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이다보니 서사가 꽤나 길다. 대략적인 상황만 언급하자면 잡지 취재차 탄광이 있는 황곡시라는 곳을 방문한 인영과 명윤은 그곳에서 사진 찍는 일을 하는 장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는다. 그 와중에 광부로 일했던 임林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임林이라는 사람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황곡시로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던 임의선이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처음엔 이 임씨가 임의선인줄로 생각했는데, 뒤이어 계속 읽다보니 이 광부로 일했던 임林씨는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이라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명윤은 임의선을 찾기 위해 인영과 함께 황곡시 주변을 수소문해가며 샅샅이 뒤져보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인영이 방문했던 폐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신문기사 스크랩북에서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면서 의선을 찾는 일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거의 99% 포기상태였다가 1%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던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근거로 다시 의선을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세세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인영의 꼼꼼함과 명윤의 열정이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의선을 찾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고 월산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인영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인데, 불빛을 찾기 힘든 시골의 캄캄한 밤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비유적인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느껴졌기에 밑줄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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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가 의선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 의 영혜라는 인물과 거의 똑같은 것이었다. 단지 작품에 나온 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저자가 평소에 갖고 있는 신념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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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어서 쭉 읽어나가다가 보니 인영과 명윤은 더이상 의선을 찾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월산에서 황곡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왔는데, 그곳에서 어떤 아낙네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다. 처음에는 큰 의미없는 일상적인 대화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인영과 명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지명地名인 어둔리라는 단어가 나온다. 인영은 이 지명에 관해 아낙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동안 자신이 찾았었던 다른 지명들까지도 실재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영과 명윤은 자신들이 찾았던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낙심하고 있던 터라, 이 아낙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처럼 인영과 명윤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가로 아낙들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체가 아직 불명확한 어떤 젊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가 연골이라는 곳에 간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여기서 이 젊은 여자의 성이 김씨인 것으로 나오는데, 그동안 나왔던 소설 속의 인물들 중 김씨는 명윤과 함께 있는 인영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왠지 인영과 관련있는 사람인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소설의 앞부분에서 인영의 친언니인 민영이라는 사람이 잠깐 나왔었는데, 그녀는 인영이 11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을 독자인 내가 별도로 기록해 둔 것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 민영이라는 사람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그당시 행방불명되어 살아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나의 생각이 뒷부분을 통해 맞는 것으로 드러날지 아닐지는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던 퍼즐을 조금씩 맞춰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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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보니 김씨라는 사람은 그냥 마을에 사는 주민 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 김씨가 명윤에게 의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인 나로써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 P320

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은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 P320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눈빛의 변화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 P327

그냥......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 결국 그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건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짐승보다 낫다고 여겨지지 않아요. 소가 엄마한테서 떨어질 때 얼마나 슬프게 우는 줄알아요? 돼지가 죽기 전에 얼마나 불쌍하게 비명을 질러대는데요.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나는 회식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자꾸만 상상을 하게 돼요. 저것이 살았을 때는 어땠을까, 죽는 순간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 P328

내 방도 옥탑이라서 좋아했었어요. 가끔씩 와서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일광욕하는 사람처럼 옥상에만 앉아 있다가 가곤 했어요. 그애는 마치...
그는 미소를 거두었다.
・・・・・ 마치 식물 같았어요.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도 그애는 늘저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의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예요. - P342

재작년 겨울에 후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바닷가 모래밭에 갈매기떼들이 앉아 있는 걸 봤어요. 모두 일제히 한방향을 보면서 수십 마리의 새들이 꼼짝도 않고 있더라구요………… 그것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태양 쪽이었어요. - P342

다 햇빛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 P343

......너무 강한 햇빛은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요? - P343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은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P346

선배는 예전의 그애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애를 몰라요.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그때를 모르니까.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이 좋으니까. - P347

단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본능에 의지하여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건 어리석은 짓이건 내가 선택해서 나선 길이었다. 더구나 다음날까지는 어차피 작정하고 온 것 아닌가. - P349

자신도 모르게 명윤은 서인천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낮에도 창문을 꼭꼭 닫아 빛이 들지 않던 그 방의 오후를, 곰팡이가 흐드러지게 핀 장판과 벽지 썩어가는 냄새를 생각했다. 그의 삶은 그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다. 그의 몸뚱이에 들러붙은 그 눅눅한 어둠은 단 한 번도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종내에는 이 외딴 소읍까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온 것이다. - P357

황곡이 버림받은 거대한 짐승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 월산은 그보다 몸집이 작은 짐승 같았다. 오래전에 숨이 끊어져 이제 남은 뼈들마저 삭아가는 들짐승처럼, 이 소음은 높은 봉우리들의 가운데에 허술하게 엎드려 있었다. - P358

아버지는 땅속에서 살았었대, 라고 의선은 그에게 말했었다.
땅속이라니?
땅속, 아주 깊은 데에서 살았었대………… 거기서 돌을 캤대. 땅속에서 돌을 캔다는 건・・・・・・ 그 돌들하고 목숨을 조금씩 바꾸는 거라고 했어. - P362

명윤은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회의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의선이 말했던 것들은 어느 하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인영의 말대로, 그 말들에 의지하여 길을 나선 것부터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어쩌면 의선이라는 여자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명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고 겪었던 의선은 혼령이나 꿈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 P362

"그애가 아무 기록에도 없는 것이......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요." - P369

처음부터 의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었다. 줄곧 의선은 그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가냘픈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왔다. 그 힘이 우연히 명윤에게로 기울어 그와 함께 세 계절을 보낸 것뿐이다. 이제 그것이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울을 떠나면서 그가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찾아낸다 해도 그녀를 그 자신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끌어당길 수 없으리라는, 뿌리깊은 패배감이었다. - P370

마치 상처 입은 두 짐승들처럼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눈을, 서로의 등뒤로 검게 펼쳐진 폐광촌의 하늘을 쏘아보았다. 침묵이 후회와 외로움과 분노가 거칠게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 P372

"간 사람이사 무슨 걱정이 있겄누, 한겨울이라고 찬 구들장 걱정을 하나, 배 주릴 걱정을 하나. 손이 갈라지겄나, 발가락이 얼어터지겠나. 미어질 가슴도 없으니 얼마나 좋겄누." - P376

".....세월만한 약이 없다지?" - P378

"현리, 저기 칠판에 현리라고 적혔잖우? 우리는 그냥 어둔리라고 그래. 옛날부터."
목이 긴 여자는 배차시간표가 적힌 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뚫어져라 흑판을 쏘아보더니, 이번에는 긴 의자로 돌아가 자신의 배낭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냈다. 여자의 상체의 두 배는 될 대축척지도가 배낭 위로 펼쳐졌다. 여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월산을 짚었고, 이내 현리玄里를 찾아냈다. - P381

‘옛날에, 그애가 어둔리 이야기를 했었어. 난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 P382

"거 참 이상하네."
어둔리에 산다는 파마머리 아낙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젊은 여자애가 연골에 간다고 하는 걸 누가 봤다던데."
"연골엘가? 젊은 여자애가?"
매점 아낙이 되물었다.
"골말에 김씨 말이야. 왜 얼마 전에 타이탄 트럭 하나 샀잖어? 월산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인 줄 알고 태워주려구 했더니, 나가는게 아니라 연골로 들어간다고 하더래. 그래 참 별일도 다 있다고 했더니만." - P384

"더 빨리 걸어야 해. 시간을 끌수록 체온을 잃게 돼. 체온조절이 안 되면 죽는 거야. 알아?" - P389

전날 저녁 어둔리의 아랫마을인 골말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을 만나 의선의 사진을 보였을 때 그는 글쎄요, 라고 말끝을 흐렸었다.
비슷한 것도 같으네요. 하지만 얼굴을 하얀 목도리로 친친 싸매서 잘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는 세상에, 아무도 안 사는 연골로 간다니까 섬뜩했다니까요. 거긴 아무도 안 산다고 해도 들은 척 마는 척하고 허전허전 걸어가는 거예요. 한 손에는 기우뚱하니 큼지막한 가방까지 들고......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꼭 귀신에 띈 것 같더라구요.
그게 벌써 나흘 전의 얘기라는 것이었다. - P395

"그 조그만 마을에 주민이 몇이나 되겠어요? 모두 집안에 있었다면 못 봤을 수도 있는 거죠. 더구나 그애가 눈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얼어죽어 있든 어쨌든. 거기에 가야 해요. 그애를 찾지 못한다 해도…………"
명윤은 잔기침을 하며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다못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겨놨을 거예요." - P395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것일까. - P396

이것이 과연 맞는 길일까. - P397

의선이다. - P400

"......바로 찾아왔군요." - P401

"이제 어디로 가죠?" - P402

"여전히 그애에 대해서 알아낸 게 없군요. 난 이곳으로 오기만하면......
...(중략)...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팔차선 횡단보도에서 그애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런 말을 그애는 왜 그때 나에게 했었을까. 조용히 춤추는 것 같은 그애의 눈, 그 침묵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다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령 그애를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한다 해도." - P403

"......아무것도 없군요. 그런데." - P403

갑자기 긴장을 푸는 것은 좋지 않다. - P403

몇 분간 쉬었다 가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 P403

"봤죠? 하얗게 쓸어진 방바닥? 그애는 다시 와요. 반드시 온다구요. 서울서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한번 돌아왔는데 다시 못 오겠어요? 반드시 온다구요. 반드시 올 거예요." - P406

추위나 두껍게 쌓인 눈, 무거운 명윤의 몸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넋두리였다.
괜찮아요.
두고 가요.
제발 놔두고 가요.
반복되는 그의 속삭임이 머리끝까지 화를 치밀게 하였다. 제발 닥쳐줘, 라고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이를 물었다. - P408

이젠 다 틀린 거죠...... 이젠 다, 다 틀렸어요...... 이젠 더 가볼 곳도 없어요. - P408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사고 순간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은 저절로 삭제되는 것일까. - P418

세상 위로 올라오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나는 눈부시게 희고 뭉클뭉클한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구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구름 아래에 있을 때 구름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 P419

그 날아가는 비행기 아래에 내가 아는 세계가, 그 위로는 내가 가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 밑에도 다른 세상이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주알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P419

돌아올 때는 배를 탔다. 일곱 시간 동안 물살을 헤치며 육지를향해 나아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처음 타보는 배인데 멀미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바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겨울의 검퍼런 바다 밑이 따뜻한 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언니가 파도 속에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상처받기에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 P421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만나라도 봤으면...... 민영아. - P422

어쩌자고 그랬니..... 어쩌자고, 네가 어쩌자고...... - P422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이 무거워서 가라앉는 건데. - P423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 P423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 P424

그러나 그 상태로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로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해졌다. 생채기 위로 세월이 덧쌓였다. 묵었던 상처를 뚫고 새로운 상처가 파이고,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였다.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동안 나를 결박해온 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24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의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받아들였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한 번도 허락해보지 않은 애정을, 살을 부딪힐 만큼의 가까운 관계를 그녀에게 허락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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