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많은 것을 보여줄 때가 있지요. 표정과 제스처로 숨길 수 있는 것들을 뒷모습은 고스란히 노출시킵니다. - P328
세상의 가장 밝은 것들이란 그렇듯 다시 볼 수 없는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었을까요. - P338
마음보다 먼저 몸이 기억하는 일도 있는가 봐. 내가 당신을 기억할 때면 온몸의 구석구석이 저리고 손가락 뼈마디, 목덜미의 솜털 끝까지 아파오는 것처럼. - P351
당신이 그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한번 외로운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사람이라고. - P359
......사람을 냉혹하고 비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해. 몇십 년이 걸릴 것 같지? 최소한 오륙 년은 걸릴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이삼 년이면, 빠르면 육 개월이면....... 사람에 따라서는 집중적으로 두세 달이면 끝나. 어떻게 하느냐면, 그를 바쁘게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수십년 동안의 잠에 곯아떨어지고 싶어 할 만큼 피로하게 하고, 그러나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게 하는 거야. 쉬더라도 고통스러울 만큼 아주 조금만 쉬게 하고,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굴욕당하게 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하는 거야. - P362
사람은 자신이 가장 고통받은 곳을 사랑하게 마련이라고 하지. - P367
아무것도 들쑤시거나 캐어내서는 안 돼. 들쑤시고 캐어내지 않은 그 뜨거운 불길들이 어느 사이에 열기와 숨막히는 황냄새를 버리고 순연한 빛 덩이로 떠오르도록 하는 거지. 고통이 뷰파인더와 내 몸뚱이를 관통해 맑은 슬픔이 되는 절차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격렬한 마음이 차츰 슬퍼지고, 애절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스러워져서, 어느덧 당신으로부터 묵묵히 떠나갈 것처럼. - P371
죽음과 소멸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이데아의 세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그 기척과 온기에 기대서만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붙들도록 했다. - P386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짐승의 세계 속에 뒤섞이는 일 - P388
풍을 맞았다 일어나 다시 걷게 된 어머니의 불화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붓놀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어머니가 도달한 그 무연한 자리는 정신을 단련하고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초월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몸의 반복되는 움직임 끝에 몸이 시키는대로 저절로 이르는 자리다. - P389
손으로 주무르듯 애써 뭔가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눈과 비를 온몸으로 맞듯 모든 절망을 있는 그대로겪어내면서 여자는 비로소 아기 부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P390
도처에 소멸이 자리해 있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영원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 P393
‘지금‘과 ‘영원‘이라는 시간이 무언가 사라져버리는 감각 안에서만 마주하게 되는 것이라면, 소멸하는 무엇도 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 P393
무심함이 주는 투명함은 힘이 세다. - P395
동물과 식물의 세계가 각각 산문과 시의 세계로 등치되는 지점이 있다면, 식물이 실어(失語)의 세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 P398
인간에서 식물로 변하겠다는 불가능한 꿈. 그것은 분명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에 맞닿아 있는 너머의 세계, 신화의 세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란 한 사회의 질서와 기준들에 부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규범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에 언어의 이전이나 이후의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 P399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은 세속적인 현실을 손쉽게 초월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어떤 면들을 끝까지 거부하며, 치열하고 고요한 내적인 투쟁 안에 자리하는 것이다. - P399
동물성과 식물성을 구분하여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와 직결시키는 것은 가장 위험한 독해가 될 수도 있다. 자칫 익숙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반복함으로써 그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 P399
식물로의 변신은 생태계의 피라미드 안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받은 상처에 매몰되거나 화해하며 포용하는 대신, 상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어떤 상처도 입힐 수 없는 존재로 변하는 일이다. 들뢰즈가 읽어내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따르면, 이는 무능력한 슬픈 정념이 아니라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 P400
순간순간 차고 깨끗한 물처럼 정수리부터 적셔오던 충일, ‘그것‘과 바로 잇닿아 있다는 선명한 확신. 이제는 글을 쓸 때 간혹, 일상 속에서는 아주 가끔 만날 뿐인 그 마음이, 그때에는 눈을 뜨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밥을 먹을 때나 걸을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그 마음은 그 자리에 있었다. - P402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데 칠 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 칠 년 동안, 내 세포들이 새것이 되었다. 내 눈과 귀와 코와 입술, 내장과 살갗과 근육들이 소리 없이 몸을 바꾸었다. - P402
다만 머무르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부끄러운 위안을 삼아보았다.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P403
나는 때로 다쳤다. 집착했고 욕망했고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배웠고, 점점 낮아졌고 작아졌고, 그래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래, 깊숙이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 P404
글쓰기는 나에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숨 쉴 통로였다. 때로 기적처럼, 때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내 귀를 끌고 갔다. 나무들과 햇빛과 공기, 어둠과 불 켜진 창들, 죽어간 것들과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보다 더 생생할 수 없었다. - P404
곁에 있어준 따뜻한 이들에게 고맙다. - P404
첫 단편집을 묶고 나면 그것이 매듭이 되어 다음 단편집이 변화한다고들 말한다. - P405
나는 나아가고 있다. 조금씩 몸을 뒤채이며 달팽이처럼 전진하고 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 속도와 힘으로.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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