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리미아시‘라는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술집에 나타나 거기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밑줄친 문장도 그 얘기 중에 나왔던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과연 이리미아시의 말대로 정말 우연의 작품인지 아니면 혹시 우연을 가장한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 가지 생각이 순간 교차했다. 물론 뒷 부분을 더 읽다보면 이 말의 의도에 대해 더 명확히 알 수 있겠으나 이 작품의 분위기 상 서로를 속고 속이는 장면들이 적지 않다보니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추가로 좀 더 보태자면 이 작품과는 별개로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속인다거나 겉과 속이 다른 행보를 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기에 이런 정도의 가벼운(?) 의심은 생존 본능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만 있는 세상이라면 이런 류의 의심은 전혀 할 필요가 없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소위 말하는 ‘사‘짜들이 부지기수이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상대방의 의도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의심이 너무 지나친 경우도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단지 사람이 좋다는 이유로 이 세상을 너무 순수하게만 바라보는 것도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마냥 능사는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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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보니 등장인물 중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간에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해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리미아시는 무신론자이고 페트리너는 유신론자인데, 이 둘 간의 논쟁이 시작된 건 호르고시의 어린 딸인 에슈티케의 사망 후 얼마지나지 않아 그 아이의 환영幻靈같은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에슈티케의 친오빠인 서니도 함께 있었는데, 이 세 사람 간의 관계가 계속 이어질지 그렇지 못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다만 이런저런 것들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끝까지 좋은 관계로 남아있지는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저희가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은, 보다시피, 우연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 P242

그들은 불안한 예감에 시달리며, 말의 뜻보다 위협적이고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이리미아시의 음성에 사로잡혀갔다. 연설을 듣는 처음 몇 분 동안은 책임이니 희생이니 고발 같은, 자기들과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흘려들었지만, 연설이 계속되는 사이 그들 마음속에 죄의식이 자라났다. - P248

사람은 어떤 일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걸 소리 내서 말해야 합니다! - P249

점잔 빼고 소심하게 굴며 전전긍긍하는 것은 모든 것을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 P250

잘 생각해보면, 모든 죄악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치는 일입니다! - P251

우리는 이제 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솔직한 고백은 고해와 같은 것이랍니다. 영혼은 정화되고, 의지는 사슬에서 풀려나지요. 그러면 우리는 고개를 들고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점을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 P253

이곳 주인장께서 이제 곧 관을 시市로 가져갈겁니다. 하지만 우린 여기 남아 있어야지요. 비극을 가슴에 묻고 애도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무력하고 비겁하게 입을 다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고개를 숙이더라도 정직하게 죄인을 향한 심판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갈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슈티케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벌이자 경고였으며, 그 아이는 우리를 위한 희생자였으니까요.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희생자였으니까요! - P253

친구들이여,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습니다. - P254

제가 해야 할 일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 P255

삶이란 참으로 잔인한 것 - P262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구나.‘ - P267

"그런 거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고요. 그러니 태연해야 한다고 내가 언제나 말하잖아요." - P268

"가고 싶은 대로 가는게 나아요. 걱정거리가 주는 셈이지." - P268

시내를 등지고 알마시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 크라네르는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침내 출발한 첫 순간이 그에게는 10년 넘게 겪어온, 반 시간 전에 그로 하여금 애먼 가구들에 분풀이를 하도록 만든 고통의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일행이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마음의 고삐를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 P277

"개 같던 세월아, 악마한테나 가라지! 해냈다! 이보시오들, 이웃님들! 이제 된 거요!" - P277

"난 처음부터 믿었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난 언제나 한 번은 우리 시간이 올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난 굳게 믿으며 희망했지. 자, 그리고 보라고. 이렇게 되고 만 것을!" - P306

"너무 힘들면 헛것이 보일 때도 있어. 내가 전선戰線에 있었을 땐 밤에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쫓아왔다니까. 정말이야!" - P319

"자넨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닐세. 지옥의 끓는 물을 생각하면 난 숨이 막혀온다고!" - P321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彼岸?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흘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 P321

"처진 귀, 신은 문자로는 나타나지 않아. 신은 무엇에도 나타나지 않지. 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 P321

"이봐, 난 신을 믿는 사람이야!" 페트리너가 성을 냈다. "적어도 내 앞에선 조심해주게, 이 무신론자야!" - P321

"난 예전엔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귀 늘어진 양반!" - P322

"그래서 난 우리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 거야.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완벽하게 그럴듯하거든.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고, 그다음엔 눈을 믿지 않는 거지. 페트리너,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거든. 그렇게 덫은 완벽하다네." - P322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게 현명하다는 거야, 늘어진 귀 양반아!" 이리미아시가 슬프게 말했다. "그러면 적어도 빨리 끝나기는 하거든. 아, 뭐. 굳이 목매달지 않아도 상관없어!" - P322

"그럭저럭. 살아지는 대로 사는 거죠." - P324

"아하, 우리는 방금 부활을 보고 왔지요." - P325

"무시무시한 종말을 보게 될 거예요. 옷 너무 따뜻하게 입지 말아요. 지옥불 앞에선 더울 테니까!" - P326

"난 내 편이지." - P327

그들은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 그들이 농장을 떠난 것은 냉정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몹쓸 충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건너온 다리를 부숴버림으로써 돌아갈 기회마저 영영 잃었다. 돌아가는 것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한들 이제는 길이 없었다. - P336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외면하고 모욕한 것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 P337

더 이상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 P338

비록 몇 시간 늦게 도착하긴 했어도 약속을 지키고 장차 그들은 구해줄 사람, 누가 뭐래도 그들이 고마워해야 할 사람을 의심했으니, 조급함이야말로 그들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잘못이었다. - P346

그저 상상만 하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까. - P351

하지만 크라네르는 이리미아시의 도착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에 끼어 있던 위험한 구름이 죄다 걷혀 버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리미아시가 문에 나타난 순간 상황이 급변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허둥대며 텅 빈 국도를 급하게 달려가는 것이 꼭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마치 무작정 도망치는 것처럼, 자기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도달할지조차 모르는 채,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이 끝없는 푸르름 속으로 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째서 저택을 그렇게 급히 떠나야 했는지, 이리미아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P354

순간, 그가 지난 몇 년간 떨쳐내지 못했던 불길한 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누더기 외투를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채 굶주리고 비참한 심정으로 외진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등진 마을은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앞에는 지평선이 아물거렸다. - P354

요란한 엔진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지금 굶주리고 얻어맞은 몸이 되어, 느닷없이 나타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있었다.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낡은 트럭이 자신의 생을 결정짓는 것을 그는 다만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헤어날 길이 없다.‘ 무감각하게 그는 생각했다. - P355

그는 저택의 문가에 이리미아시가 서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깨닫고 놀란 심정이 되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희망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이미 저택에서부터 그는 이리미아시의 말 뒤에 숨겨진 괴로움을 감지했다. 짐을 실으며 이리미아시를 쳐다보았을 때, 고개를 숙이고 트럭 곁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 영 글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P355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리미아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어떤 충동이, 즉 이전의 불꽃이 다 타버려 사라진 것이다. 그가 무슨 시늉을 하건 그것은 이제까지 해오던 무언가의 관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이리미아시가 술집에서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매달리며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을 때도, 그는 자기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었다. 그는 자신을 압박하듯 껴안아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의 출구를 열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럴 가망조차 없었다. - P356

내 갈 길은 내가 알아서 가요. - P360

‘너무 어리석었지! 어제만 해도 얼마나 믿음으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게 달라 보이는구나. 어리석음의 대가인 양 얻어맞아 부은 코, 부러진 이, 터진 입술, 피에 더럽혀진 몰골을 하고서 나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할 뿐이다. 이건 정의가 아니야. 정의는 없다고.‘ - P362

"아직 낳지도 않은 달걀에는 신경 쓰는 게 아니야! 내일 일은 내일가서 생각하자고!" - P362

"잘 알아둬라. 인생의 비밀은 농담에 있다는 걸." - P363

"일은 어렵게 시작해서 나쁘게 끝난단다. 중간에 일어나는 일은 다 좋은 법이야. 네가 걱정할 건 마지막 순간이란다." - P363

"나는 제정신을 잃고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신의 은혜를 받아, 이제 마법의 힘을 갖게 되었다. 나는 말의 힘만으로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 나는 미쳐버렸거나..." - P388

"정말로 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그 일이 일어난다니. 사건이 일어나는 방향을 어떻게 정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 P389

종소리가 멈춘 순간 그의 마음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텅 비어버렸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음향이 마치 오래전에 상실하고 만 희망의 선율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용기를 북돋아주고, 전혀 이해할 수 없음에도 결정적인 메시지로 다가오는 그 소리가 ‘무언가 좋은 뜻을 담고 있고 나의 확실치 않은 능력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임을 그는 감지했다. - P389

그에게는 종소리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통과 끊임없이 사태에 언어를 부여하는 고통스럽고 끈질긴 노력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만일 그가 종소리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한다면ㅡ특별한 힘을 가진 그가ㅡ인간의 삶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추진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P391

"용서할 수 없는 실수다. 나는 죽음의 종소리를 우렁찬 천국의 종소리와 혼동했다. 비천한 떠돌이! 어디선가 도망 온 미친 늙은이! 그리고 나는 바보였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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