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이어서 ‘이응 이응‘이라는 작품은 뭔가 미래에 있을 법한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그 미래에 있을 법한 기계장치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욕구 해결을 도모하는 얘기들이 주를 이룬다.
요즘 AI니 뭐니 하면서 다양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이러한 발전에 발맞추어 미래에 나올 수도 있는 ‘이응‘ 같은 인간의 욕구 해결도구가 나오게 된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상황 같은 것이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신기하고, 다르게 보면 좀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로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드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일 것 같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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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는 이 책에 나왔던 모든 작품들에 대한 핵심 코멘트들이 나온다. 앞에서 읽으면서 잘 납득되지 않았거나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긴가민가 했던 것들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어 전반적인 시대현실과 그 속에서의 문학의 역할에 대해 환기해볼 수 있는 얘기들이 많은 부분에서 공감되었다.

"좋아요. 잘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따라하지 않는 게 이응의 철학이에요."
우유수염은 이응의 좋은 점은 ‘이응‘이란 말을 만들어낸 것이라 했다.
"그거 알아요? 인간은 기계 앞에서 제일 솔직해요."
우유수염은 전 세계의 쾌감정보를 모은 이응이 앞으로 더 멋진 컬러볼을 개발해낼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누구든 자기가 느끼고 원하는 걸 이응 안에서 표현해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 기쁨을 만끽하는 게 지구별의 푸름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했다.
보리차차에겐 가리고 숨길 게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죄스러운 것도 없다고 했다.
나는 다시는 위옹 모임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힘껏 끌어안아도 이 열린 창문은 닫을 수 없을 테니까. 죽은 개는 더 이상 만질 수 없으니까. 살아있던 개도 나를 안아준 적은 없었다.
개나 나나 할머니에겐 죄다 강아지였다. 강아지, 라고 할머니가 부르면 보리차차와 내가 같이 할머니를 봤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떤 이야기는 너무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욕구를 설계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세상에는 어떻게 그 많은 불행이 계획되어 있는 걸까.
할머니는 죽는 것도 이응 같은 거라고 했다. 이응처럼 코스를 선택할 순 없지만, 이응의 컬러볼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바뀌는 것 뿐이라고. 이응을 하는 것처럼 억눌려 있던 게 풀리면서 기분좋게 흩어지는 거라고 했다.
개인의 힘으로는 더 이상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바꾸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는 하나의 거대한 관성이 되고, 그러한 관성은 우리 자신을 더 강한 힘과 자극에 반응하며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 물리학적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공포와 혐오에 짓눌려 주어진 자극에만 반응하며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보고 있자면 그러한 관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의 역할과 효용이란 한껏 납작해진 개인의 가능성을 다시금 부풀림으로써 알고리즘처럼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에 숨통을 틔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구조적인 관성에 떠밀리는 개인의 이야기 속에서 멈추어 상상하는 순간을 발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 은 ‘취향의 계급성‘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시대 고급문화에 대한 허영과 자존감 사이에 놓인 개인 심리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자신이 믿는 문화적 취향이 속물적 우월성으로 변하는 지점을 애써 들추려 하지 않는 자기방어의 제스처를 거리화해서 바라보는 반성적 시선이다.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힘의 논리와, 개개인의 삶의 관성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스스로 멈춰 설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유튜브 쇼츠나 수많은 인터넷 상의 정보사이를 누비다 보면 어느샌가 휘발되어버리는 시간의 밀도만큼이나, 우리는 사회 현실의 흐름에 스스로를 지탱하고 저항하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문학적인 반성과 그에 따른 변화의 시도마저도 어쩌면 하나의 사회적 원자로서의 작용-반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의심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문학적인 공동체와 개별 문학인들이 끊임없이 동시대적 현실과 부대끼면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믿어볼 필요가 있다.
수상작들은 모두 그러한 부대낌의 결과물이며, 독자들에게도 기꺼이 현실의 관성에 저항하고 멈춰서 생각할 수 있는 사유와 발견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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