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 일일이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소설 속 화자인 인영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1살 때는 자신의 친언니였던 민영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아픈 기억이 있다. 또한 친언니인 민영의 죽음으로 인해 인영의 어머니는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민영의 사고 후 15년 정도를 더 살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만약 내가 인영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 인영은 외로움 속에서도 멘탈을 잘 잡고 결코 쉽지 않은 세상살이를 나름대로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한편 앞선 포스팅들에서 언급되었던 의선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포스팅에 일일이 적진 못했지만 의선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인영 못지 않은 가족사가 있었던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과거 인영이 의선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불쌍히 여겨서 품었다가 더이상 의선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느낀 나머지 이제는 의선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면 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처음에 인영이 의선을 품었던 것은 뭔가 자신과 비슷한 동질감 같은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가족사가 약간은 다른 듯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감의 무게라는 건 누구에게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인영도 결국 그 무게를 더이상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의선이 이제 자기 곁에서 떠났으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경제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명윤에게 의선이 스스로 떠났다고 말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애써 믿어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선이 떠나는 순간을 꿈꾸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삶에 뛰어들어 왔듯이 갑자기 떠나주기를, 그래서 나를 더이상 분열시키지 않기를, 불가해한 죄의식과 연민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녀의 알 수 없는 간절함을, 마치 그 간절함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가냘픈 얼굴을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그런 식으로 내 삶을 그늘지게 한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 P431

나는 외로움이 좋았다. 외로움은 내 집이었고 옷이었고 밥이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외로움이 완성시켜준 것이어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만다. - P431

나는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해보려 한 적이 있지만, 내가 허물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때마다 뒤로 물러서곤 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외로웠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새삼 그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느니 마느니 하는 자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 P431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바에야, 내 배반을 진작부터 명징하게 점치고 있는 바에야,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P431

나는 징그럽게 차가운 인간이었다. - P431

나의 내면은 끊임없는 배반과 이기심으로 서서히 분열되고 있었다. - P432

빛깔 때문에 분별하지 못했던 짐승이 다가오는 것을 나는 마침내 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목이 잘룩하고 다리가 가느다란, 자그마한 사람의 몸집만한 짐승이었다. - P438

그 짐승이 거의 구별 없이 어둠에 뒤섞여 있었으므로 나는 그얼굴이나 눈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것과 나의 시선이 얼핏 허공에서 만났다. 찰나 길쭉한 다리가 유연한 걸음으로 겅중겅중 움직였다. 아궁이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그것의 몸이 비껴졌다. 나는 어둠에 멀어버린 듯한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438

강원도에 사향노루가 자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천연기념물이라고 했다. 약재로 모두 잡아가는 통에 극소수만 남아 있다고도 했었다. 저렇게 검은 짐승이라면 그것뿐일 것이다. - P438

해가 가고 있잖아. 조금 있으면 연들이 날아와. - P444

올겨울에는 그리로 돌아갈 거야. - P445

누군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거칠고 탁한 숨결이 그의 귓속을 불쾌하게 넘나들었다.
너는 그애를 잃을 거야. 그애는 한갓 노래가 될 거야. - P445

난 거기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떠날 거야. 아주 멀리 갈 거라구. 소식 전하지 않을 거야. 세상 끝까지 갈 거야. 그때쯤 나는 눈이 멀어 있겠지. 목구멍도 말라붙어 있을 거야. 어떤 말도 나한텐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때에야 내 삶은 완전해질 거야. 완전하게 비어버릴 수 있을 거야. - P446

아무래도 이상했다. 의선의 얼굴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가다가 명윤은 소스라쳤다. 그녀는 명아였다. 아홉 살짜리의 조그만 체구에 얼굴에는 진한 화장을 했다. 화장독이 퍼렇게 오른 밤을 일그러뜨리며 명아는 웃었다. 때투성이 쥐색 원피스를 입고 명아는 한 발 한 발 그에게 다가왔다. 명윤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가파른 계단을 헛디뎠다. - P446

명아가 까닥까닥 흔드는 오른손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바닥을 살피자 명아의 학생용 단화 옆에 부러진 새끼손가락이 뒹굴고 있었다. - P447

의선의 반지하방에 인영이 서 있었다. 인영은 처음 보는 검은색 긴 코트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인 인영은 의상 때문에 더 후리후리해 보였다. 인영의 손에는 의선이 빚은 토우들이 들려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인영은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 P447

그애한테 뭘 줄 생각이냐?
인영의 말씨는 사납고 단호했다.
네 남루한 생 말고 뭘 줄 거냐? - P448

"쉬면 땀이 식어서 더 못 가게 돼. 천천히라도 계속 움직여야 해." - P452

거기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 P458

・・・ 거기로, 갈 수만 있다면 가져가려고 했는데. - P459

그래, 결국 넌 이곳에 왔다가 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갔다. 나처럼. - P460

그래, 돌아오지 마라.
차라리 돌아오지 마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말아라. - P460

그렇게 멀리 가지 마.
그렇게 빨리 가지 마.
조심해, 그렇게 가지 마! - P461

침묵은 밝았다. 사람의 살처럼 따뜻했다. - P463

기억은 왜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몰아닥쳤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너무 빨리 돌린 영화 화면처럼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갈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숨을 쉴 수가 없다. - P465

사라져버린 기억의 그림자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그 짐승이다. 흉흉한 밤의 꿈에도, 환한 낮의 풍경 속에서도 짐승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뿔과 이빨까지 검은 사슴이다. - P465

소스라치거나 도망치지 않고, 떨면서 천천히 그 사슴이 이끄는대로 기억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어렴풋한 기억의 단편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들에 매달려야 한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오랫동안 들여다보아야 한다. 서서히 한순간이, 한나절이, 그리고 한 밤과 낮이 떠오른다. 그렇게 계속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계속하면 다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휘몰아쳐오고, 그러면 다시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한나절의 기억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그것을 곱씹고 생각해야만 한다. - P466

.......저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걸요. - P466

……………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 P467

왜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디까지 가느냐는 말을 자꾸만 물을까.
그녀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을 떠날 때 그녀에게는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청량리역에서 매표원이 재차 행선지가 어디냐고 다그쳤을 때에야 흐릿하기 짝이 없는 본능에 가까운 기억이 이끄는 대로 황곡행 열차표를 끊었다. 황곡에서 월산행 버스표를 끊은 것 역시 그렇게 어슴푸레한 기억에 의지해서였다. - P468

열의 하나쯤이나 될까. 운좋게 암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도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햇빛을 받자마자 이 짐승은 순식간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눈부터 빨갛게 녹아버리는 거다.
이 웅덩이 물을 살쾡이란 놈이 무척 좋아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핥아먹어버리고는 한단다. 하지만 어쩌다가 낙엽 속에 숨고 눈 속에 묻혀 살쾡이의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있지. 계절이 바뀌고 한해가 가고 또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면서 그 웅덩이가 썩은 자리에 어느덧 연한 풀이 돋고, 자그마한 꽃들이 핀다. - P478

그게 붉은애기풀이란다. 푸른 잎 가장자리에 녹물 같은 붉은 기운이 돌고, 뿌리를 달여먹으면 미친병이나 어질머리병에 직효이고, 산삼 찾는 것보다 더 힘든 풀이야. 그걸 찾는 약초꾼들은 꼭 전날 밤 꿈에, 산신령 대신 그 짐승의 검고 흉흉한 형상을 보곤 한다........ - P479

완전한 형태로 기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일기는 최대한 간결한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했다. 또한 그 문장 안에 그날 그녀가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어야 했다. - P495

그녀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짧은 삶을, 단 몇 마디로라도 압축하여 말하고 싶었다. - P497

그 압축한 말을 바다 사진을 가진 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언니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여주고, 사적인 이야기를 묻고 때로 들려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 마지막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언니여야 했다.
그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여남은 줄로 요약하는 작업에 그녀는 골몰하기 시작했다. - P497

나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났어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밝은 햇빛은 고작 다섯 시간밖에 들지 않고, 늘 저물녘처럼 그늘진 마을이에요.
약초꽃 피는 때 산으로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어머니는 떠났지요. 어머니를 찾아나선 아버지는 겨울 내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 P498

열세 살에 그곳을 떠났어요. 그뒤로 돌아가본 적이 없어요.
나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어요. 황곡 시내의 중학교 교무실에서 사환으로 반년을 일한 적은 있어요. 그곳에서 여비를 모아 서울로 왔어요. 서울 와서는 이 년 동안 야구잠바 소매만 박았어요. 주방에서도 일해보고 홀 심부름도 해봤어요. 하지만 학교는 가지 못했어요. 회사 사람들에게는 검정고시를 보았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 P499

작업이 실패할 때마다 그녀는 절망했다. 그러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채이며 문장들을 만들었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목젖을 밀고 올라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문장들은 점점 헝클어졌다.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절제는 사라졌다. - P501

스타킹이, 구두가, 블라우스와 속옷까지 살갗을 옥죄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걸으면서 조끼를 벗고, 블라우스를 벗고, 치마를 벗었다. 스타킹과 구두까지 벗어던졌다. - P504

알몸에 쏟아지는 햇살의 감촉은 뜨거웠다. 반면 바람은 부드럽고 서늘하게 그녀의 목줄기와 마른 젖가슴을 휘감았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달리는지 그녀는 몰랐다. 맨발에 닿는 보도블록이 따뜻했다. 그 감촉이 좋아 그녀는 느닷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벌거벗은 몸뚱이를 어지럽게 휘감는 바람의 황홀한 감촉을 느꼈다. 마치 남의 몸에서 나온 것 같은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녀의 뜀박질이 빨라졌다. - P505

그녀는 더 많은 빛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오로지 피부에 부딪히는 빛의 감각에 의지하여 그녀는 숨차게 달려나갔다. 허파가 터질것 같았다.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 P505

그녀의 맨발이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을 밟았다. 그녀의 허리가 고꾸라졌다. 어둠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찢어지는 비명이 목구멍을 뚫고 뛰쳐나왔다. - P506

몸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낯선 음성이, 출렁이는 무수한 어둠의 덩어리들 속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도 노래도 아닌 그 가느다란 소리가 빈 바다의 번득이는 포말들 위로 산산이 흩어져 박혔다. - P507

그래, 내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 P524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무렵부터 장이 사진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장은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 P528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장은 결코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는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 P529

떠난 사람은 떠난 채로 두어야 한다 - P534

다 끝났다.
그가 기다렸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P536

조금만 더 버텨라.
조금만 조금만 더 나아가라. - P541

나 때문이다. 내가 옆에 있어야 했다. 끝까지 있어야 했다.
명윤의 얼굴은 여전히 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밤 의선을 따라나섰어야 했던 것처럼, 따라나서서 그 바보같은 목욕 바구니를 뺏어들고, 떨고 있는 어깨를 안고 돌아왔어야 했던 것처럼, 나는 그의 옆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 P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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