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 칸트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는데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진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칸트는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과학지식을 수준급으로 갖추고 있었던 철학자라고 한다. 칸트가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에 대해 논한 것이 있는데, 이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쓰여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칸트 본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칸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차이점을 비교해주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이었다. 이것의 핵심은 밑줄에도 쳐놓았는데, 간략히 언급하자면 과학자는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만 인문학자는 잘 몰라도 일단 아는 것처럼 둘러댄다는 것이다. 이 말에 근거해본다면 칸트는 과학적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에서 바로 앞 문장에서 언급했던 인문학자처럼 행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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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칸트의 ‘불가지론‘이라는 것인데 얼핏보면 굉장히 난해하게 느껴져서 무슨 말인가 싶은데 저자의 설명과 저자가 제시한 다양한 사례들을 따라 읽다보면 그래도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알게 되는 것 같다.

이와 관련된 기초적인 과학 개념들이 나오는데, 전공자들에게는 아주 기본중의 기본일 수 있겠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비전공자들에게는 이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싶은 개념들이 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자께서 문과출신이다보니 비전공자들도 이해하기 쉽게끔 낯선 지식들을 잘 풀어서 설명해주었다는 점이다. 읽으면서 각각의 개념들이 좀 낯설긴 했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이 책을 쓰기위해 과학관련 책들을 꽤나 여러권 독파하신 저자의 노력덕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의 수고 덕분에 나같이 과학에 무지한 독자도 기본적인 과학지식을 익히는데 조금이나마 수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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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는 맹자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묵가와 양주학파에 대한 내용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뒤이어지는 내용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진다.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철학자는 모른다는 말도 무언가 아는 것처럼 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무엇보다 그런 면이 다르다. 나는 그게 인문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증명한 사실만 책에 담아야 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P68

칸트의 글을 해석하려면 그가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P68

칸트는 과학적으로 옳은 견해를 말한 경우에도 사실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논리적 추론 과정을 생략한 경우도 많았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 P68

칸트는 인간의 인식을 ‘선험적‘ (아 프리오리)인 것과
‘경험적‘(아 포스테리오리)인 것으로 나누었다. - P68

도덕법을 알게 하는 것이 이성 그 자체의 기능이라는 칸트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인간에게는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는 준칙을 거부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기피하는 본능이 있다.‘ - P69

진화생물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를 통해 우리가 도덕이라고 하는 사회적 본능을 획득했다고 말한다. 칸트는 옳았다. 인간은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도덕법을 알 수 있다. - P69

칸트의 글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인 성과 비슷하다. ‘접근하면 발포함‘ 따위 경고문은 필요 없다. 거기 들어갈 능력이 있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 P69

인간이 도덕법을 선험적으로 안다는 칸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으로《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4)를 들 수 있다. 진화심리학자인 핑커는 전쟁·약탈·강간·살인과 같은 폭력의 역사를 다룬 기록과 자료를 분석해 인간이 자신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능력을 키웠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책 9장과 10장은 도덕법에 대한 칸트의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69

우리는 주관적 감성형식(공간형식과 시간형식)과 열두가지 범주의 사고형식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한다. 이런 형식이 활동하지 않고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했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주관의 형식으로 인식한 대상은 ‘현상‘ Erscheinung으로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있다고 상정하는 ‘사물 자체‘Ding an sich가 아니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자연은 우리 주관의 형식에 따른 자연이지 주관과 관계없이도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다. - P70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옳았다. - P70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 P71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다.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P71

뇌는 감각기관이 보내는 정보를 특정한 패턴으로 처리함으로써 외부 환경 변화를 빠르게 인지하고 몸을 신속하게 제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 P72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전자기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상호 변화를 유도하면서 퍼져 나가는 파동으로,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진동한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데 매우 긴 것부터 극히 짧은 것까지 파장의 길이가 매우 다양하다.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파장이 긴 전자기파는 초당 진동수가 적고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많다. - P72

인간의 신경세포는 파장이 380~720나노미터인 전자기파만 감지한다. 그것을 ‘가시광선‘ 또는 ‘빛‘이라고 한다. - P72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다. - P72

우리 뇌는 가시광선 영역의 전자기파를 파장의 길이에 따라 긴 쪽부터 ‘빨주노초파남보‘로 인식한다. - P72

파장이 720나노미터보다 긴 전자기파(적외선)와 380나노미터보다 짧은 전자기파(자외선)는 감지하지 못한다. - P72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전파, 전자레인지의 마이크로파, 진단 장비에 쓰는 엑스선은 모두 전자기파다. 파장과 진동수가 다르지만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 P73

별개의 현상인 줄 알았던 전기와 자기가 서로를 유도하는 결합 현상임을 밝힌 영국 물리학자 패러데이 Michael Faraday(1791~1867)와 몇 개의 방정식으로 빛이 전자기파라는 사실을 정리한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맥스웰James Maxwell(1831-1879) - P73

전기부터 전화·라디오·텔레비전·인터넷과 휴대전화까지 우리가 쓰는 모든 전기·전자 기기는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발견에서 비롯했다. - P73

우리는 빛이 우리 신경세포가 감지하는 영역의 전자기파임을 알면서도 전자기파나 가시광선보다는 빛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여러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P73

‘빛은 파동이고 입자다.‘ - P73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인지한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전자기파의 성질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없다. - P74

모든 입자가 그런 것처럼 빛도 일정한 양의 에너지가 있다. - P74

태양이 내뿜은 빛의 에너지는 지구에서 공기를 만나 열에너지로 바뀐다. 우리가 햇볕이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은 빛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빛이 공기를 데우고 우리가 따뜻해진 공기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 P74

진공에서도 ‘빛의 속도‘로 달리는 빛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자신의 에너지를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덜어 준다. 이 현상을 우리는 복사輻射(radiation)라고 한다. - P74

빛은 또한 파동이고 파장에 따라 에너지가 다르다. - P74

독일 물리학자 플랑크Max Planck(1858~1947)는 빛의 에너지를 파장별로 측정하는 과정에서 빛에는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에너지 값을 가진 진동자가 있다고 추측했다. 진동수에 작은 상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빛의 에너지를 알아냈다. 그 상수는 6.6260755를 10^34로 나눈 극히 작은 값이다.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플랑크 상수‘라고 한다. - P74

플랑크는 빛의 복사가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의 방출 ·  전달· 흡수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발견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양자‘量子(quantum)다. - P74

빛의 복사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고전역학 classical mechanics으로는 다룰 수 없는 현상이었다. 플랑크가 발견한 현상을 설명하고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量子力學(quantum mechanics) 이다. - P75

플랑크의 발견은 아인슈타인과 프랑스 물리학자 드브로이 Louis de Broglie(1892~1987)의 연구를 거쳐 오스트리아 과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의 파동방정식으로 결실을 맺었다. - P75

파장 380~720나노미터영역의 전자기파가 물방울을 만나 굴절한 것을 우리는 무지개라고 한다. 뇌가 특정한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에 대한 정보를 각각 다른 패턴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로 본다. - P75

‘사물 자체‘는 굴절한 파장 380~720나노미터 영역의 전자기파이고, 일곱 색깔 무지개는 우리의 감성형식으로 질서를 부여한 ‘현상‘이다. 둘은 같지 않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뿐 ‘파장 380~720나노미터 영역의 전자기파‘는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 P76

물질은 모두 원자의 집합이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를 비롯한 여러 입자로 이루어진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는 각각 다른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물 자체‘는 모두 동일하다.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두 개가 전자 두 쌍을 공유하는 분자화합물이다. - P76

물은 온도에 따라 분자의 활동성이 달라서 고체 · 액체 · 기체로 바뀌는 상전이相轉移(phase transition) 현상을 일으키지만, 물 분자 사이의 간격이 넓어졌을 뿐 ‘사물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다. - P76

나는 칸트의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을 패턴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작동 방식으로 해석한다. - P71

‘내가 보고 만지는 이 탁자는 우리의 감성형식이 질서를 부여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사물 자체가 아니야!‘ - P76

사람만 주관적 감성형식이 있는 게 아니다. 뇌를 가진 동물은 다 저마다의 감성형식이 있다. 그 사실을 알면 칸트의 불가지론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 P76

박쥐는 자신이 쏜 초음파가 대상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것을 감지해 뇌에서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만든다. 밤에 곤충을 사냥할 때는 초당 200회씩 이미지를 조합한다. 사람이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박쥐는 소리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 P77

동물이 경험하는 세계의 형태는 뇌의 정보처리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뇌가 빛의 파장 차이를 색깔 차이로 처리하는 것처럼 박쥐의 뇌는 음파의 파장 차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인간과 박쥐는 주관적 감성형식이 달라서 동일한 ‘사물 자체‘를 각각 다른 ‘현상‘으로 인식한다. - P78

칸트는 옳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옳았다. 그의 시대에는 망원경만 있었고 현미경이 없었다. 고전역학은 있었지만 양자역학은 없었다. - P78

칸트는 인간의 지적 잠재력과 과학혁명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다.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을 인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자·원자·전자 같은 미시입자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무지개라는 현상의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 안다. 그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도 안다. - P78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깊이 탐구한 것만으로도 존경하기에 충분하다. 시대를 초월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 P78

‘자아‘, ‘인격‘, ‘정체성‘은 무엇인가. 일단 물질은 아니다. 사람의 몸을 해부해 샅샅이 뒤져도 그런 것은 나오지 않는다. 원자 단위까지 쪼개도 헛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과 타인을 대한다. - P79

사람은 저마다 인격과 정체성이 있다. 가치관 · 개성 · 기질 · 취향이 다르다. 그 모든 것을 지닌 삶의 정신적 주체를
‘자아‘라고 하자. 사람은 외모만 다른 게 아니라 자아도 다르다. 한 사람의 자아는 사는 동안 계속 달라진다. 물질은 아니지만 물질에 깃들어 있다. 내 몸이 없으면 자아도 없다. - P79

사람의 자아는 각자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자아 안에도 서로 다른 여러 면이 있다. 모든 자아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우며 주체적이고 괴팍하다. - P80

맹자는 군자君子의 미덕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측은지심惻隱之心(여린 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董惡之心(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마음)이라는 본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 P81

묵가는 이기심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간주하고 유가의 가족중심주의가 악을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모두가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고 사랑하며 사는 평등 세상을 지향했다. 자급자족 공동체를 형성해 모든 구성원이 생산 활동에 참가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자기 몸을 아끼듯 남을 아끼고 자기 부모를 사랑하듯 남의 부모도 사랑하자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산주의 운동이나 무정부주의 생활공동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82

양주학파는 묵가의 반대쪽 극단이었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상호 불간섭주의를 표방했고 국가 제도와 사회의 지배적 문화양식을 부정했으며 세상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천하를 준다 해도 목숨과 바꾸지 않겠다든가, 내 몸의 털 한올을 해쳐서 천하를 구할 수 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다 그런 태도에서 나왔다. 극단적 고립주의 또는 은둔형 무정부주의라고 할 만한 사상이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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