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낯설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는지 진도가 잘 나간다. 책 표지에서 어느정도 예상해볼 수 있긴 했는데, 석고로 본을 뜨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온다. 내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에 전문 용어로 이걸 뭐라고 지칭하는지 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이야기를 쭉 따라 읽어나가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정도 적응이 된 건지 익숙해진 느낌이다.

이 책에 나오는 화자는 이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하는 미술가(?) 혹은 예술가(?) 라고 할 수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L이라는 인물은 이 석고 본뜨기 작업의 대상으로 나온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L이라는 인물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의 외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L은 날때부터 뚱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식욕이 갑작스럽게 폭증하여 뚱뚱해진 사람이었다. 반면 L과 함께 다니는 O라는 친구는 외모가 나름대로 괜찮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L은 O와 함께 다니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교를 많이 당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마음의 상처가 많아보였다.

이러한 L에게 화자는 묘한 매력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L의 손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고 나중에는 L의 전신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까지도 하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해 L과 화자는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L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화자에게 말하면서 이제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더이상 화자와 석고 본뜨는 작업을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홀연히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L은 몇 년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화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간 그래도 다이어트를 하긴 했는지 살이 빠지긴 했지만, 예전에 화자가 봤던 L의 행복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무언가 불행해보였다는게 화자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L은 다이어트를 할 때 자신이 먹은 것들을 억지로 토해내어 속을 게워내는 식으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방식으로 진행해야지, L처럼 몸을 무리하게 하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요요가 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L은 자신이 요요가 왔다고 화자에게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L과 화자가 대화하던 중에 나온 말인데, 일상 생활 상식으로라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밑줄쳐보았다.

토한 다음에 바로 이 닦으면 안 된대. 뭐라더라. 위산이 치약하고 합쳐져서 이빨이 상한다나. - P155

"내가 먹는 게 아니구, 음식이 날 먹는 것 같아요. 난 그냥 정신없이, 미친 듯이 삼켜지는 거예요. 머리가 날아가버리고 없는 것 같아. 다 사서 먹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구, 두 시간도 걸려요. 어떨땐 대낮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약속 장소로 갈 때까지 길거리에서 먹은 적도 있었어요." - P155

참을성을 다해 굶다가, 무서운 식욕이 덮쳐오면 먹구 토했죠. 위액이 나올 때까지 완전하게 토하니까 살이 빠졌어요. - P159

기대할 필요 없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 P160

"시작이란 말이 난 무서웠어. 차라리 끝이란 말이 더 가깝고 편했어요, 나한텐." - P162

"너한테는 타인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 없이 내가 살 수 있어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 P164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봐. 네가 태어나면서 이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잖니. 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거지."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죽어두,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갈거잖아요."
"그러니까, 너 없이 돌아갈 그 세상이라는 게 너한테 무슨 의미라는 거지?"
"내 참!" - P164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기름지고 단 음식에 대한 갈망과 거부감, 죄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폭식 충동이 몰아닥칠 때면 오히려 그런 음식들만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하루는 그런 음식들을 마음껏, 즐겁게, 천천히 먹어준다면 폭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 그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ㅡ그때쯤 그녀의 증세는 그만큼 이성적이었다ㅡ. - P165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 P168

"아침 식전에 유산소 운동을 해야 지방이 분해된대요." - P169

"배가 고프다는 게 이렇게 기분좋은 건지 몰랐어요." - P169

대략 석 달쯤이, 기형적인 대사 작용이 정상화되는 데 필요한 시간인 모양이었다. - P169

미치는 게 얼마나 간단한 건지 사람들은 몰라. - P177

"내가 진짜 참을 수 없는 건, 그 새끼가 아니야. 지금까지두 그새낄 못 잊고 있는 엄마도 아니야. 내가 정말로 증오하는 건, 내 병신 같은 모습...... 그렇게 병신같이 당하구 있었던, 나중엔 반항도 안 하구, 다 포기하구, 어디 신고할 생각도 못 하구, 비겁하게 가출도 못 하구...... 그래요, 내가 진짜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몇백 번을 당해도 쌌던...... 나." - P177

넌 단지 어렸을 뿐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을 뿐이다. - P177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187

"글쎄...... 성스러운 건 재미없는 건가?" - P190

석고 FRP는 잘 깨진다. - P192

"인간의 몸에서 가장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기관이 바로 손 아닐까? 우리가 먹고 만지고 뭔가 만들어내고 섹스하는 모든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기관이잖아. 즉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상징일 수 있는 거지." - P194

클라이언트들의 심리가 가격이 높을수록 신뢰감을 가지게 마련이니까요. - P196

너무 맑은 물에도 고기가 안 논다는 거 몰라? 외로움을 자초하지 말라구. 흐느적흐느적 살기에도 끔찍이 외로운 세상이야. - P197

"그리고 어차피 ......"
그녀는 미소를 보였다.
"모든 건 사라지잖아요? 우리도 그렇고, 우리가 만든 작품도 그렇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P209

"단지 저는."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단지 위안으로서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P209

뭔가 있다.
분명히 있다.
그녀의 태연한 얼굴을 벗기고, 그 안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거울 같은 두 눈동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꿰뚫어보고 싶었다. - P212

"상상력을 동원하는 거예요. 모든 일상사를 상상하면서.... 가장 말끔하게 행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거죠. 사람들은 우아해지고 싶어하니까...... 똑같이 물건을 꺼내더라도 엉덩이를 쳐들고 땀을 흘리면서 꺼내는 게 아니라, 주르륵 레일을 타고 나온 것을 가볍게 들어올리고 싶어하니까." - P217

"나도 카모마일을 좋아해요. 잠이 안 올 때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 P218

누군가에게 ‘뭔가 있다‘고 느낄 때면, 그 숨겨진 비밀이 손에 잡히지 않을수록 더더욱, 나는 그 사람을 향한 호감과 일종의 몰입을 경험하곤 했다. - P228

한때, 저것들이 내 삶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그 작업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L이 떠났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한 시절이 지나간 것이다. 거기 불어넣을 수 있을 만큼의 내 에너지와 시간이 모두 소진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지긋지긋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 P231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 P233

"정 미안하면... 대신 당신이 모델이 되어주면 어떻습니까?" - P233

그거였군.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게 그거였어. - P233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평소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 P236

빛이 들어오는 창 아래의 작업대 앞에서 P는 톱질에 열중해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더러운 면장갑을 낀 그의 팔뚝에는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왔으며, 두 눈은 진지하게 번쩍였다. 저것이 저 사람이 혼자 있을 때의 표정인 것이다. 농담과 사교적인 웃음, 정치적인 언사와 비꼬기, 자기 연민의 과장된 포즈따위가 모두 생략된, 지극히 단순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 P236

나는 그 의자에 앉아, P가 방금 꺼내 썼던 얼굴을 벗는 것을.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그 벗어놓았던 얼굴을 잠시 후 다시 걸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 P236

넌 그게 문제야. 도대체 폐 끼치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거..… - P237

"커피뿐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곤 하지. 어차피 요리도 상상력이니까. 안 그래?" - P237

장소를 바꾸면 사람은 좀 달라진다. 특히 자신이 먹고 잠자는 집이나, 반대로 완벽하게 낯선 장소에서는 평소와 다른 모습,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 P238

못을 빼도 못 자국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야, 다 극복했다 해도 그 자린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지. - P240

"......여기가 내 천국이야." - P246

가만히 앉아서 지루하게 들여다보는 것보다. 이렇게 걸어가다가 마주치는 게 더 인상적인 법이니까. - P248

"이 집에 살 사람들이, 내가 상상한 대로 살아주진 않을 거예요. 사람에 따라선 취향대로 개조해버리기도 하니까. 난 그래서, 내가 설계한 집엔 다시 안 가요. 갈 일도 없지만, 어차피 그 사람들 거잖아. 처음부터 내게 아니지. 내가 주인이 돼보는 건 오늘 하룻밤뿐이야.." - P251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보는 것들을 얘기하지 않는 버릇이 있죠. - P253

"당신에게 뭔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P254

"처음엔 차가울 거고, 다음엔 발열감이 있을 겁니다. 마치 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조이는 느낌이 뒤따를 겁니다."
개어놓은 석고액을 이마부터 바르기 시작하며 나는 설명했다. - P255

"석고가 굳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 겁니다. 석고를 떼어낼 때도 아플 테고..... 하지만 맨얼굴이 아니니까, 조금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55

그 내부를 나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 P259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L이었다. - P261

"화날 겨를이 어디 있었나." - P262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그러나 그것들을 이겨낼 만큼의 결백한 용기 - P264

"난・・・・・・ 남의 눈에 비친 나 말구는 내가 없는 것처럼 살았어요.
만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그렇게 학대했다면 진작 감옥 갔을 거야. 그렇게 굶기구. 한꺼번에 먹이구, 손을 집어넣어서 토하게하구...... 감옥에 갇힌 죄인이래두 그렇게 다룰 순 없는 거잖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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