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혜의 언니 인혜는 동생인 영혜가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관계로 생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정기적으로 병문안을 온다. 하지만 병문안을 올 때마다 점점 더 이상하고 기이한 행동과 말을 반복하는 영혜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진다.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와 같은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미 상황이 벌어진 지금 시점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인혜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머지 그런 생각으로라도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독자인 내가 인혜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인혜와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했을 것 같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그렇고 현실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게 마냥 편하게만 흘러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은 걸 보면 정말로 한치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P232

그는 비디오 속에 그토록 많은 날개 있는 것들을 집어넣었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가장 필요할 때 날아오르지 못했다. - P234

그녀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 - P234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 P234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간 것뿐이야...... 더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거기 서서 기다린 것뿐이야. - P235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수밖에 없거든. - P236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 P23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 P237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P238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팬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그러고 난 아침식탁에서 무심코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어지거나,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지곤 했다는 것을. - P240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었다.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었다. - P240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 P242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 P242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42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P244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ㅡ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ㅡ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 P246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 P246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 P247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 P249

이제는 더이상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 P250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 P259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61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도, 도움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소리없이 우는 것이다. - P265

그냥 꿈이야. - P265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P266

영혜는 피를 토하는 대신 눈을 뜬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본다. 저 눈 뒤에서 무엇이 술렁거리고 있을까. 어떤 공포, 어떤 분노, 어떤 고통이, 그녀가 모르는 어떤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까. - P267

…………어쩌면 꿈인지 몰라. - P268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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