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은 DNA라는 설계도로 만들어진다. 그 다양한 DNA는 모두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이라는 네 가지 종류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A, T, G, C 네 가지 염기의 조합 순서와 패턴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동안 엄청나게 다양한 건축물이 있어 왔지만, 이들은 모두 벽, 창, 문, 바닥, 지붕, 계단 같은 몇 개 안 되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요소들의 크기와 재료와 조합의 패턴이 다를 뿐 기본 구성 요소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렇게 요소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P6
벽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창문은 사람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며, 문이나 계단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만든다. 또한 기울어진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고, 평평한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고, 지붕은 지붕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 건축은 이렇게 ‘관계의 망‘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더 확장되어 건물 내부 사람과 건물 외부 사람들의 관계도 포함하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규정한다. 스케일이 더 커지면 도시 속사람들의 관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결정한다. 건축은 그렇게 사회를 구성해 왔다. 이 책은 건축 공간이 만드는 관계가 어떻게 사회를 진화시켜 왔는지 보여 줄 것이다. - P6
한자로 인간은 ‘人(사람인)‘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공간은 ‘空(빌 공)‘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 P6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 그렇게 인류는 공간과 함께 ‘공진화共進化‘해 왔다. - P7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 P7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로퀜스‘라고 부른다. ...(중략)... 직립 보행하는 인류를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른다. ...(중략)...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라고 부른다. ...(중략)... 놀이와 유희를 즐기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부른다. ...(중략)... ‘공간‘을 잘 이용해서 발전하고 진화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스파티움Homo spátium‘이다. ‘스파티움‘은 공간을 뜻하는 라틴어다. ‘호모 스파티움‘을 번역한 ‘공간 인간‘이 이 책의 제목이다. - P9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이야기를 상상하고 지어내 믿는 능력이 뛰어나며, 그 능력이 인간 사회를 커다란 규모로 키울 수 있게 했고, 큰 집단의 규모가 인간의 경쟁력이 되었다 - P9
뇌에서 신피질의 부피가 클수록 사회를 구성하는 친구를 많이 만든다 - P10
인간 한 명이 만들 수 있는 친구의 숫자는 150명 정도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까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규모는 150명이다. - P10
과거에는 전쟁으로 사회 내부를 규합했다면 현대 사회는 각종 프로 스포츠를 통해서 외부에 적을 만듦으로써 내부 사회를 규합한다. 국가 의식을 고양하는 가장 효과적인 스포츠 이벤트로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있다. - P11
서로 협업하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역사 이야기, 음악, 그림, 스포츠 등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건축 공간은 사회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다. - P11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집단의 블록들은 건축물이 만드는 공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들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하고 진화해 왔다. - P12
자동차, 비행기, 스마트폰은 인간이 공간을 축소 확대 및 변형해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다. 이렇듯 우리는 사물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의 시공간을 확장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공간을 조정해서 사람 간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도구이자 장치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모이면 사회가 된다. 인간은 그렇게 건축을 이용해서 사람 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사회관계를 구성한다. - P12
인간은 새로운 기술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을 통해서 진화해 왔다. - P13
역사가이자 문명 비평가인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같은 부류의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충돌‘의 관점에서 읽어낸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키워드로 읽는 토인비의 관점은 제약이 나타나면 갈등이 생겨나고, 그 갈등을 창조적으로 이겨 낸 소수의 창조자가 그 위기를 극복한다고 말한다. - P14
복잡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회는 그 물건을 만드는 협업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이는 건축물에도 적용된다.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는 사회는 엄청나게 고도화된 조직사회다.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사회가 제국을 만들고, 강력해진 제국은 주변을 정복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된다. - P16
소프트웨어인 종교, 민족, 국가 같은 이야기는 더 큰 사회를 조직한다. 동시에 하드웨어인 복잡한 물건, 건축, 도시도 사회를 정교하게 조직화한다. - P16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유전자를 보완할 수 있는 이성을 만나서 업그레이드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만들려 한다. 자연은 이들의 유전자 조합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서 암수 두 종류의 성을 만들었다. DNA는 이종교배를 통해서 숙주를 계속 진화시켜 왔다. 인간과 건축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DNA고 건축이 숙주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숙주인 건축을 진화시키고 재생산한다. - P17
생명체는 진화 초기에 꽃병 같은 모양의 세포 덩어리인 해면동물에서 시작해 수억 년을 거치면서 자포동물, 연체동물, 척추동물로 진화하였다. 마찬가지로 건축도 주어진 환경에 맞추면서 진화해 왔다. 해면동물이 동굴이라면, 척추동물은 엘리베이터 코어가 있는 마천루 건물이다. - P17
각 시대에 맞추어서 진화해 온 건축물들의 목적은 하나다. ‘이기적인 인간‘을 다음 세대에도 이어서 살리기 위한 진화의 몸부림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대표적인 ‘건축 숙주‘는 아파트다. 아파트 숙주는 아주 효율적이었기에 지나칠 정도로 엄청나게 번식한 거라 볼 수 있다. - P17
복잡한 형식의 건축물들은 환경에 반응해서 발생한 혹은 발명된 결과물이다. - P18
역사 속에서 인류는 건축 공간의 혁명으로 집단의 규모를 키워 왔다. 물론 이 규모의 성장이 건축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종교, 왕정, 민주주의, 자유 시장 경제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이유에 의해서도 규모가 커졌겠지만, 건축적인 하드웨어가 받쳐 주지 못했다면 그 조직은 쉽게 와해됐을 것이다. - P19
건축과 그 건축이 만드는 공간은 사회의 조직을 견고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건축은 사회의 규모를 증가시키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해 주는 하드웨어다. 건축의 혁신은 그 사회의 혁신으로 이어져 왔다. - P19
아리 투루넨과 마르쿠스 파르타넨의 저서《매너의 문화사》(이지윤 옮김, 지식너머)에 따르면, 예절의 일부는 본능에서 발현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인사할 때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구부리는 것은 우두머리 앞에서 자기 몸을 작게 만들어서 덜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 P20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고 신호를 만든다. 동물들의 각종 행동이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런 행동이 인간 사회에서 더욱 세련되게 진화된 것이 예절 혹은 매너라는 것이다. - P20
예절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을 높인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특히 인사성 좋은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데, 그것은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기에,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 P20
신체를 통한 동물적 본능의 의사소통이 예절과 매너라면, 그 같은 제스처를 더 큰 스케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건축 공간이다. - P20
본능은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강한 자와 물리적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행동 양식을 발전시킨다. 인체 스케일에서 만들어진 일차적 양식이 ‘예절‘이고, 그러한 신체 행동을 만들어 주는 이차적 장치는 ‘가구‘고, 더 큰 스케일로 관계를 강압적으로 형성 및 유지하는 삼차적 장치가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이처럼 본능적 커뮤니케이션을 강화시키는 ‘장치‘다, 이런 장치가 잘 발달하면 불필요한 충돌이 줄어들고 사회가 발전한다. 예절을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기획된 공간 구조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예절이 강압되고 매너가 형성되고 ‘사회적 교육‘이 이루어진다. - P22
고고학자들은 몇몇 폐허와 화석들을 가지고 합리적 추리와 상상을 통해서 스토리를 완성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책에서 건축물이라는 물리적 흔적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추리하고 상상해 볼 것이다. 이 책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건축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건축 공간 발달사‘라고 할 수 있다. - P22
역사를 살리고 이어 가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희생 - P23
색다른 관점으로 조명하면 같은 시대와 사건에서도 다른 가치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 P23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인생의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관점이 없으면 자존감도 없다. 이 책은 나만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다. - P24
이 책은 건축을 통해서 성숙해져 가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시도다. - P24
그림에는 소실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림 안의 모든 선이 모이는 지점을 말한다. 그림의 역사를 보면 이 소실점이 그림 밖에 있느냐 아니면 그림 안에 있느냐가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나타낸다. - P41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시대의 그림을 보면 소실점이 없다. 이들의 그림에는 공간의 깊이감 없이 평평한 느낌이다. 왕이나 왕비 같은 중요한 사람은 크게 그리고 노예는 작게 그린다. 그러다가 서서히 공간감이 생겨나게 되면서 소실점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 P41
르네상스 초기의 그림을 보면 소실점이 있어도 그림 바깥에 있었다. 이후 부르넬레스키에 의해서 투시도 기법이 완성되면서 소실점이 그림의 내부에 놓이게 되었다. 캔버스 안의 모든 선은 소실점을 중심으로 정렬하게 됐고, 소실점을 중심으로 투시도가 그려지게 되었다. - P41
소실점이 그림 내부에 있다는 이야기는 그림을 그리는 1인칭인 화가가 그림 구도 안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장악했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 주변 세상을 재정립해 보는 자기 주도적인 시각의 시작이다. - P43
인류는 단어를 더 많이 만들고 사용하게 되면서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단어가 늘면서 더 똑똑해졌다. - P50
올라프 라더는 저서 「사자와 권력」(김희상 옮김, 작가정신)에서 죽음과 권력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죽은 자의 시신을 차지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책은 로마의 카이사르 이야기를 실례로 든다. - P56
올라프 라더는 정치에서는 항상 누군가의 죽음을 차지하는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 P57
사람은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슬픔이나 자책감을 느끼면 그 감정의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게 된다. 이때 시체를 차지한 사람이 그 부정적 감정의 책임은 자신의 반대 세력에게 있다고 지목한다. 대중은 분노하며 규합되고, 누군가는 정치적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항상 자신과 상관없는 자의 죽음도 항상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래 왔고, 우리나라 현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 P57
거사를 앞둔 정치가들이 항상 무덤의 공간인 현충원에 들러서 참배하는 것도 죽음을 이용해서 자기가 권력을 가지는 것의 정당성을 보여 주는 퍼포먼스다. - P57
오바마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후 시신을 바다에 버려서 수장했다. 그의 시신 중 일부라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정치적 구심점이 되고, 그 조직은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 P57
올라프 라더는 그의 책에서 정치적 구심점을 만들어 권력을 쟁취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먼저 죽은 자를 신격화하고 무덤을 성대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 예를 찾는다면 종갓집 사당과 제사 예식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정치 공학으로, 고대에도 같은 이유로 고인돌 무덤과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자들은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서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괴베클리 테페‘도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 P58
회사는 이름을 만들고 로고를 만들고 사옥을 짓는다. 로고나 사옥 모두 집단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장치다. - P64
이대열 교수의 《지능의 탄생》(바다출판사)이라는 책을 보면 생명의 복잡한 구조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메커니즘이 분업과 위임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다세포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가장 놀라운 일은 체세포와 생식세포 사이에서 일어난 분업이라고 말한다. 번식 기능을 생식세포가 완전히 도맡아 하게 됨으로써 체세포는 번식 이외의 모든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세포는 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복제‘라는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은 생식세포에게 일임한 것이다. - P67
건축의 가장 근본은 주거를 담당하는 ‘집‘ 이다. 하지만 인류가 진화하면서 건축에서 주거 기능 이외의 다른 건축물이 생겨났다. 그것이 장례식을 담당한 ‘괴베클리 테페‘다. ‘괴베클리 테페‘는 추위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축물이 아니다. ‘괴베클리 테페‘ 같은 종교 건축물은 인간 사회의 규모를 키우는 데 필요한 건축물이다. - P67
집은 기본적 생존 기능을 담당하는 체세포와 같고, ‘괴베클리 테페‘ 같은 종교 건축물은 사회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생식세포와 같다. - P68
생명체 진화 초기에는 RNA만으로 생식하였다. 한 줄의 유전 코드로 만들어진 RNA만 가지고는 유전 정보를 다음 세대로 안정적으로 전달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생명체가 DNA라는 자신의 짝을 만들었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DNA 나선형 구조가 만들어지자 유전 정보를 다음 세대에 안정적으로 전달시킬 수 있게 되었다. DNA가 만들어진 후부터 RNA는 주로 DNA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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