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예에?" "혹시 맥문동이라고 아세요?" "맥문동이요? 알다마다요. 젊은 사람이 맥문동을 다 알아요?" "저희 집이 건강원 했거든요. 맥문동 차로 달여서 드시면 기침이랑 가슴 답답한 거 많이 좋아지실 거예요." "그래요?"
"네. 꼭 챙겨 드세요. 아시겠죠? 그리고 이번 복날에는 닭 대신 가물치 한 번 드셔보세요. 기혈 보강에 아주 좋습니다. 꼭이요."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곧바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런데 내가 기침을 했었나......? 가슴 답답한 건 어떻게 알았대......?"
스스로의 인성 자체가 훌륭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는 게 팍팍하니 날이 서는 것도 별수 없다.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여유가 따라줘야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지금 내가 그렇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일부러 엿 먹으라고 그랬을 리가 없지. 아마도 그저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을 뿐이리라. 마음가짐마저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가 싫지 않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세상에 100%는 없다고, 변하기도 한다. 나처럼.
미친놈이면 어때, 행복한 미친놈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불행하게 멀쩡한 것보다는 낫지.
"그래, 네 할아버지가 그런사람이었어. 돈 안 받고도 사람들 아픈 거 봐주고 그랬어. 할아버지가 언제 보러오나 했는데, 너한테 갔었구나."
"그건 무슨 말이야?" "사람이 죽어서도 보러 오는 건 바로 오기도 하고 그런데, 저승에서 힘을 쓰려면 우리 시간으로 10년은 지나야된다더라고. 근데 할아버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나서 널 보러 왔잖아. 그리고 얘기를 해줬고, 그거 꼭 해야 돼. 너한테 복 주려고 그러는 거야."
고모는 이런 사람이었다. 미신 같은 것도 많이 믿고, 점보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관점의 차이가 있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와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허투루 듣기도 어려웠다. 경험한 게 있으니까.
무화과가 장열도 없애고 부기 빼는 데도 좋아. 꼭 챙겨 드세요.
기본적으로 좋은 마음을 품고 하는 일이지만, 당연히 사적인 목표도 있게 마련이다. 내 능력을 통해서, 이 자본금을 10배, 100배로 불리고 말 테다. 벌써 머릿속으로는 2호점, 3호점, 4호점 줄줄이 생긴 다음 새로운 이름을 달고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개시했다.
망상이 아니라 계획이고 미래가 되게 하고 만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없는 1부가 막을 내렸고, 이제 죽여주는 2부의 막이 올라간다.
프랜차이즈가 무조건 싫은건 아니지만, 현재 내가 일구려는 사업 방향하고는 알맞지 않았다. 일단 계약에 묶이면 이래저래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도 무조건 공짜를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프로그램을 고비용으로 구입할 생각은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능력을 받은 뒤로 생활습관부터 시작하여 나의 생각 자체가 변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확실한 계기만 있다면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변할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인테리어 업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당장 보이는 거에서는 크게 건강에 이상이 있지 않았다. 조금 관리가 필요한 부분으로는 눈과 위 그리고 혈액순환. "그보다는 일단 당근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당근이요?" "예. 당근이 눈에도 좋고, 위건강 개선에도 도움을 주고, 혈액순환에도 도움을 줍니다. 항암 효과도 있는 데다가 건강에도 도움을 주고요. 볶아서 드시는데, 들기름이 좋습니다. 단, 들기름이 잘 타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볶으시다가 중불정도에서 들기름을 부어 조금 더 볶은 뒤 드세요. 그게 좋습니다."
"그냥 소주 마시면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안 됩니까?" "당근은 볶아서 드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비타민 A가 지용성 비타민인데, 기름과 결합해야 체내로 흡수됩니다. 그리고 들기름에는 오메가3가 풍부하니 또 필수지방산을 섭취하실 수 있어서 좋고요. 오메가3 효능도 다양한데, 특히 심혈관에 좋습니다. 혈액순환이 좋아지면? 아래로도 피가 잘 돌겠죠?"
필요에 의해 쓰는 것은,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할 때는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 누구보다 엄격해지고자 했다.
소상혈. 엄지손톱의 안쪽에 위치한 하얀 부분인 조반월. 그곳의 바로 아래, 마디보다는 위쪽을 바늘로 콕 찌르는 게 아니라, 대고 옆으로 끊어내듯 피를 냈다.
"여기 엄지발톱 아래 보이시죠? 발의 가장 안쪽 부근요. 여기가 은백혈입니다. 여기를 따야 위에 효과가 바로 갑니다."
"따는 건 이제 다 끝나셨어요. 스스로 여기 좀 주무르세요. 지압하면 도움 되니까." 나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위치한 합곡혈을 주무르는 시범을 보였다.
누군가 내게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게 보람차고 좋았다. 낯선 사람을 돕고,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던 게 언제였는지.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분을 능력을 얻은 뒤로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봉사에 삶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일까? 예전에는 아예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그 기분의 일부분 정도는 알 것 같다.
어쩌면 이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걸지도. 그래,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그래서 계속 건강원을 했구나.
하지만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게 쉬운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다 저거 팔아서 부자 됐겠지.
네트워크 마케팅 물건을 호구처럼 사들이고, 상호구나 개호구를 찾아 더 비싼 값에 팔고. 다단계였다.
다단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군대 선임이 오랜만에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그 이유가 다단계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던 경험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그때 죽통돌렸어야 됐는데.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서 화면을 보였다. 녹음이 되는 중이었다. 처음에 여자가 접근해와서 얘기를 시작했을 때, 휴대폰을 꺼내 녹음을 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든 문서나 파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입증이 된다. 구두(口頭)로 하는 것도 효과는 있다지만, 입증하기가 어려우니까. 지난 날의 바보같던 나에게서 배운 교훈이었다.
조그만 장사 하나를 하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끼어든다더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본다. 수많은 실수와 후회로 점철된 과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다단계인 것도 알아챘고, 만약을 위해 녹음을 하는 치밀함도 갖췄다. 이번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노력 중이었고,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편한 지름길은 없다는 것도 다시금 머릿속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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