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는 천천히 목덜미를 쓸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말의 체온과 숨결을 더 자세하게 느끼기 위해 선배의 목소리를 따라 눈을 감고, 소리가 피부를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낮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경주마는 수명이 짧다. 선수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수명이 짧았다.
인간 역시 이따금씩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언제나 회생 가능했다. 하지만 말은 말 취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투데이의 병명은 퇴행성관절염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관절을 많이 쓴 결과였다. 연골은 소실되었으며 활막은 염증으로 가득 찼다. 지금쯤이면 걸을 때마다 뼈가 부딪치는 통증을 느낄 거였고 조금 더 지나면 골 미란이 진행될 것이다.
베팅금으로 마방세를 내지 못하는 말들은 얼른 방을 비워주어야 했다. 그래야 더 어리고 빠른 말들이 들어와 돈을 벌어다주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요, 달릴 때 저 애한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요. 무작정 빠르게 달리기 위해 다리를 뻗는 것이 아니라 그 발짓이 우아해요. 발레하는 흑조 같아요. 동물 흑조 말고요. 흑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요."
우아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보법 때문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흑진주처럼 빛나는 투데이의 검은 털 덕분이리라. 복희는 투데이가 달릴 때마다 요동쳤을 검은 물결을 상상했다. 그 역동적인 빛의 물결이 은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달릴 수 있을 거야." 부질없는 위로였다. 밧줄이 필요한 사람에게 휴지를 뽑아 내민 기분이었다.
"슬프지만 아무것도 못 해주는 주제에 슬퍼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그냥 보고 있어요."
극이 끝나면 우연히 만났던 두 사람은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앱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지난날을 굳이 수면 위로 올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얹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 사회가."
보호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유를 주다니. 복희는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겼다.
서울에 서울숲이 있고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듯이 지구에는 아마존이 있었고 동물들에게는 마사이마라가 있었다. 케냐에서는 마사이마라로 불렸고 탄자니아에서는 세렝게티라고 불렸다.
진화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보경은 단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느끼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싫었다. 그러니 모든 일은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버스를 놓치거나 영화 관람 시간에 늦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을 떨었을 뿐이었다.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숨통을 조이는 순간 분명 어느 한 곳이 짓무르기 시작할 거라고 믿었다.
정말로 다급하게 손을 뻗을 때에만 아이들의 SOS를 놓치지 않고 들으면 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리라. 섣부른 판단과 간섭은 아이를 답답하게 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무엇이든 더 생생해졌다. 상상도, 소리도.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설령 살이 찢길 정도로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서 있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보호자가 힘을 내야 합니다. 모든 병은 결국 병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 셋의 싸움이거든요.
긴 병은 가족 사이의 부채負債를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잖은 상처를 줬지만 그 상처를 해결할 틈도 없이 또 새로운 상처가 쌓였고, 이전에 쌓였던 상처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충분히 빚을 덜어낼 기회가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해 아주 처절하게 울었다.
그 일은 애초에 보경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탓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많았다.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삿대질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가락이 보경의 가슴을 찔렀다. 날카롭게 파고들어 기어코 상처를 덮어둔 가슴을 짓이겼다.
그날 이후로 보경과 은혜 사이에는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쌓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어서 결국 서로가 떠안고 있어야 했다.
조금만 게으르면 모든 걸 놓치는 시대가 아니던가.
역시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먼지가 금방 쌓였다.
또다시 저 박스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잊을 때쯤 찾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잊고 살리라 다짐했다.
속는 척했다. 속는 척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속아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유전성 질환인 푹스내피이상증으로 각막내피세포의 감소가 일반인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주원은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미안함이나 고마움 따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사람 사이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화음 같은 것.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엉망이지만 울면 더 엉망이 될 것이다. 시원하게 울었지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평생토록 울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우는 건 그만두어야 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속을 갉아먹고 얻은 힘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정한 말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상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그런 세상에 제대로 한 방을 날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을 때마다 분에 못 이겨 경마장을 찾았다.
투데이는 은혜만의 대나무 숲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비밀이 보장되는 유일한 속마음의 창구였다. 그런 투데이가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꾸역꾸역 참아내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보고 싶은데 꼭 이유가 필요해? 되게 이상한 걸 물어본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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