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거리들을 끌고 와서 시비를 걸었던 놈이 그랬다. 당연히 내가 겁을 먹을 줄 알았겠지. 하지만 나는 면상에 박치기를 먹여줬다. 그때 일그러진 놈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랬다.

다른 학교의 남학생들이 쫓아다닐 정도로 예뻤던 동갑내기 여학생. 내게 학교 끝나고 노래방이나 가자고.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주머니에 500원도 없었기에 거절했다. 그때 그 여학생의 흔들리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본의 아니게 높은 콧대를 꺾어버린 셈이 됐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나는 몇몇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제까짓 게 뭔데?‘ ‘뭐 특별한 게 있나?‘ ‘쟤가 걔를 찬 애라고?‘ 따위의 생각들이 부른 호기심이었다.
나도혜에게서도 비슷한 게 느껴진다. 금수저에 자기 관리도 철저하고 능력 있는 미인이니, 웬만한 사람들은 다 쥐고 흔들었겠지.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적어도 조심스러울 것은 분명하다.
나도 조금 전까지 그랬다.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계량을 하는 저울에 서로를 올려놓고 판단한다. 상대방이 무언가 잘났다고 느끼면 한없이 조심스럽게 된다.
지지하지 않던 정치인, 평소에 싫어하던 기업인도 막상 눈앞에서 보면 나도 모르게 웃으며 악수를 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내 분야가 있다. 연애를 하자고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아니다. 싱글로 오래 지내다 보니 잠깐 향수 냄새 좀 맡았다고 정신을 못 차린 것같다.

"그게 왜 궁금하시죠?"

"그런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시장에서 고등어 고르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리저리 재보면서 저울질하고 그런 거요. 사람이 언제나 직진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앞에서 깜빡이 이거켰다가 저거 켰다가 그러면 들이받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뭐, 실수일 수도 있겠죠. 그럼 비상 깜빡이 한번 켜서 사과할 수 있는 거고."

사적인 감정으로 흐트러질 비즈니스면 더욱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집중할 것에 집중하고 싶다.

오시는 분들의 생활습관부터 특정 질환이 언제 발병됐나, 원인이 무엇인지 상세히 파악하여 해결점을 찾습니다.

"이런 건 자체적으로 하셔도 되지 않나요?"

"요즘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부약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하프물범으로 짜내는 탕약입니다. 사실 그 효능은 많이 부풀려져 있거든요."
"아, 그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하프물범 탕약을 먹을 거라면 오메가3 한 알을 먹는 게 도움이 될 텐데 말이죠."

"제가 사장님과 행복 건강즙에 기대하는 건, 그 이름값에 걸맞은 이미지도 있으니까요. 깨끗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느낌이요. 바른 농부단이란 곳도 유기농 식품으로 괜찮은 이미지를 구축해나가는 곳 같고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한 번 튕겼다. 어차피 응할 거였지만.
"비율도 약간 조정이 가능합니다."
나도혜의 말에 아주 옅은 미소를 드러냈다.

즙으로 시작했지만, 즙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지금 당장에라도 사업들을 시작할 여력은 된다.
수개월이 지난다면 더 여유롭게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꿀릴 게 없었다.

더 이상 서로 간에 어떠한 이성으로서의 긴장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법 화기애애했던 룸 안은 검은 무게추들로 가득했다.
성별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업가만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건......"
나도혜는 말문을 열었다가 곧바로 닫아버렸다. 적잖이 고민이 되는 듯했다.
코너에 몰렸다. 몰아놨으면 스트레이트든 훅이든 어퍼컷이든 날려야지,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된다.

내가 비즈니스의 달인은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협상‘의 형태를 가진 무언가는 많이 겪어봤다. 어떻게 보면 우리네 삶이 언제나 협상과 선택의 연속이 아니던가. 지난날에 숱하게 많이 겪었던 이런 순간들에 있어서 나의 선택이 항상 훌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내가 일진 논란에 휘말렸을때도 한 발짝 물러나서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다른 방면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관계는 유지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다.

"해봐야 알죠."

"장담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사업들을 단순히 돈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건강히 살길 바라며 임하고 있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긴 하죠. 물론, 유지가 될 때의 얘기겠지만요."
"그리고 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도 힘을 합치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저희 중에서 누가 꼬리를 물고 끌고 가는 쥐일까요?"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성공의 확신에 대해 물었을 때와 같은 대답을 내놨다.
"해봐야 알죠."

성공은 또 다른 기회를 부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물어뜯을거리를 찾아 눈을 번뜩이고 코를 벌름거리며 이를 간다.

정답은 없다. 아직 정복되지 못한 분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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