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조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누군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 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모든 의미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미드타운의 분주한 행인들 틈에 섞였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침묵 속에서 빙빙 돌고, 서성거리고, 다시 돌아가고, 교감하고, 눈을 들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슬픔과 달콤함만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다.
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해결책이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보자르Beaux-Arts 양식(19세기 중후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
"세상에, 얘야, 그림 속 벌거벗은 여자들이 진짜가 아니란 건 알잖아..."
"손은 호주머니 밖으로 빼둬야 한다고. 알잖아, 신사답게 말이야."
"그래, 그러는 널 뭘 하는데?" 조니가 말한다. "그 빌어먹을 조각상들이랑 수다나 떨면서 가만히 서 있는 것 빼고."
클립 온 타이(와이셔츠 가장 위 단춧구멍에 고리를 끼워 매는 간이 넥타이)
여기선 누구든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고 아무도 그런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는 그 나무의 가지만큼 뻗어나간다고들 한다. 그건 대중들이 알고 있는 미술관의 크기만큼 끝이 없는 공간을 전시관들 아래에 있는 두 개 층에 확보하고 있는 메트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재능 있는 경비원이라면 미술관 전체를 입체적으로 머릿 속에 떠올리며 어느 지하 화장실 앞에 섰을 때 아즈텍 신들이 머리 위에 있고, 그 위에는 세잔의 사과들이 있다고 알려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재능이 모자란 나는 이따금 목재 공방, 플렉시글라스 공방, 보존 작업 스튜디오와 수장고 그리고 무기류 수리실을 지나며 기상천외한 방향들로 방황하다가 우연히 찾은 계단들로 올라가서 이번에는 예술의 세계 어디쯤에 착륙하게 됐는지를 발견한다.
아프로퓨처리스트Afrofuturist(아프리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기술 과학적 상상을 접목하는 문화적 장르)
우리가 언제든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인 박물관
책으로 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 번 느낀다.
책 속 정보는 이집트에 관한 지식을 진일보시켰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의 파편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나를 멈추게 한다. 이것이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우리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다음으로 간단히 넘어갈 수 없다.
예술은 어느 주제에 관해 몇 가지 요점을 아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별들은 한자리에 선 관찰자의 주위를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회전하며 거대한 시간의 바퀴 또한 망자들을 처분하고,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사업가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도 없고, 추진할 프로젝트도 없고, 지향하는 미래도 없다. 이 일을 앞으로 30년 동안 한다 해도 아무런 발전이 없으리라는 이야기다.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누가 봐도 이 일을 하는 척만 하고 있었고 결국에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에서 교훈을 얻기보다 최면 같은 합리화의 안락함 속으로 후퇴하기를 택했다.
내가 만약 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틈틈이 내 생각들을 흐릿하게나마 적어두었을테고, 영감을 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해 글을 써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빅 리그였기에 내 생각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고 야망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었다.
동료들과 나는 일주일, 40시간 내내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사회의 사무실 관습에 따라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습에 따라 책상에서 책을 펼 수도, 머리를 식히는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모두가 그렇듯 인터넷을 뒤적이고 책을 읽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점점 진흙탕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래지 않아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게을러진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맨해튼 중심부를 발밑에 둔 번쩍이는 고층 건물의 권위 있는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마치 컴퓨터 게임에 불과한 것이었다. 받은 메일함, 보낸 메일함, 전송.
담배를 피우는 몇 분 동안만큼은 나는 허클베리 핀이었다. 세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깊고, 내 의견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강을 지긋이 바라보는 허클베리 핀.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아문-레Amun-Re(이집트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테베에서 숭배되던 바람과 공기의 신 ‘아문‘과 태양신 ‘레‘ 혹은 ‘라‘ 가 합쳐져 탄생한 신)
핫셉수트의 조각상은 원래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제트의 세계에 여왕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렇기에 더욱 더 그 무심함이 두드러진다.
스톡홀롬 증후군 (인질이나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공포나 증오가 아닌 애착이나 온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인 현상)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 할 삶에 적응해버렸다.
여신 이시스Isis (이집트의 아홉 주신主神 중 하나로 하늘의 신 호루스를 낳은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받들어진다)
애스터 코트는 명나라 학자의 정원을 미술관 내에 재현한 곳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
시각 예술은 그 획들을 화면에 잡아두며 끝나지 않는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너그럽게 느껴진다.
보는 이의 시점을 기준으로 풍경이 수평적으로 멀어지며 거리감이 생기도록 하는 원근 기법인 평원平遠
콜로폰Colophon(책 등의 간행본에서 출판한 때, 곳, 간행자 정보 등을 적은 페이지. 간기刊記라고도 한다.)
보통 나는 중국어 구절들에 시간을 전혀 할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로 형용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하고 또 너무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들이다. 이런 순간에 얼마나 많은 감각적인 경험이 언어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지 깨닫는다.
서예가들의 기술과 관록은 예술 행위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을 고도의 기교를 통해 보여준다. 빈 표면에 짙은 자국을 남겨 그것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은 그런 충동말이다.
‘비단에 수묵‘은 자비라고는 바랄 수 없는 재료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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