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게 되었다. 본문의 주요 배경이 미술관이다보니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예술 분야에도 얼마간의 배경지식을 얻어갈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단순한 배경지식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100자평과 리뷰들을 간단히 살펴봤다. 간혹 보이는 후기들 중에 전문가의 시각이 아닌 일반인의 시각으로 예술작품을 바라봐서 아쉽다는 식의 내용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각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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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의 어머니가 큰 아들의 죽음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 어디 막연하고 막다른 곳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해낼 수 있는 것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서 일하든 생각 없이 다니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해.

너와 나, 우리는 거장들과 함께 일하는 거야. 두초, 페르메이르,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모린Maureen형(두루 친절하고 인정을 베푸는 사람을 뜻하는 대명사)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재능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

수많은 방문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신비로운 감정에 반응 하는 것

위대한 책과 위대한 예술은 나에게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다가왔다.

소리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인식을 뛰어넘어 현실 세계에서 나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줄 언어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 공간들이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이제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망을 보는 것.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이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기나길게 느껴진 몇 분이 더 지난 후,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한다.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라는 이름도 ‘바닷물처럼 푸른‘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네투스venetus‘에서 파생한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가장 위대한 화가는 ‘티션Titia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다. 마치 물웅덩이와 적포도주를 섞어서 색을 빚어내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이 그려내는 광경을 장미빛으로 감쌌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 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작품이 내 안에 불러 일으키는 감각

살아 숨 쉬는 기억, 살아 숨 쉬는 마법, 살아 숨 쉬는 예술... 뭐라 불러도 좋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고,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영혼이 그랬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 말이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수난‘이라 번역되는 영어 단어 ‘Passion‘은 원래 ‘고통을 받다, 견디다, 참아내다‘ 라는 의미다. 예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 종교적 자학,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수탄, 피에타 등이 있다.

옛 거장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에너지를 전부 쏟아, 한 사람의 짧고 힘든 삶을 통해 모든 경의와 두려움을 묘사한 것 같다.

옛 거장들은 예수의 삶에서 가장 반향이 큰 부분은 그의 인생이 시작된 지점과 끝난 지점이라고 확신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부활, 승천, 왕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같이 초인간적인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들보다 인간의 육신을 가졌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이 대여섯 배는 많았다.

그가 고통을 받고 있는 그림에서는 머리 뒤의 후광이 아니라면 그가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다.

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그림들에서 새롭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찾는데 관심이 없다. 내가 이해한 건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동생에게 형은 언제나 다 큰 어른인 법이다.

"너나 내가 기계를 만든다면 논리적으로 접근하겠지. 최소한의 부품을 써서 깔끔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만 살아있는 자연은 전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아. 겹치는 것도 엄청나게 많고, 빙빙 돌고. 주제 하나를 놓고 수백만 개의 변형을 만들어내. 그래서 4분의 3쯤 잘못돼도 생명체는 죽질 않아. 그 결과로 생기는 게 골드버그 장치 같은 건데, 무지 튼튼한 골드버그 장치인거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괴상하고 엄청나게 여러 겹을 가진 물건이 탄생하는 거야. 글자 그대로 상상이 불가능한 물건. 무슨 말이냐면 우리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엄청난 것이 작은 세포 안에 숨겨져 있다는 예기야."

살아있는 모든 건 단 하나의 세포에서 진화했다는 사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톰의 왼쪽 다리에 있던 세포 하나가 변이를 거쳐 군대를 일으키고 그를 포위하게 되리라는 걸 알지 못했다.

라인배커(미식 축구에서 상대팀 선수들에게 태클을 걸며 방어하는 수비수)

결혼식이 끝나고 형은 왼쯕 허벅지에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해 11월에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 치료와 화학 요법이 계속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1월, 암이 폐에 전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하는 일, 그러니까 생물 수학이 웃기는 게 가끔은 나도 장외 홈런을 치기도 한다는 사실이지.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야. 멋들어진 순수 수학뿐 아니라 우리가 관찰과 본능을 통해 알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 자연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거든. 믿기 힘든 일이지.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순간 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이 들어."

"뭔가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만들긴 하겠지."

누구나 고통을 겪지, 내 차례야. 누구나 죽어, 내 차례고.

고통을 피하는 약을 먹고 싶기도 하고 먹고 싶지 않기도 해. 죽는 건 상관없어. 다만 고통을 겪고 싶진 않아.

위대한 예술이 그렇게 쉽게 평범한 환경과 섞이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 전까지는 늘 그 반대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대성당 벽에 그린 작품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책으로 남긴 위대한 예술은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는 것 혹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보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수난극처럼 숭고한 이야기마저 가깝고 신비스럽지 않은 이야기, 바로 그 병실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려는 시도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형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모든 것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바라봤다. 어머니는 잠이 든 아들을 보고, 나를 보고, 새벽빛을 보고, 아픈 몸을 보고, 그 끔찍함을 보고, 그 우아함을 보았다.

"우리 좀 봐." 어머니가 말했다. "봐, 지금 우리가 바로 옛 거장들이 그렸던 그런 그림이잖아."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을 땅에 묻은 후에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혹은 되지 않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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