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삶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과도 같습니다. 험준한 길도 모자라 지뢰와 무장강도 등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내가 원하는 거래가 성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등짐을 한껏 지고 올라간다고 해서 짐삯 또한 제대로 받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도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또다시 노새와 함께 등짐을 지고 국경을 향해 나서야 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겠지요. - P203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넘어야 하는 산이 있다. 그 산에는 눈보라가몰아칠 수도있고 계곡이 험해서 헤치고 나가야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에서 아웃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이라는 산을 매일 넘고 있다. - P206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일정한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그 ‘타고난 재능‘에는 어떻게 견주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예술의 영역일 경우는 더 그렇지요. 그래서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요"라고 외친 영화 <아마데우스> 속의 살리에르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절망감과 질투하는 마음은 인간이니까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 P210
살리에르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음악과 무관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노력해 자신의 음악을 완성했고, 그의 음악은 인간의 노력이 닿은 최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라는 천재 앞에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보게 되고 그를 만남으로 인해 음악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대변인이 되어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가장 절망할 때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격이 다른 유형의 인간을 만났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 P212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오셀로 장군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입니다. 전장에서 호령하는 천하의 장군도 시기심과 질투 앞에서는 이렇게 무너지고 맙니다. 오셀로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관계도 이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개천에서 용 나듯 태어난 살리에르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면, 모차르트는 영재 교육을 받은 데다 천재이기까지 하니 그들 사이의 벽은 결코 넘을 수 없이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불행히도 그것을 체감하는 것은 늘 그 한계를 알고 있는 쪽이지요. - P212
살리에르에게 음악이 성지라면 모차르트에게는 마치 놀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는 빈곤과 군중의 외면 속에서 차츰 황폐해져갔고, 그를 시기하는 살리에르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듭니다. 살리에르는 그럴수록 외롭고 두려움을 느끼지요. 아무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그에게는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 P213
질투는 허기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로 신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 앞에 놓인 상대에 대해 질투를 느끼게 되고 그럴 때면 신의 조롱 앞에서 무릎 꿇었던 살리에르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재능을 훔치지 못해 불행했던 보통의 인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가장 깊고 높게 알아준 벗이기도 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질투는 상대에 대한 깊은 애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 P214
질투는 때로 나를 자극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벽이 되기도 합니다. 질투심 때문에 친구를 왕따 시키거나 모함을 하기도 하지요. 하긴 그런 감정이 어찌 아이들의 일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이 질투의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 P215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아들아, 남을 비판하고 싶어질 때면 이렇게 생각해 보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남을 질투하고 싶을때면 먼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씩 재능이 주어졌으니 나의 재능을 먼저 한번 찾아보라고요. - P215
어쨌건 나이가 들면 질투나 미움 같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이기에 그런 감정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있습니다. 다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르가 더 외롭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질투하기보다 그를 보며 건강한 발전을 도모하고 내 재능을 발견해 인간으로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 P215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P216
나같이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부유하거나 천재의 기질이 있으면 질투하게 된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 그렇다면 질투는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이 질투라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좌절감과 혼란을 준다. - P217
이 영화(내 이름은 칸)는 미국의 작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국 청소년들의 필독서이기도 한 이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마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그 상대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참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950~60년대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은,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42세의 흑인이 백인에게 자리를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토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 P221
백인 변호사인 애티커스 핀치의 어린 딸 스카웃은 늘 자신의 집에서 마을의 은둔자인 래들리의 현관을 바라봤지만 아버지로 말미암아 래들리 씨의 현관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게 됩니다. 관점의 이동, 즉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면 현상은 전혀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이지요 《앵무새 죽이기》에 아빠인 펀치 변호사가 있다면 <내 이름은 칸>에는 엄마가 있습니다. 칸의 엄마는 아들이 장애로 인한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사람. 하는 행동이 다를 뿐 다른 차이점은 없단다." - P221
사미르를 잃은 만디라는 자신이 ‘칸‘이라는 성을 가진 리즈반과 결혼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자책감에 빠지고 급기야 ‘칸‘을 외면하게 됩니다. 이를 도저히 이해 못하는 칸에게 만디라는 당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미국 대통령에게 말하고 오면 다시 받아주겠다고 하고, 이에 칸은 미국대통령을 만나는 험난한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 P223
<앵무새 죽이기>에서 앵무새는 편견과 차별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뜻합니다. 은둔자 래들리나 억울한 누명을 쓴 톰 로빈슨이 다른 이들로부터 차별받은 이유도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래들리 가족이 교회에 나가지도 않고 래들리 부인이 선교 모임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앵무새인 흑인 톰 로빈슨은 존경할 만한 겸손한 인간이었고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 성실하게 일했지만, 백인 처녀인 메이엘라를 동정하고 도와주려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 영화 속의 아이 사미르 역시 성이 ‘칸‘ 이며 무슬림이라는 까닭으로 또 하나의 앵무새가 되고 맙니다. - P223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젊음과 쾌락을 얻는 대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기로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파우스트는 어떤 쾌락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거대한 땅을 개척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악마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지려오지만 천사가 나타나 그를 구원합니다. "누구든지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스스로 노력했고 아울러 그가 봉사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칸도 역시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극복합니다. - P224
사랑하는 만다라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선 칸의 바람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걸어가는 길은 험난하고 고단했습니다. 하지만 칸이 가장 노력하며 애쓴 것은 바로 봉사였습니다. 무슬림이기 이전에 한 인간 칸이 보여주는 희생정신을 통해 미국인들은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그는 새로운 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봉사는 국경과 인종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소통과 진실을 알리는 최상의 도구인가 봅니다. 아니, 칸이 훌륭한 것은 파우스트와 같이 스스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줄곧 노력하고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 P224
<내 이름은 칸>과 <앵무새 죽이기> 이 두 작품이 우리 시대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완벽하게 정당한 시선을 갖추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여전히 아이들에게 유효한 것은 이를 통해 앵무새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입니다. 이들 작품은 갖가지 이름으로 행하는 구별 짓기와 선긋기를 거두고 관용과 사랑으로 타자를 이해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문화 다인종 사회는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특히나 타인종에 대해 배타적인 우리로서는 이 영화를 통해 인종차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P224
우리나라에도 현재 다문화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와 모습이 다르다고 그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견과 선입관이 존재한다. 이러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 P228
서울역에 발을 내디뎠을때 싸한 겨울 눈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렸고 무표정한 사람들은 급한 듯 총총 발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갔습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구나, 그 서늘한 외로움이 내가 접할 사회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P234
인터라켄은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말년을 보낸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일까요? 그곳은 아직까지도 내게 평화의 종착역처럼만 여겨집니다. - P235
이 영화 속의 배경 역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중앙역입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까닭은 중앙역이 가진 비정함이 브라질의 현실과 잘 접목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브라질을 대표하는 윌터 살레스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가인데 반문맹인 여성 장기수와 저명한 조각가 사이에서 오랜 세월 주고받은 편지를 기초로 했던 자신의 다큐멘터리 ‘또 다른 어떤 곳의 삶으로부터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에 더하여 현실에서 느꼈던 부당함을 영화 속에 삽입하여 브라질, 나아가서는 라틴 아메리카를 덮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들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합니다. 오래도록 외부와 단절되어 과하게 벌어진 빈부 격차와 치안의 부재, 후진적인 정치 등 사회 전반적인 ‘닫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 P235
사람의 관계란, 그렇듯 서로간의 오랜 동행 끝에 완성되는 십자수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제각각의 실이었지만 한 땀 한 땀 선을 따라가는 동안 종내는 한 폭의 그림이 되듯이 말입니다. - P238
‘땅 끝 마을‘은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유토피아(UTOPIA) 입니다. 이는 토마스 모어가 제시한 이론으로, 그리스어에서 U‘는 ‘좋다(eu)‘와 ‘없다(ou)‘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에 장소(Topia)를 더한 합성어이지요. 도라와 조슈에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결국 ‘땅 끝 마을‘까지 도달합니다. 그곳은 모든 집이 똑같이 생기고 빈부격차가 없으며 누구나 일을 하고 행복을 누리는 그들이 희망하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큰 비극 가운데 하나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낡은 정치, 치안의 부재등과 같은 것이라면 ‘땅끝마을‘은 그 모든 것을 감싸주고 안아주는 인간이 닿고 싶은 곳이겠지요. - P239
조슈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승계자 여호수아를 떠올리게 하고 목수인 아버지 제슈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영화 곳곳에는 그들의 간절함이 종교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믿음만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 P240
해피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ㅡ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이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ㅡ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ㅡ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ㅡ해피 버스데이 투 유! - P243
우리 모두는 지금,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 P246
그러게요, 함께 산 시간이 길었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 P249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고 이렇게 두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게 됩니다. - P250
미리와 형부, 그리고 언니 길라는 동일한 언어를 쓰지만 서로 독해되지 못하는 언어들 속에서 각자의 외로움을 안고 있습니다. 말은 하되 대화는 통하지 않습니다. 바라는 보되 서로 응시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함께 하지만 제각각인 채로 말이지요 - P251
몇 십 년을 함께 살고 있다고 하여, 또 오래도록 만났다고 하여 진정한 의미의 교감, 그리고 나눔을 실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살다보면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요? 단 한 번을 만났을 뿐인데도 상대를 내 가슴의 우물 안으로 끌어당길 때도 있습니다. 횟수나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와 사랑이 우리의 만남을 더욱 공고히 하고 의미 있게 만듭니다. - P252
말은 비록 통하지 않지만 아픔을 진심으로 공유할 수 있는 눈빛, 그리고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누들과 미리의 언어이고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 P252
미리는 누들을 보호하고 엄마를 찾아주면서 새삼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베푸는 것이 자신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 누군가에게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큰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 P253
말로는 쉽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들여놓는 일입니다. 그리스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얘기가 나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가 지나가면 집 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서 짧으면 몸을 늘여서죽였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세운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가슴에 숨겨놓고 만남을 희망하기도 합니다. 만남이 더욱 메말라가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 P253
어린왕자에게 장미꽃은 특별하지만 지구에는 그런 장미꽃이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장미에게 물을 주고 사랑을 기울여 키웠다는 것이 중요하듯 관계란 그런 것이라는 걸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 P254
미리가 꼬마에게 대화를 청할 때 제일 처음 내어놓은 것이 바로 누들이었고 그래서 아이의 이름도 누들이 됩니다. 음식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따뜻한 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꼬마가 홀로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처음 미리를 만날 때 먹었던 ‘누들‘과 나중에 모든 관계가 서로 따뜻하게 풀어진 후의 ‘누들‘은 다릅니다. 엄마가 일하는 식당 ‘더블 해피니스‘에서 먹는 누들은 촉촉하고 풍성하며 부드러워졌지요. 그 말랑말랑하고 수분 가득한 누들을 먹는 이들의 표정이 따뜻합니다. 하지만 미리가 꼬마에게 처음 누들을 건넸고 꼬마가 그 뻑뻑한 누들을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관계의 시작이거든요. 음식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들어주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그리고 나눔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 P254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탯줄이 끊어진 것처럼 갑자기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된 아이를 둘러싸고 관계가 잘못 형성된 한 가정 내의 구성원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정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하나가 되어가는 내용이다. - P258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밀항을 받아들이고 캄캄한 여행가방 속에 숨은아이. 외부와의 소통 공간은 한 뼘도 되지 않는 지퍼 틈새 버스에서 비행기에서 길거리에서 불안해 할 아이를 위해 지퍼 틈새로 집어넣은 ‘미리‘의 손가락은 믿음과 사랑으로 이어진 탯줄과 같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로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장면은 모자상봉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 P259
마티의 말처럼 "인생이란 끝없는 여행을 하면서 제 자신과 대화하는 것"일지 모른다. 또한 "물리적 거리는 기억, 소유, 정체성을 파괴한다"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비록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물리적 거리를 좁히려는 서로의 노력이 관계회복의 첩경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 P259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죠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그 때가 1960년이었죠. 난 체리 나무 농장에 도착했어요. 그 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죠.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가 않았어요.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어요. 그 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죠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하나 먹었죠.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어요.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어요.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죠 전 행복감을 느꼈죠. 그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어요. - P263
그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츰 ‘존재 자체의 기쁨‘이라는 것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짐짓 알고는 있지만 외면해왔던 ‘나‘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 평범한 어느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창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무턱대고 기쁠 때가 있습니다. 느닷없이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고 파란 하늘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저녁에 모든 식구들이 모여서 밥상을 마주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지천에 놓인 체리인데 우리의 욕망은 눈앞의 체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게 하곤 합니다. 체리 나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도록 내 앞에 놓여 있는데요. - P264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다는 헬렌 켈러의<3일간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데 인간은 주어진 존재, 그 자체로서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할 일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지상에서 볼 수 있는 3일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 P265
세상에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욕망은 추구할수록 큰 몸집으로 우리를 압박하지만 내가 변하면, 내 마음이 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요. - P266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처럼. 신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전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만큼 행복한 음악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들의 욕망은 깊이를 알 수없는 늪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워갈수록 왜곡된 욕심은 우리들의 근간을 흔들어 많이 가질수록 불행해지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 P266
비워서 아름다운 일, 내려놓아서 찾을 수 있는 평화의 체리가 무한히 놓여 있어도 보지 못하면 먹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기쁨도 느끼지 못하면 모두 헛일입니다. 영화 속 사내인 바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 영화의 감독)의 또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어옵니다. 저 맛난 체리를 먹겠소 모르는체 하고 캄캄한 욕망의 구덩이에 갇혀서 괴로워만 하겠소? - P266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체리입니다. 특히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는 까닭은 ‘너희들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체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P266
좋은 영화 한 편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는지 말해주고 싶습니다.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얼마나 넉넉한지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잠시 쉬면서 바람과 햇살 앞에 몸을 맡겨보면, 밤하늘을 보면, 살아 있다는 것은 빛나는 훈장과도 같답니다. 청소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는 것도 자신의 체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P267
대체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책이나 영화를 보게 하면 흔히들 질문을 합니다. "자, 넌 뭘 느꼈니?"라며 느낌이나 주제를 찾아보라고 말이죠. 영화나 책은 주제를 찾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나는 어떤 장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데, 너는 어떠냐? 이런 정도의 질문이면 어떨까요? 아니면 애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P273
같이 영화를 본다. 이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책은 결국 혼자서 읽는 것이지만 영화는 곁에 기대어, 서로 팝콘을 나누며 혹은 손을 잡고서 누릴 수 있는 매체입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을 같이 볼 수 있는 것,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을 아이들의 가슴에 올올이 새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영화를 볼 때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서로 손끝을 느끼며 함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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