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른 책들을 읽다가 우선 순위에서 밀려서 한동안 읽지 못했었는데 드디어 다시 읽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독서노트 기록을 보니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읽는다.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과학분야의 연구가 예전과는 달리 제한된 영역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지적했었다. 이것은 이 책의 제목인 ‘통섭‘과는 반대되는 흐름인데, 이러한 흐름이 된 이유는 간단히 말해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이라고 했었다.

오늘은 지식의 대통합을 지향하는 ‘통섭‘에 역행하여 각각의 분야별로 파편화된 연구를 하게 되는 현실의 분야 중 예술분야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건축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20세기에 등장한 모더니즘도 전문 지식의 파편화를 드러냈다. - P90

조르주 브라크(George Braqu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조지 엘리엇(George Elliot),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 이른바 거장들의 작품은 너무나 진기하고 종잡을 수가 없어서 일반적으로 분류될 수 없었다. - P90

모더니스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새롭고 도발적인 것을 성취하려 했다는 것만 빼놓으면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이 강요하는 굴레를 찾아내어 의식적으로 파괴했다. - P90

많은 이들이 무의식을 탐색하기 위해 표현적 사실주의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사람은 과학자였을뿐만 아니라 문장가이기도 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였다. 물론 그 또한 모더니스트들의 대열에 당당히 낄 수 있다. - P90

정신분석은 모더니스트 지식인과 예술가로 하여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기도록 한 동인이었다. - P90

카를 쇼르스케(Carl Schorske)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모더니스트)은 모든 주제들을 "변화의 무자비한 원심 분리기" 속에 쑤셔 넣고 과거에 대한 20세기의 문화적 독립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들은 급진적인 기술적·정치적 변화의 세기에 동참하여 전적으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 했던 완전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 P90

계몽사상의 유산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인문학의 고삐를 풀어 준 이 낭만주의 시대의 자유 비행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지식의 통일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거의 꺼뜨리고 말았다. C. P. 스노가 1959년에 리드(Rede) 강연에서 말했던 두 문화, 즉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서로를 향해 입을 굳게 다물게 되었다. - P91

모든 운동은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는 이 극단의 지점에 서 있다.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열광적인 자기실현은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정치·사회학적 표현으로는 종종 포스트구조주의로 불린다.)을 불러왔다. - P91

포스트모더니즘과 계몽주의는 완벽한 상극이다. 왜냐하면 계몽사상가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지만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P91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정부 상태의 해적 깃발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는 반역자 선원들로서 과학과 철학의 전통적 토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들은 실재가 마음에 의해 구성된 상태이지 마음으로 지각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P91

구성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진짜‘ 실재는 없다. 즉 정신 작용의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가 없다는 것인데, 놀랍게도 이것은 사회적 지배 집단이 유포하는 견해이다. 이렇게 되면 윤리학도 확실한 토대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각 사회가 동등한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나름의 관례를 만들기 때문이다. - P91

이러한 전제가 옳다면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진리와 도덕이 모든 문화에서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정치적 다문화주의가 정당화되고 각 민족 집단과 그 공동체 안에서의 성적 기호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다. 이것은 관용(tolerance)의 차원을 넘어선다. 특정한 진리, 도덕, 성적 기호는 공공의 지지를 받는 것이자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져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도덕, 진리, 성적 기호가 사회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 P92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 문단에서 언급된 구성주의 전제들이 참이라면 이런 결론도 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지자들은 그 전제들을 참이라고 믿는다. 아니, 참이어야 된다는 식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이 편협한 행위이며 곧 중대한 범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보편 진리 금지령을 무시하고 모든 이들이 받아들이는 공동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웬 루소의 부활인가! - P92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 비평 기법인 해체주의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작가들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 고유한 것이고 그 기저에는 모종의 전제들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진정한 의도뿐만 아니라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그 무엇도 신빙성을 획득할 수 없다. - P92

작가의 텍스트는 비평가의 머릿속에 있는 유아론(唯我論) 적 세계에서 유래된 신선한 분석과 논평에 열려 있다. 그러나 비평가 또한 해체주의의 적용을 받고 비평가의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무한 소급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해체주의의 창시자인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II n‘ya pas de hors-texte.)"라고 말했을 때 의도한 바이다. - P92

만일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가 옳다면 내가 파악한 그의 결론이 정말로 그가 의도한 결론인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역으로, 만일 내가 파악한 것이 그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다면 그의 논증을 더 깊이 고려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 P93

내가 "데리다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 퍼즐은 크레타인의 역설(어떤 크레타 인이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 P93

데리다의 현란한 몽매주의적(obscurantism, 몽매주의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고의로 의미를 애매하게 하는 표현주의 사조를 일컫는다.) 진술들을 볼 때 그가 과연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그리 분명치 않다. 어떤 이들은 그의 글이 의도적으로 일종의 농담, 즉 실없는 말을 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P93

그(데리다)의 새로운 "과학" 인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실은 과학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진부함과 환상을 동시에 가진 비일관적 꿈들의 단편이다. 그것은 문명세계의 다른 곳에서 발전한 마음과 언어의 과학에 대해 마치 췌장의 위치도 모르는 심령치료사처럼 무지하다. 그는 이런 일종의 태만함에 대해 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P93

어쨌든 그(데리다)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책과 글쓰기의 적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던 루소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악몽이다. 당신은 나 역시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한다. 나는 내 꿈이 꿈이라 말하며,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판명될지 모르는 것들이 그 꿈속에 있는지를 독자들이 찾아내도록 남겨 둔다." - P93

깨어 있기에, 깨어 있는 동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유익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 P93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는 일종의 파괴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중력, 주기율표, 천체물리학을 포함해 외부 세계를 지탱하는 수많은 기둥들을 잠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하다. 더욱이 그들은 과학 문화가 앎의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며 특히 구미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쯤으로 여긴다. - P94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지학(theosophy,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 철학. 직접적 체험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일종의 신비주의이다.), 초월론적 관념론과 함께 역사의 골동품 창고로 내려 보내고 싶어 할지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주류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 이론(이론에 관한 이론)이다. 학자들은 이 기법을 사용해 과학 분야의 주제들을 분석하기보다는 특정 과학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사고하게 되었는지를 문화 ·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 P94

분석자는 과학자들이 이론과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지배 이미지, 이른바 "근원 은유(root metaphors)"를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P94

예를 들어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이 어떻게 현대 심리학을 지배했는지에 관해 케네스 저건 (Kenneth Gergen)의 설명을 들어 보자.

[개인 행위의 특성과는 상관없이 기계론자는 개인을 환경에서 분리한 후 환경을 자극과 입력 요소로 보고 개인을 입력 요소들에 반응하고 의지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또한 정신 영역이 (상호 작용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를 자극 입력에 통합될 수 있는 단위들로 분할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 P94

직설적으로 말하면 심리학이 자연과학이 될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방책으로 저건은 정신에 대한 덜 치명적인 근원 은유들도 제시했다. 시장, 극작법, 규칙 따르기 등이 그 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심리학이 생물학으로 짙게 채색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심리학 분야에서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양산될 것이다. - P95

포스트모더니즘은 대개 좌파 지향적인데 아프리카 중심주의, 구성주의 사회인류학, ‘비판적‘ 과학(사회주의), 근본주의 생태학, 에코페미니즘, 라캉의 정신 분석, 라투르 (Bruno Latour)의 과학사회학, 신마르크스주의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 해체주의 기법과 뉴에이지 전일론과 같은 혼란스러운 변이들이 그 주위를 맴돌거나 다리를 걸치고 있다. - P95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지자들은 난해한 전문어들을 남발하여 진영을 어지럽힌다. 물론 가끔씩은 멋진 용어들도 있기는 하다. 각자의 방식들은 17세기에 계몽사상이 폐기한 "두려운 신비 (mysteriumtremendum)"를 향해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당한 개인적 고뇌를 드러내면서 말이다. - P95

"서양 사상의 정점"에서 정치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훌륭하게 해석해 낸 후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 P95

푸코는 심원하며 가장 다루기 힘든 현대인의 정체성 딜레마와 맞붙어 싸웠다... 신도 자연법칙도 초월적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권력이 다양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기존의 모든 도덕을 타락시키고 심지어는 합법화해 왔다는 것까지 알아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떤 가치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인가? - P95

만일 어떤 철학적 입장이 혼란을 야기하는 동시에 후속 탐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 P96

우주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을 극복하고 나면, 지질학적시간에 걸쳐 인간 종을 탄생시켰으며 심오한 역사의 잔류물로 남겨둔 유전 규칙을 해독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유전 규칙을 해독함으로써 인간 두뇌가 터득할 수 있는 모든 의미와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 그리고 즐기고 싶은 모든 모험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 P96

이성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것이고 감정은 무제한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거짓과 참이 가려질 것이며 우리는 서로를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종의 일원이며 생물학적으로 유사한 두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P96

나는 두 종류의 독창적 사상가들이 늘 존재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들은 무질서를 보고 질서를 창조하려는 부류와 질서에 맞닥뜨려 무질서를 만듦으로써 이에 대항하려 했던 부류이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지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긴장이 지그재그형 진보를 통해 우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여러 사상들이 다윈주의적으로 서로 경쟁할 때 승자는 늘 질서의 편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P96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열광적 낭만주의의 현대적인 집전자로서 문화를 비옥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어쩌면 당신들이 틀렸을 거라고. 그들의 생각은 마치 계속 타오를 에너지도 없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불꽃놀이의 불꽃과도 같다. 하지만 몇몇은 수명이 충분히 길어 예기치 못한 주제에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이 점이 포스트모더니즘이 합리적 사고를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게 생각할 만한 한 가지 이유이다. - P97

또 한 가지 이유는 거추장스러운 과학 교육을 받지 않기로 선택한 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위안이 된다는 점이다. 철학과 문학 진영에 작은 산업이 형성된 것도 긍정적 요소일 수 있다. - P97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전통 학문에 대해 굴복할 줄 모르며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같은 반란자들이 항상 필요하다. 적대 세력의 공격을 끊임없이 방어하는 것보다 지식을 강화하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적이 없으면 교사와 학생이 모두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린다고 말한 바 있다. - P97

만일 모든 근거와 이유가 땅에 떨어져 바퀴의 고정 핀이 떨어져 나가고 모든 것이 인식론적 혼돈으로 빠져든다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옳았다고 인정할 용기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몽사상 최고의 정신에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가 계몽사상으로 표출된 인간 정신의 일부를 잘 포착해 말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우리는 알게 될 것(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이기 때문이다. - P97

우리는 알아야 하며 알게 될 것이다. - P97

오늘날 인간성(humanity)을 구분하는 가장 커다란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 간의 차이도 인종 간의 차이도 아니다. 심지어 통념처럼 교육의 여부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 문화와 과학 이전 문화 사이의 간극이다. - P99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축적된 지식과 도구가 없다면 인간은 인지의 감옥에 갇히고 만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그림자가 드리운 깊은 연못에서 태어난 지적인 물고기와 같다. - P99

인간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물과 그 위에 있는 태양과 하늘 그리고 별의 기원에 대해서 독창적인 사유와 신화를 만든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은 틀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단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세상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 P99

과학은 철학도 아니고 하나의 신념 체계도 아니다. 과학은 실제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학은 우리가 역사적 전환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 계몽의 문화이며 교육받은 사람들의 습관이 된 정신 작용의 복합체이다. - P100

실험 과학을 통해 인간은 오감의 제약에서 벗어나 물리적 실재를 탐지하는 능력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예전에는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 P100

우리는 더 이상 가시광선만이 우주의 유일한 빛 에너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과학 이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이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파장의 빛을 그 양에 있어서 다르기는 하지만 매일 쬐고 산다. - P100

사실 가시광선은 그보다 몇 조배만큼 짧은 감마선에서 몇 조 배 긴 라디오파에 이르는 스펙트럼 중에서 단지 400~700나노미터 정도의 파장을 가진 빛일 뿐이다. 즉 광대한 전자기 복사 중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 P100

인간 눈의 망막은 단지 400~700나노미터에 해당하는 빛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다른 장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리의 두뇌는 가시광선만이 존재한다고 결론내린다. - P100

오히려 동물들이 우리보다 빛에 대해 더 잘 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각 세계에 살고 있다. 즉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각 스펙트럼 중 어떤 부분은 감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시각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민감하다. - P100

나방은 꽃잎에서 반사된 자외선(파장의 길이가 400나노미터 이하)의 패턴에 따라 꽃가루와 과즙원을 정확하게 집어낸다. 우리는 노란 꽃과 하얀 꽃을 볼 뿐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점들과 밝고 어두운 동심원들을 본다. 식물 진화의 산물인이 패턴들은 가루받이 곤충을 꽃밥과 과즙원으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 P101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도 나비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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