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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크게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읽어나갔기에 처음에는 각각의 단편소설 묶음인줄로 착각했었는데, 읽다보니 3개가 제목만 다를 뿐 묘하게 이어져 있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첫번째 챕터인 '채식주의자'는 영혜라는 여자와 그녀의 남편 간에 있었던 얘기들을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인물인 영혜는 어느날 문득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고기와 관련된 것들은 일절 먹지 않는다. 본문에 따르면 어떤 기묘한 꿈을 꿔서 그렇다는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는데, 솔직히 뒤에 나오는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을 읽지않았다면 영혜의 행동을 쉽사리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스테리한 영혜의 행동과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지는 '몽고반점'에서는 채식주의자에 등장했던 영혜와 영혜의 친언니인 인혜의 남편이 주요 인물이다. 여기서 몽고반점은 영혜의 둔부에 있는 커다란 몽고반점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인혜의 남편이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성적 판타지를 영혜를 통해 실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다소 이해하기 난감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대략적인 얘기만 잠시 해보자면 무슨 몸에다가 이런저런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가진 꽃 그림같은 것을 그린다. 때마침 이 그림이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의 취향과 조화(?)를 이루면서 인혜의 남편이 영혜를 통해 실현하고자했던 성적 판타지가 소설 속에서 얼마간 실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인혜는 그들을 신고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면서 다음 챕터인 '나무 불꽃'이 시작된다.
'나무 불꽃'은 앞서 언급한 인혜와 영혜 자매가 핵심 인물이 되어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챕터의 핵심 내용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만나러 인혜가 병문안을 가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에 관한 것이다. 정신병원에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영혜는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언니인 인혜에게 해댄다. 한 예를 들자면, 자기가 물구나무를 섰는데 무슨 손에서 뿌리가 뻗어나가고 다리에서 가지가 뻗어나갔다느니 하는 등의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종종 했던 것이다.
이 소설(나무 불꽃)의 후반부를 읽다보면 영혜의 정신이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 짐작해볼만한 단서가 하나 나온다. 그런데 이는 앞서 나왔던 이야기인 '채식주의자'에서 나왔던 에피소드 중 하나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손찌검' 이었는데, 아버지가 크게 혼내기 전에 눈치껏 행동했던 다른 두 남매(인혜, 영호)와는 달리 영혜는 상대적으로 눈치가 없고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다른 형제자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다 결국 아버지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말이 많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영혜였던지라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이 단지 물리적 상처를 남긴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 또는 정신적인 트라우마까지 남긴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소설 전체를 다 읽고 돌이켜보니 이러한 트라우마가 발단이 되어 영혜는 꿈을 꿔도 괴상하고 무서운 꿈을 자주 꾸게 된 것이고 이러한 무의식이 정신을 지배하자 뭔가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육식을 거부하고 상대적으로 폭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채식만을 하는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이 작품을 쓰신 작가님의 생각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다만 독자인 내가 이런식으로 추론을 해보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소설 위에 작은 소설(?)을 하나 더 써봤다는 말이다.
또한 마지막에 나온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친언니인 인혜가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들을 종종 엿볼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라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거나 바라는대로 흘러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인혜는 적어도 그녀 자신만 놓고 본다면 성실하게 자기 할 일 잘하면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인생이라는 게 나 하나만 잘한다고 다 잘 풀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가족이나 친구, 지인 등 자기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는 것도 인생길을 순탄하게 풀어나가는데 있어 자기자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자신 외에 나머지 요소들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하게 '운'이라는 말로 퉁쳐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지금 이 리뷰를 쓰면서 개인적으로는 '운칠기삼'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가 좀 더 생생하고 실감나게 느껴졌다. 인생은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인혜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인혜의 남편도 인혜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괴상한(?) 성적 판타지에 빠져서 가정을 파탄 냈고, 동생인 영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반복된 손찌검으로 인해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결국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그나마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혜마저도 자기 주변 사람들로 인해 조금씩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인생이라는 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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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리뷰를 쓰고 이 책에 대해 다른 분들이 써주신 리뷰들을 찾아서 몇 개 읽어보았는데, 정말 심도있는 이해와 감상을 남겨주신 몇 분의 리뷰를 만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놓쳤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얘기들도 읽어볼 수 있었기에 이 작품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수준 높은 리뷰들을 보면서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이해나 감상이 상대적으로 좀 부족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심도있는 리뷰를 남겨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많은 공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