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선 결국 만나야 할 것은 만나고, 헤어질 것은 헤어지고 그런 게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남지 않은 23년 12월의 마지막 언저리를 이 소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고 나름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소설 속 ‘나‘가 소설 속에서 추측하고 생각했던것 못지 않게 독자인 나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다양한 생각들을 많이 해보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전율이 일었던 순간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짜릿한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었기에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 님에게 감사 드린다. 작가 후기에 나왔던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찾아 읽어 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설령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다 한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높은 벽에 엄중히 둘러싸인 이도시에서 나가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을 텐데."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년은 조용한 목소리로내게 고했다. "이 방의 이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 끄면 돼요. 힘차게 한 번 불어서 그러면 다음 순간, 당신은 이미 바깥세계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간단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 P754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 P754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나는 가까스로 그렇게말했다. "물론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소년은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아시다시피 이곳에는생각할 시간이 많으니까요.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여기에는 시간이 무한히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이 훅하고 꺼지며 깊은 어둠이 내렸다. - P755
그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질 때 나는 늘 "내일 보자"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무의미한 말이다. 이 도시에 정확한 의미의 내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밤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보자"라고. - P756
"내일 보자"라고, 강변길을 따라가며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말하곤 했다. 그곳에 내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하지만 그 마지막 밤,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도 그곳에는 더이상 ‘내일‘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P757
대신 내가 한 말은 "안녕"이라는 한 마디였다. 내가 그렇게말하자, 그녀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그 말을 들어본 것처럼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른 작별인사에 당황한 것 같았다. - P757
"안녕"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했다. "안녕." 그녀도 말했다. 마치 처음 보는 음식물을 입에 넣는사람처럼 주의깊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 미소도 지금까지와 똑같진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 P758
내가 여기서 없어졌을 때면 소녀 또한 이곳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직 나 하나를 위해 도시가 준비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사라지면 그녀도 사라진다ㅡ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꿈 읽기‘를 도와주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몹시 슬퍼졌다. 내 몸이 반쯤 투명해져버린 기분이었다. 중요한 무언가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잃어가고 있다. - P758
그러나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역시 나는 이 도시에서 나가야 한다.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이미 결정된 흐름이다. 이제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이 도시에는 더이상 내가 있을 곳이 없다. 내가 들어갈 공간은 없어졌다. 여러 의미에서, - P759
소년은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당신과 헤어지게 됩니다." "이제 너를 만날 일도 없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우리가 마주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요. 하지만 저도 모릅니다. 누군들 단언할 수 있을까요?" - P760
"죄송하지만 저는 슬픔이란 걸 느끼지 못해요." 그가 고백하듯 말했다. "그렇게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가령 제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당신과 헤어지는 것에 분명히 슬픔이란 감정을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고, 슬픔이 어떤 것인지 저는 알 길이 없지만요." "고마워."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 기뻐." - P760
"역시 우리는 두 번 다시 못 만날 것 같군요." "그럴 거야." 내가 말했다. "당신 분신의 존재를 믿으세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내 생명선이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슬슬 가야겠어."내가 말했다. "이 촛불이 꺼져버리기 전에." - P761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몇 초 동안 수많은 정경이 차례로 뇌리에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정경이다. 내가 소중하게 지켜온 모든 정경이다. 그중에는 비가 쏟아지는 드넓은 바다의 광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다. 아마도. - P761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껐다. 어둠이 내렸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 - P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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