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아플 정도로. 어금니도 꽉 깨물었다. 여기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난 뒤 좋은 점은 새로운 능력과 기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날들이 전부 헛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심지어 실수하고 후회했던 일들도 의미를 지녔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이 무의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는 더 큰 가치가 있는 듯하다.
당연히 유통과정이 줄어들수록 마진은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거래처를 만든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저렴한 값에 구매하는 방법은 경매였다. 하지만 경매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경매사를 고용하고, 따로 배송을 받는 등의 일도 상당히 번거로웠다. 특히 나처럼 소량 구매의 경우 중간 유통을 하나 끼워서 구입하는 게 오히려 저렴할 수도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저렴한 구입법이 또 있긴 했는데, 농장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게 알아볼 수도 없었고, 도매가로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량 이상을 주기적으로 구입해야 됐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데다가 추출기도 3대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매출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공급량을 결정하여 거래를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는 유통과정이 한두 개 늘어나 비용이 조금 더 발생하더라도 수량 조율이 쉬운 업체를 알아보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재미있었다. 하나하나 과정을 밟아가는게 힘들지만 즐거웠다. 온전히 내 것인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게 이렇게나 짜릿할 줄이야. 이런 맛에 다들 사업을 하는 거겠지.
진짜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은 표정부터가 다르니까.
"아, 허구한 날 어지럽다고 했잖소. 병원 가도 못 고친다고, 의사들 다 돌팔이라고 욕해쌌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봐야 될 거 아니요?"
"제가 잘 봐드릴 테니까,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후두부와 뒷목을 차례로 짚었다. 그리고 엄지로 척추 라인을 따라 쭉손을 움직였다. 순간 머릿속에 박하사탕이라도 녹아내린 듯 눈구멍까지 시원한 느낌이 퍼지면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끝내주는 기분이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깊고 큰 무언가라고 확신했다.
"MRI나 CT 같은 거는 찍어보신 적 없으시죠?" "그럴 돈이 어딨어? 검사 한번에 얼마씩 하는지 알아?"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짜증을 냈지만,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몸에 문제를 느끼면서도 검사비에 부담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가난의 슬픔과 고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죠. 너무 비싸죠. 그래도 몸에는 아끼시면 안 되는데. 병원에서 의사 진단으로 검사를 받게 되는 건 실비보험도 적용되거든요." 내가 말하자 할아버지는 또다시 짜증을 냈다. "아, 누가 그걸 몰라? 실비가 없으니까 그렇지!" "아, 네. 아무튼 지금 관리를 열심히 하셔야 될 때에요."
"......저것만 하면 안 어지럽다고?" "더 있습니다. 마늘 드시면 좋고요, 영지를 달여서 아침저녁으로 드세요. 그리고 산수유차도 좋아요. 정확한 양은 써드릴게요. 식사는 그냥 현미같은 건 소화가 잘 안 되니까, 발아 현미랑 찹쌀이랑 찰흑미 같은 거 있죠? 섞어서 드시면 좋아요. 서리태랑 찰기장도 좋고요. 붉은 고기보다는 등 푸른 생선을 드시고요. 고등어 같은 거."
예상치 못한 손님들은 생각이상으로 까다롭고 내 혼을 쏙빼놓았다. 체력적으로만 힘들었느냐? 금전적으로도 소액이지만 마이너스였다. 인건비까지 친다면 더 늘어나겠지. 하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투자고 영업이라 생각했다.
박춘기 할아버지만 봐도 어쨌든 나를 신뢰하며 지인들을 데려왔다. 언젠가는 구매력이 있는 손님들도 몰려오는 날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때까지 내가 할 일은 그저 묵묵하게 열심히 하는 거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했던건 이런 케어와 관심이 아니었을까.
일단은 부르는 값에 응하기로 했다. 이기철은 눈탱이를 칠 스타일도 아니라고 보였다. 나름대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합리적인 가격이기도 했고, 특히 주스용 과일들의 가격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만약에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도드라질 땐 얘기를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합의가 안 되면 돌아서는 것으로 끝이었다. 무슨 계약으로 묶여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경쟁시장에서 선택은 자유니까. 반대로 이기철 입장에서도 내가 진상이라 생각되어 팔기 싫어지면 안 팔 수도 있는 거겠지.
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중의적이었다. 뜻을 제대로 읽어주길 바랐다. 알아서 잘해주면 자주 찾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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