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앞서 유전자 복합체의 성질을 책의 페이지에 비유했었는데, 오늘은 그 비유에 약간의 수정사항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유전자 복합체가 갖고 있는 좀 더 세밀한 속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세부적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한 단계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인더에서는 한 페이지 전체가 삽입되거나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지만 한 페이지의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유전자 복합체는 뉴클레오티드의 문자로 이어진 긴 끈이기 때문에 페이지처럼 분명히 나뉘지 않는다. - P89

단백질을 지정하는 메시지에 쓰이는 것과 똑같은 네 알파벳 글자로 된 ‘단백질 사슬의 종결 메시지‘와 ‘단백질 사슬의 시작 메시지‘가 있다. 이들 두 개의 메시지 사이에는 한 개의 단백질을 지정하는 암호화된 설명서가 들어 있다. - P89

우리는 하나의 유전자를, 시작과 종결 메시지 사이에서 한 개의 단백질 사슬을 지정하는 뉴클레오티드 문자의 서열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스트론cistron이 이와 같이 정의된 단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와 시스트론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 P89

그러나 교차는 시스트론 간의 경계선을 고려하지 않는다. 시스트론 간뿐만 아니라 시스트론 내에서도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설계도가 각각 떨어진 페이지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46개의 두툼한 두루마리 테이프에 적혀 있는 것과 같다. - P90

시스트론의 길이는 일정치 않다. 어떤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끝나고 다음의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는 유일한 방법은, 두루마리 테이프에 적힌 암호를 읽고 ‘종결 메시지‘와 ‘시작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 P90

교차는 어머니 쪽의 두루마리 테이프와 그에 상응하는 아버지 쪽의 두루마리 테이프를 맞잡아 들고, 그것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든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서 바꾸는 것과 같다. - P90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단위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긴 세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로 정의한다. - P90

유전자는 복제 정확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라고 할 수 있다. 복제의 정확도란 사본 형태로서의 수명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다. - P90

나는 유전자라는 용어를 ‘상당한 빈도로 분리되고 재조합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 유전자는 내생적 변화율의 몇 배 내지는 여러 배에 해당하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선택이 편향적으로 작용하는 유전정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P506

유전자가 염색체의 일부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얼마나 큰 일부인가, 즉 두루마리 테이프의 얼마만큼을 차지하는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 P91

우리의 유전 단위가 어느 시점엔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소단위의 특정한 배열 (유전 단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배열이다)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 P93

어떤 개체의 자손은 하나의 계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는 것도 기억하자. - P93

유전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다른 개체도 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사본 형태로 이 세상에 여러 번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 P94

새 유전 단위가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방법은 전부터 존재하던 소단위가 교차를 통해 모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 드문 일이지만 진화상 매우 중요하다 - 점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점 돌연변이는 마치 어떤 책에 오자가 단 하나 있는 것과 같은 오류다. 그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유전 단위가 길면 길수록 그중 어느 곳엔가 나타나는 돌연변이로 그 유전자 단위가 변할 가능성이 크다. - P94

또 다른 드문 종류의 오류 또는 돌연변이에는 역위가 있다. 염색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가 거꾸로 된 방향으로 다시 붙는 것이다. - P94

양쪽이 모두 존재할 때만 이로운 효과를 내는 2개의 시스트론(상호 보완적이거나 서로의 작용을 증강시키는)은 아마도 역위에 의해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자연선택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 단위‘를 선호할 수 있고, 이 경우 그 유전 단위는 미래의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유전자 복합체가 여러 해에 걸쳐 이와 같은 방법으로 대폭 재조립되고 ‘편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P95

자연선택은 의태擬態 유전자를 선호한다. 이것이 의태擬態가 진화하는 과정이다. - P95

‘끔찍한 맛‘을 가진 나비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들이 모두 닮은 것은 아니다. 의태종이 그들을 전부 닮을 수는 없다. 맛이 없는 종 하나만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특정 의태종은 맛이 없는 종 중 특정 종을 흉내 내는 전문가다. - P95

실제로 역위와 그 밖의 우연한 재배열로 유전 물질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편집‘되어, 이전에는 마구 흩어져 있던 다수의 유전자가 하나의 염색체상에서 긴밀한 연관 집단을 이루었다. 이 집단 전체는 마치 한 개의 유전자인 양 행동하며 (실제로 우리의 정의로는 이제 이것이 하나의 유전자다)또 다른 집단인 ‘대립 유전자‘도 가지고 있다. - P96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제목은『이기적 시스트론』도『이기적 염색체』도 아닌,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토막과 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토막』이라고 붙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매력적인 제목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유전자를 여러 세대에 걸쳐 존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토막이라 정의하고, 이 책의 제목을『이기적 유전자』라고 한 것이다. - P97

유전 단위를 실제로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독립적인 입자로 다룰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은 그레고르 멘델 Gregor Mendel의 위대한 업적이다. - P98

유전자 입자성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노쇠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유전자가 백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백 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자기 마음대로 몸을 조작하며, 죽을 운명인 몸이 노쇠하거나 죽기 전에 그 몸을 버리면서 세대를 거쳐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 P99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다. 아니, 불멸의 존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유전 단위로 정의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는 수십 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전자의 기대 수명은 10년 단위가 아닌, 1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99

유성생식을 하는 종에서 개체는 자연선택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수명이 짧은 유전 단위다. 나아가 개체의 집단은 한층 더 큰 단위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체와 집단은 하늘의 구름이나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집합 내지는 연합이다. 진화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다. - P99

개체군은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지만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섞이면서 정체성을 잃는다. 또한 개체군은 내부적으로도 진화를 겪는다. 개체군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다른 개체군보다 선호되어 ‘선택될‘ 만큼 안정적이지도 않고 단위로 보기도 어렵다. - P99

유성생식은 자기 복제가 아니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으로 인해 오염되듯이 개체의 자손은 그 개체의 성적 파트너로 인해 오염된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절반밖에 안 되고, 당신의 손자는 당신의 1/4밖에 안 된다. 그리하여 겨우 몇 세대가 지났을 뿐이지만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해봐야 당신의 아주 작은 부분 몇 개의 유전자만 지닌 후손 여럿일 뿐이다. 비록 몇몇 자손은 당신의 성까지 물려받았더라도 말이다. - P100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 카드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 파괴되지않고 단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따름이다. 물론 유전자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 P100

유전자는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지만 다이아몬드와 다른 면이 있다. 다이아몬드의 결정은 원자들의 일정한 배열 패턴으로 그 존재가 지속된다. DNA 분자는 그와 같은 영구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물리적 DNA 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생명이 매우 짧다. 분명히 한 생애보다는 짧다. 아마도 수개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DNA 분자는 그 사본 형태로 1억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더욱이 원시 수프 속의 고대 자기 복제자와 똑같이, 특정 유전자의 사본이 온 세상에 퍼질 수도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복제자들은 모두 생존 기계인 몸속에 온전히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 P100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전자를 정의하는 속성은 유전자가 사본 형태로 거의 불멸이라는 것이다. - P101

우리는 자연선택의 실제 단위를 알아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선택에 성공하는 단위가 가져야 할 특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앞 장에서 썼던 용어로 말하면 그 특성은 장수, 다산, 복제의 정확성이다. 그러므로 ‘유전자‘를 간단히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 (잠재적으로라도) 가장 큰 실체라고 정의하자. - P101

유전자는 많은 사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장수하는 자기 복제자다. 그러나 무한히 사는 것은 아니다. 다이아몬드라 해도 말 그대로 영원하지는 않으며, 시스트론도 교차에 의해 둘로 갈라지는 경우가 있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충분히 짧은 염색체의 한 조각으로 정의된다. - P101

‘나쁜‘ 유전 단위가 ‘좋은‘ 대립 유전 단위보다 얼마만큼 쉽게 소멸할 것인가 - P101

실제 자연선택의 단위 중 가장 큰 것 - 유전자 - 은 보통 시스트론과 염색체 사이 중간 정도일 것이다. - P101

유성생식이든 무성생식이든, 유전자만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따라서 유전자는 진정한 자기 복제자이다. - P508

무성생식을 하는 대벌레의 경우 게놈(유전자 전체의 세트) 전체는 자기 복제자이지만, 대벌레 자체는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대벌레의 몸은 이전 세대의 몸을 주형으로 만들어지는 복사본이 아니다. 어떠한 세대에 있건 몸은 게놈의 지시에 따라 알에서부터 새롭게 성장한다. 게놈은 이전 세대 게놈의 복사본이다. - P508

이 책의 인쇄된 복사본들은 모두 같을 것이다. 이들을 복사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복제자는 아니다. 이들은 서로를 복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판본으로부터 복사되었기 때문에 복사본이다. 이들은 어떤 책이 다른 책의 선조라는 식으로 복사의 계통을 갖고 있지 않다. 만약 한 권에서 어느 쪽을 복사하고, 그것을 다시 복사하고, 그것을 또다시 복사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복사의 계통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쪽의 계통에서는 실제로 선조/자손의 관계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중간에 흠집이 생기면 자손들은 모두 이 흠집을 공유하지만 선조는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선조/자손의 계통은 잠재적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P508

유전의 ‘라마르크‘설이 잘못됐다고 하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실 - P508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에 대한 훌륭한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유전자의 잠재적 불멸성 때문이다. - P102

유전자는 생존을 놓고 그 대립 유전자와 직접 경쟁한다.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의 염색체 위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유전자풀 속에서 대립 유전자 대신 자기의 생존 확률을 증가시키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정의상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 P102

유전자가 세대를 통해 여행할 때 아무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울지라도 그것은 배 발생 과정을 제어하는 데 전혀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 - P103

유전자는 매우 복잡한 방법으로 서로 간에, 그리고 외부 환경과 협력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 P103

질산염이 없는 곳보다 있는 곳에서 밀이 더 잘 자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질산염 비료만으로 밀을 재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밀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종자, 토양, 햇빛, 물, 그리고 여러 가지 무기물도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 같은 요인들이 모두 같거나 약간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질산염 비료와 같은 거름을 주면 밀은 더 잘 자랄 것이다. 배 발생에서 유전자 하나의 역할도 바로 이와 같다. - P103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차이이고,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에 의해 제어되는 차이‘이다. - P104

하나의 유전자에서 그것의 대립 유전자는 치명적인 경쟁 상대지만 다른 유전자들은 온도, 먹이, 포식자 또는 동료와 같은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유전자의 작용은 이와 같은 환경에 좌우되며, 그 환경에는 다른 유전자도 포함된다. - P104

하나의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이 특정 유전자가 있을 때와 또 다른 유전자가 있을 때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몸속의 유전자 세트 전부는 일종의 유전적 풍토와 배경을 형성하며, 개개 유전자의 작용을 바꾸거나 그것에 영향을 준다. - P104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이긴 배에 있다는 것은 단지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 선수들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유전자다. 배에서 각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는 염색체상의 동일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대립유전자다. 노를 빨리 젓는 것은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바람은 외부 환경에 해당한다. 교체 선수 집단은 유전자 풀이다. 하나의 몸의 생존에서 모든 유전자는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 P105

정의상 행운이나 불운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라지는 쪽에 있는 유전자는 불운한 것이 아니라 나쁜 유전자다. - P106

자연선택은 역위에서와 같이 염색체 일부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유전자 복합체를 ‘편집‘하고, 이를 통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가까이 연관된 집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 P106

물리적으로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유전자들이 상호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음 세대의 몸속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유전자, 즉 유전자풀 내 다른 유전자 모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유리한 셈이다. - P106

어떤 유전자의 ‘환경‘이 대부분 다른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환경을 구성하는 유전자들 각각은 또 다른 유전자로 구성된 환경과 얼마나 잘 협력하느냐에 따라 선택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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