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막판에 수학자인 하디라는 사람이 수학을 ‘하찮은 수학‘과 ‘진정한 수학‘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눴다는 말과 함께 각각에 해당되는 수학 분야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봤었다.

오늘은 하디가 나누었던 두 부류의 수학 간에 일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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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저자는 하디가 분류한 ‘하찮은 수학‘ 중에 그래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한 예로 초급 기하학을 든다. 초급 기하학을 이용하여 지구의 크기를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하디가 말했던 ‘진정한 수학‘이 아닌 ‘하찮은 수학‘에 속하는 초급 기하학과 발품(?) 등을 팔아서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것의 크기까지도 구해냈다고 한다. 저자는 칼 세이건의 책인《코스모스》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여 자신의 책에서 요약 서술하고 있다. 독자인 나는《코스모스》책도 함께 구해서 해당 부분을 잠깐 살펴봤는데, 그 책에는 그림도 그려져 있어서 좀 더 이해하기가 수월해 보였다. 하지만, 유시민 작가의 책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여있었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저자가 아름답다고 느낀 ‘하찮은 수학‘의 또 다른 예로 데카르트의 원에 대한 정의가 소개된다. 독자인 나는 이 산식을 보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원의 방정식 공식이라고 하면서 그냥 외워서 숫자 대입해서 풀어재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자가 데카르트의 원의 정의(원의 방정식)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이유를 살펴보자면, 유클리드의 정의가 인간의 언어인 반면 데카르트의 정의는 인간의 언어와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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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소위 말하는 신계新界에 있다고 여겨지는 천재적인 수학자들에 대한 얘기들이 쭉 이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수학자인 유클리드나 가우스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생년 처음 알게 된 수학자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세상은 넓고 똑똑한 사람도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괜히 중간에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같은 것도 들었었는데 저자는 이런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기라도 하는 듯 자신은 이러한 수학자들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는 말로 나의 쓸데없는 자괴감을 박살내주었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유명한 수학자들의 생애를 저자가 간략히 정리해 놓은 문단이 있었는데, 그 문단을 보면 수학사에서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몰라도 그 안의 삶을 들여다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수학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 일부는 평범하게 살다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수학을 못한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세상에 수학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 수학이라는 벽 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각자 자기가 재능있는 분야에서 행복을 찾고 살면 그만이라는 게 저자의 마인드인듯 하다. 나 또한 이러한 마인드에 동의하는 바이다.

저자는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후기를 읽다보니 과학에 대해 어릴때부터 공부했다면 자신을 이해하는데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독자인 나 또한 이 책의 막바지에 와있는 시점에서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물론 책을 읽어나갈 때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꾸역꾸역 천천히라도 이해하면서 읽고나니 과학에 무지했던 내 자신에게 살짝 미안한 감정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지금부터라도 과학관련 지식들의 범위를 조금씩이라도 넓혀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폭과 그 깊이를 더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저자는 후기 마지막 부분에서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인문학의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우리 자신을 더욱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을 완독한 현 시점에서 독자인 나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과학 분야를 조금이나마 친숙한 분야로 바꿔준 저자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하여 과학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관련 분야의 독서도 병행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하디가 전적으로 옳지는 않았다. 우리는 하디가 말한 ‘진정한 수학‘의 일부가 선과 악을 행하며 전쟁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군대와 민간이 모두 사용하는 현대의 암호시스템은 정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상대성이론 덕분에 항공기 위성항법장치와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쓸 수 있다. 핵폭탄을 만들기까지 실험물리학자들이 사용한 모든 수학이 ‘하찮은 수학‘이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수학도 선과 악에 쓰이며 인간의 일상 안에 들어와 있다. - P265

진정한 수학과 하찮은 수학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다. 진정한 수학이 인간 세상으로 들어와 선악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있는 것도 아니다. - P265

‘태양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빛은 지면에 수직으로 떨어진다. 땅이 평평하다면 그 시각에 어디서나 막대 그림자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땅이 둥글다고 볼 수밖에 없다.‘ - P266

유클리드: 원은 한 선으로(즉 곡선으로) 된 평면도형으로, 원의 내부의 한 점(그 점은 중심이라고 한다)에서 원위로 그은 모든 선분이 서로 같다. - P267

데카르트: 원은 다음을 만족시키는 모든 x와 y이다:x^2+y^2=r^2, 이때 r은 상수. - P268

데카르트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평면 위의 모든 점을 수직축에서 떨어진 수평거리 x와 수평축에서 떨어진 수직거리 y라는 두 수의 순서쌍 (x, y)로 나타낼 수 있다. 둘째, 선을 점의 집합으로 간주하면 직선이든 원이든 타원이든 모든 선을 ‘대수적‘代數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 P268

직교좌표계는 페르마 Pierre de Fermat(1601~1665)가 발명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직교좌표계를 활용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책임은 페르마한테 있다. 페르마는 연구 결과를 출간하지 않는 고약한 습관이 있었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로 인해 후세 수학자들을 무척 힘들게 했다. - P268

하디 덕분에 나는 수학자가 아름답지만 쓸데없는 학문을 연구하는 이유를 알았다. 하디는 학문 연구의 일반적인 동기를 세 가지로 보았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 성과를 이루려는 직업적 자긍심, 명성과 지위에 대한 야심이다. 그는 수학만큼 여기에 잘 들어맞는 학문이 없다면서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수학은 진리가 기묘한 장난을 치는 분야다. 정교하고 매혹적인 전문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준다. 수학의 성과는 다른 무엇보다 오래간다. 문명과 언어와 권력은 사멸해도 수학의 아이디어는 불멸한다.‘ - P269

여기서 핵심은 수학적 진리의 불멸성이다. 하디를 다시 봤다. ‘영원한 것에 집착한다니, 신계의 수학자도 인간임이 분명하군!‘ 그렇다. 인간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영원한 그 무엇을 추구한다. - P269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P270

수학은 무엇인가? 수학적 진리는 수학자가 발견하든 말든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서술한 것인가? 그런 수학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만약 수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수학은 현실과는 무관하게 수학자가 창조한 추상적 관념의 복합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학은 적절하게 선택한 정의定義(definition)와 공리公理(axiom) 를 바탕으로 논리 규칙에 따라 증명한 정리의 집합이다. 우주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도구가 아니다. - P270

진정한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논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수학을 창조한다. 그들이 새로운 정리를 세울 때마다 수학의 영토는 넓어진다. - P270

물리학과 화학을 비롯한 과학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이견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견 또는 통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처럼 분명한 합의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수학은 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P271

아리스토텔레스에 연원을 둔 사고방식에 따르면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언어유희일 뿐이다. 수학의 공리는 논리 법칙에 따라 일관된 이론을 구축하는 데 쓰는 규칙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해서 얻은 수학의 결과가 현실에서 유용한 것은 그렇게 되도록 공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 P271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하찮은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정한 수학의 일부이다. 진정한 수학자는 현실과 무관하게 수학적 진리를 추구하고,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유용한 수학적 도구를 필요한 방식으로 가져다 쓴다.‘ - P272

유클리드는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수학적 증명의 규칙을 정립함으로써 무의식적 가정과 부정확한 추측을 기하학의 세계에서 추방했다. - P273

공리는 자명하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다. - P273

평행선 공리를 부정해도 일관성이 있는 기하학이 성립한다 - P274

비유클리드기하학은 휘어진 면의 기하학이다. 농구공의 표면처럼 볼록한 면이나 말안장처럼 오목한 비유클리드평면은 유클리드기하학에 없는 성질이 많지만, 평행선 공리를 제외한 유클리드기하학의 다른 공리를 모두 만족한다. 이런 평면은 구면기하학과 쌍곡선기하학으로 서술할 수 있다. - P274

휘어진 공간도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요구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공간은 휘어질 수 있으며, 공간의 곡률은 중력이 결정한다. 공간이 달라지면 공간을 서술하는 기하학도달라진다. 유클리드기하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완전한 평면에서는 진리다. 공간의 곡률이 작아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간 세계 규모에서도 잘 작동한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구조와 운동을 서술하려면 비유클리드기하학이 필요하다. - P275

수학은 참인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있고(완전한 complete), 모순이 없으며(일관된 consistent), 어떤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결정 가능한 decidable)는 것 - P275

‘우리는 알아야 하며 알게 될 것이다.‘ - 힐베르트 - P276

괴델 Kurt Gödel(1906~1978)은 바로 그 시기에 ‘불완전성 정리‘를 제출함으로써 힐베르트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그는 수학이 기호로 하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게임은 아님을 증명했다. - P276

괴델은 이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그 논리체계 안에서는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 없고 논리체계 밖에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참인데도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하나라도 있다면 수학은 완전한 논리체계일 수 없다. - P277

괴델은 또 수학의 어떤 논리체계도 자체 수단으로는 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는 것도 증명했다. 스스로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면 수학을 일관된 논리체계로 인정할 수 없다. - P277

괴델은 ‘나는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는 공식이 참임을 수학의 논리체계 밖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초감각적인 ‘수학적 직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완전성 정리를 제출했다고 한다. - P278

수학은 객관적 실재를 서술하는 우주의 언어이기도 하고, 기호와 논리를 가지고 노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이기도 하다. 기하학을 보라. 피타고라스 정리는 직각삼각형 자체의 성질을 서술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신계의 수학자가 만든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다. 지구 표면의 곡률이 인간의 감각으로는 0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클리드기하학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중력으로 공간이 휘는 우주의 객관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지만 그것을 찾아낸 것은 기호와 논리를 가지고 노는 신계의 수학자들이었다. - P278

수학은 수학자들이 창조한 추상의 세계다.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려고 수학을 연구하지 않는다.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적 진리의 영원성에 끌려 추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도구가 되어 현실의 선악과 관계를 맺을지는 그들 자신도 모른다. - P278

정리해 보자. 수학은 어떤 학문인가? 힐베르트에 따르면 기호와 논리로 하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이고 갈릴레이에 따르면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우주의 언어다. 나는 갈릴레이의 수학이 힐베르트가 말한 수학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둘 모두 옳다고 했다. 하디의 말로 옮기면 하찮은 수학은 진정한 수학의 부분집합이다. - P279

수학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수학자 중에 ‘노력형‘은 없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수학 천재는 천재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노력할 수도 없는 학문이 수학이다. 수학 천재는 ‘발명왕‘과 달리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 수 없다. - P279

다른 천체의 중력때문에 태양계 행성의 궤도가 달라지는 섭동攝動 - P281

디오판토스는 기하학이 유행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정수론과 대수학을 연구했는데, 묘비에 자신의 수명을 미지수로 한 방정식을 문장으로 새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 P283

페르마가 죽은 후 아들이 아버지의 메모를 정리해 《페르마의 주석이 붙은 아리스메티카(Arithmetica, 산학算學》 를 출간했다. 거기에는 새로운 수학 정리가 여럿 있었는데 증명 과정을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후대 수학자들은 페르마가 메모해둔 정리를 모두 증명했다. 그런데 하나는 300년이 지나도록 증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라고 한다. - P284

피타고라스 정리 (x²+y²=z²)를 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x와 y는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만드는 두 변의 길이이고 z는 빗변의 길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를 제곱한 값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더한 값과 같다.‘ 페르마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제곱수를 3 이상의 정수로 바꾸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가 없다고 했다. - P284

n이 3 이상의 정수일 때 x^n+y^n=z^n를 충족하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84

n이 2일 때 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 (x, y, z)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예컨대 (3, 4, 5) (5, 12, 13) (8,15,17)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3 이상의 정수이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 (x, y, z)가 없다. 이것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다. 간단한 내용이라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않다. - P284

페르마는 ‘놀라운 증명 방법을 발견했지만 여백이 부족해서 적지 않았다‘고 써두었지만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와일스는 현대 수학의 최신 방법론을 동원해 증명했는데, 증명 과정이 책 두 권 분량이 될 만큼 길고 복잡했다. 17세기 중반의 수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고 보는게 합당하다. - P284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선망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을 못해서 학교생활이 힘들었고 수학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고생한 사람일수록 수학자를 더 우러러본다. 수학 천재는 확실히 다른 분야의 천재보다 더 천재 같다. - P285

수학자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계의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흉내 내지 못하며 그들이 쓴 논문을 읽을 수 없다. 중간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작가들이 최선을 다해 설명해도 극히 일부를 겨우 알아듣는다. 수학자는 우리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다. - P286

그렇지만 수학자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꼭 존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그렇듯, 그들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뇌의 특수한 영역이 특별히 발달했기에 수학자가 되었을 뿐이다. - P286

나는 수학자들의 재능과 성취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이 노력만으로 수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수학을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287

수학을 몰라도 행복하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수학 천재라고 해서 삶이 남보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인격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다. - P287

신계의 수학자라고 해서 인간계의 보통 사람보다 행복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수학을 못해도 내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부정하진 않겠다. 수학을 잘하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 P288

나는 문과들과 어울려 살았다. 아는 과학자가 없어서 과학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우연히 마주친 과학교양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인생을 닥치는 대로 살았는데 독서라고 달랐겠는가? 뇌과학부터 물리학·생물학·화학·수학·천문학·양자역학까지 분야와 저자를 가리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나쁘진 않았다.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은 얽혀 있다. 책 읽는 순서가 뭐 중요하겠는가. - P289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이 다르다.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소금물 이야기가 그랬다. 원자의 구조에서 출발해 공유결합과 이온결합을 거쳐소금 결정의 해체와 복원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소금 용해현상을 설명했다. 그것이 과학 ‘스토리텔링‘의 패턴이다. - P290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었고 분자가 뭉쳐 세포를 형성했으며 세포가 결합해생물이 되었다. 생물은 진화했고 발달한 뇌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지알려고 하는 철학적 자아는 뇌에 깃들어 있다. 물리 세계의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그런 순서를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 - P290

나는 문과의 고충을 안다. 문과가 과학 책을 읽으려면 방정식이 없어야 한다. 인문학과 관련이 있으면 수월하다. 그래서 과학 공부 이야기를 뇌과학으로 시작했다.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 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양자역학을 알면 우주론이 덤으로 따라온다. 우주와 수학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진다. - P290

과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문과 독자에게 권한다. 아무 책이나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을 읽으시라. - P291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파인만의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를 면하는 게 ‘바보‘인줄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낫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간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 P291

‘운명적 문과‘가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어떤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활용하는지, 때로는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과학을 대하는지 아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걸 알면 문과한테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는 과학교양서를 쓸 때 참고할 수 있을 테니까.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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