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Part 1 관계의 언어 중에서 ‘연애의 균열‘ 이라는 제목의 글부터 읽는다. 지난번 포스팅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생각하는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데 그 한 문장 한 문장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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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들에 내재된 뜻을 좀 더 깊이있게 들여다 보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그 이면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첫사랑이 아픈 이유는 돌아보며 참고할 연애의 데이터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 정보 없이 맨 마음으로 부딪히는 인생 단 한 번의 연애, 첫사랑. 만개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피어낼 줄만 알았던 순진한 처음.

보통의 흐름은 이렇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짝사랑의 고통‘, 여명의 빛이 트이는 순간 같은 ‘썸의 시기‘, 마침내 입 맞추는 장면에서 멈춰버린 드라마 같은 ‘연애의 시작‘, 적당히 흥이 나고 적당히 분위기 있는 미디엄템포의 노래를 닮은 ‘안정기‘. 이어서 감각으로 먼저 느껴지는 가을을 닮은 ‘이별의 징조‘, 가장 익숙했던 것들이 가장 슬픈 것들로 바뀌어가는 ‘이별‘. 한때는 상대에게 제일 소중했던 내 감정 혹은 상대의 감정이 거추장스러워져버리는 초라한 한 사람만의 시간.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애는, 두 우주가 만나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우주다.
당연히 완전히 다른 생태계의 법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덜 상처받고 더 사랑받기 위해 죽어버린 지난 우주의 검색창을 뒤적인다. 검색의 행위가 지나치다 싶을 때, 연애는 어김없이 삐걱거린다.

연애에 균열이 생기는 가장 잦은 이유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의심은 공포스러운 순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사이렌 같아서, 학습된 것이 없이는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새로운 관계는 기차의 방향처럼 시간을 따라 앞으로 가고 있지만, 우리는 자꾸만 거기에 거꾸로 올라타 지나간 기억을 본다. 앞으로 펼쳐질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놓친 채. 마주 보고 앉아 다른 곳을 바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이 만든 새로운 우주는 생명력을 잃어간다. 결국 또 한 번의 아픈 기억, 그리고 반복.

나는 ‘사랑은 마주보는 일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마주 보며 시작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감은 오히려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감정서랍이 있다.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지라도,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어딘가에 저장이 된다.

감정의 서랍은 냉장고와 달라서 열고 닫을수록 풍성해진다. 비록 나의 경험치가 아닌 일임에도, 진심으로 내 마음속의 서랍을 열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향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민감한 편이라 ‘기 빨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가 끝난 후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였단 걸. 놀랍게도 그걸 인정하고 나자 많은 게 편해졌다. 괜스레 아는 사람이 겹치면 나오던 험담도 사라졌다.

나는 싫어한다는 감정을 두려움으로 오역한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단순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두려워서만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지 않나. 싫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것을. 다만 두렵다는 마음이 나를 쓸데없이 움츠러들게 하는 게 문제였다.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기도, 주기도 한다. 모든 걸 무난하게 중화하려는 습관이, 그 당연한 감정에 불필요하게 많은 이유를 주렁주렁 달아줬던 것 같다.

상대방의 프레임에 갇혀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단순히 그 사람이 싫다고 단정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혹시 당신이 예전의 나처럼 누군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당장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반드시 정교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냥 당신에게 해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냥 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 거라고.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또는 격앙된 목소리로 뱉는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은, 잦은 빈도로 누군가를 향한 비난을 내포한다.

"걔는 이해가 안 가"라는 말을 벌거벗기면 결국 그 말은 ‘걔는 잘못됐어‘ 또는 ‘개는 이상한 애야‘라는 의미더란 말이다. 그걸 느끼고 난 후부터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비좁은 경험치나 견해를 고백하는 걸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관점을 의심하면 또 다른 관점으로 어떤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확실히 나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견고히 해주었다.

때로는 관용적으로 쓰는 말들은 잘못 쓰인 채로 굳어진 근육 같다. 익숙해져서 더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지만,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상태∙∙∙. 습관적으로 툭툭 내뱉는 표현을 의심해보면 조금이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좋은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쉴 새 없이 자기의 단점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급적이면 좋은 걸 더 많이 보는사람은, 아마도 안에 좋은 게 더 많은 사람일 테다.

인간에게 ‘객관적‘ 시각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의 좋은 면에 투영시켜 좀 더 나은 세상을 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어느 정도의 뒷담화는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벤틸레이션(ventilation: 환기) 역할을 해주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대놓고 말하긴 뭐할 정도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뒷담화를 하는 데 지나치게 죄책감을 가질 바엔 차라리 시원하게해버리세요."

나는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 감정이 깃든 일에는 어느 정도의 룰이 있으면 좋다는 주의다.

나의 경우 뒷담화를 듣게 될 때 충분히 공감하며 듣되 그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겠다는 룰이 있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불만인 점들은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타당하나 내게는 개인적으로 타격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부적절한 것들에는 중독성이 있으며 중독성이 있는 것들은 습관이 된다는 사실이다. 최대한 멀리 하되, 부득이 이를 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나쁜 것들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굳이 상기하며 마무리짓는 것을 내 뒷담화의 룰로 정의해본다.

즉각적으로 그 모든 데이터가 도식화되지 않는, 그럼에도 드리우는 불길한 기운에 휩싸이는 현상을 우리는 ‘싸하다‘ 고 말한다.

잘못을 한 사람은 석고대죄라도 할 수 있지만, 잘못을 당한 사람은 사과를 받는다 하여도 그 사과가 소화되기까지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가 없다. 사과는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억울함과 분노는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라는 말은 말꼬리가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은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두는거라는 깨달음을 준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이며.

악플은 흡사 미세먼지와도 같다. 매우 유해하고, 늘 존재하지만, 딱히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

악플이란 건 잠복균 같은 거지, 즉발성 타격을 주는게 아니란 걸 알았다.

악플은 ‘표현의 자유‘라는 알량한 말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약해진 순간,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태에 숨통을 조여오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버리는 마음의 쓰레기 같은 게 악플일 테니까.

아쉬운 건 다정한 사람들은 말수가 적다는 거다.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게 익숙한 사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풀어헤치기보다는 품어 버릇하는 사람들. 이는 다정한 이들이 가진 특성이다. 굳이 어딘가에, 나의 마음을 글자로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혹시 악플에 상처받는 이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본 적이 있다면, 좀 더 요란스럽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말들을 써보기를 부탁한다. 그 한마디가 어쩌면 소중한 그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상처 난 곳은 움츠러든다. 생각하건대 어쩐지 마음에 난 상처도 그럴 것 같다.

세상이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가장 무용할, 그러나 사람들로 이루어져있기에 제일 필요한 것. 그게 ‘포장‘이 가진 철학이 아닐까.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다.

소중하다의 ‘소(所)‘는 ‘~하는 바‘, ‘~하는 것‘ 등의 의존명사 역할을 하고 ‘중(重)‘은 말 그대로 무거움을 뜻한다.

귀중하다는 것은 희소성 있고(貴:귀할 귀) 무거운 것, 즉 누가 봐도 그러한 것들에게 붙여지는 말이지만 소중하다는 것은 그와는 확실히 다르다.

소중한 것은 글자가 뜻하는 것처럼 힘을 들여 지켜야 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말로만 그것을 소중하다 칭한 채,
방치한다.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은 그것이 유한하기에 그렇다. 꽃을 보고 드는 반가운 마음은 이것이 곧 시들 것을 알기 때문이고, 청춘을 예찬하는 이유도 쏜살처럼 빨리 사라져버림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과 적응의 동물이기에 이 유한성을 잊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기에, 하루하루는 소중하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이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갈 것이다‘

기억이 가진 슬프고, 동시에 위대한 속성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흐려지고 잊어진다.

‘이별 그 자체보다 슬픈 것은 이별의 흔적조차 흩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종류의 통증은 인간의 간사함을 확인시켜준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이것만 벗어날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그 통증이 사라질 때쯤이면 아픔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통증은 한 큐에 마법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슴 한편이 아리는 종류의 이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랑이 너무나 특별하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픈 이별로 힘들다면, 그건 상처가 아니라 차라리 별이다. 시간과 중력에서 자유로워 언제나 우리가 올려다본 곳에 떠 있는 별.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을 잊어갈 것이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살아간다.

수줍은 부끄러움은 대책 없이 미소가 배시시 흩어지는 거라면, 수치스러운 부끄러움은 놓친 도시락 통에서 반찬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같은 거랄까.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 든다는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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