을 가지고 사는게 복받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사실 그가 쓰는 단편이나 장편소설마다 단이가 남긴 흔적 몇 가지는 성수의 원고지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단이는 그에게 있어 영감의 잉크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모든 면에서 특별한 사람이었다.
"각 부품을 상세히 연구하다 보면 자동차도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진 않아. 사실 나는 그래서 자동차가 좋아. 뜯어보면 단순하거든. 계산, 회계, 이런 것도 전부 단순한 일들이고. 정말 복잡한 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지." 한철은 지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난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자기는 날 행복하게 하잖아. 인생은 짧은데 왜 우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끝이라고? 끝이라!" 옥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철이 그 단어를 그토록 쉽게 발음한다는 사실이 그의 내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는 당신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만을 사랑해 왔어. 내 모든 것이 아플 만큼. 당신도 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거야.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당신 마음속에는 계속 따스한 온기와 밝은 한 줄기가 머물고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이제 난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을 멈추려고 최선을 다할 거야. 언젠가 당신 안의 태양이 더는 빛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날, 당신도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한철 씨는 내게 줬던 사랑만큼, 꼭 그만큼의 고통도 나에게 안겨줬어."
그러나 단 한 개도 온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 그 모든 씨앗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염없는 공간을 계속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자신의 말이 바로 그 흰 씨앗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방 안의 허공을 맴돌기만 한다는 걸 느꼈을 때, 옥희는 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 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만주국은 표면상 중국의 마지막 황제를 통치자로 내세웠으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괴뢰 국가였다. 하지만 그처럼 넓은 영토의 대국을 한꺼번에 삼키려다 보면 목에 커다란 가시가 걸리기 마련이다.
중국에 온 뒤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정호에겐 지나간 일들과 자신의 감정을 곰곰이 돌이켜 볼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 덕에 그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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