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직 시를 통해서만 형상 없는 세계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 시는 언어에 기반하며, 언어의 진정한 음악은 오직 살아 있는 일상 구어의 진정한 리듬으로 회귀함으로써만 나올 수 있다.
크노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풍부하고도 다양한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경화된 형식을 파괴하고자 노력하고, 표음식 철자와 치누크어의 문장 구조를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슬쩍보기만 해도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주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 P361

레몽 크노는 예술가란 작품이 따라야 하는 모든 미학규칙을 충분히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규칙들의 특수한 의미와 보편적인 의미. 그 기능과 영향까지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노의 글쓰기 방법이 즉흥적이고 익살스러운 변덕을 따라갈 뿐이라고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이론상의 ‘고전주의‘에 놀랄 수도 있겠다. - P367

크노 특유의 ‘지혜‘는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욕구와 동시에 그 한계를 자각하는 능력에 그리고 어떠한 절대적 철학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 P368

그러나 논리학도 하나의 예술이며, 여러 사물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 또한 하나의 게임이다. 20세기 초반 내내 과학자들이 구축한 하나의 이상은 과학을 지식이 아니라  방법들과 규칙들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규정할 수 없는) 개념들, 공리들, 상세한 설명들을, 다시 말해 규정들의 체계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과학은 체스나 브릿지 게임과 같은 하나의 게임이 아닌가? - P369

그(레몽 크노)는 어떠한 이론이 승리했음을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가장 역설적인 명제에서조차 오직 논리와 일관성만을 알아보고 유지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 P373

그러한(암울한) 시기에는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일만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도착점처럼 보였다. "역사란 인간의 불행에 관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 P375

자크 루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학적인 사유의 생산자인 크노가 가장 좋아하는 영역은 결합 체계의 분야다. 결합 체계는 서구의 수학만큼이나 매우  오래된 고대의 전통에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00조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이 책을 순수 수학으로부터 문학으로서의 수학으로의 전환이라는 맥락에 위치시키게 한다. - P378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인류의 희생 제의와 불 축제의 기원을 찾아 전 세계 구석구석을 도는 일종의 기행을 그리고 있다. - P382

파베세에게서 볼 수 있는 어둡고 근원적인 운명론은 그가 운명론을 피할 수 없는 출발점으로 본다는 사실 안에서 바라볼 때만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383

파베세의 전형적인 특징은 역사와 민속학의 차원에서 한 인물이 화자에게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P384

이 책은 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문학 세계로 유명한 이탈로 칼비노(1923~1985)가 자신이 애독하던 작가 및 작품에 대해 쓴 평론 모음집이다. - P389

칼비노는 국내 독자들에게도 《반쪼가리 자작》《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로 이어지는 ‘우리 선조는 3부작‘과 《보이지 않는 도시들》등의 작품으로 낯설지 않은 작가이다.  - P389

호메로스, 플리니우스, 크세노폰과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 작가에서부터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디드로, 볼테르,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흔히 평가되는 ‘로빈슨크루소‘의 대니얼 디포, 19세기 영국 문학의 디킨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톨스토이, 『닥터 지바고』를 통해 현대의 서사시를 창조해 낸 파스테르나크, 이탈리아 중세 르네상스시대 문인과 현대 작가들, 20세기 현대 문학의 새로운 잠재성을 보여 준 프랑시스 퐁주, 레몽 크노,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논의하고 있는 작가들의 목록은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다. - P390

이 평론집은 무엇보다 칼비노 문학 세계의 지형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지도라 할 수 있다. - P391

우리는 이 책에서 수많은 권장 도서나 필독 목록을 ‘강요하며 그 당위를 설명하는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한 작품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그 책을 다시 펼쳐 들 때 느끼는 즐거움을 회상하는 순수한 독자로서의 칼비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P392

그가 이렇듯 독자로서 이야기하는 ‘고전‘의 필요성은 고전이 글쓰기와 읽기에 있어서 일정한 구조이자 규칙으로 또다른 잠재적인 가능성의 보고로 자리한다는 점에 있다. - P392

새로운 글쓰기와 읽기는 이러한 ‘고전‘이라는 구조가 펼쳐 놓는 자유로부터 나온다. 고전이라는 일정한 규칙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는 수사적 놀이와 선행 텍스트에 대한 패러디뿐만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맥락에서 새로운 실험을 허용하는 것이다. ("구조는 자유다 구조는 텍스트를 생산하며 동시에 잠재적으로 대체 가능한 모든 시들을 생산해 낸다. 이것이 ‘잠재적인 문학이 지닌 다양성의 사유이다. 규칙의 제약들로부터 문학은 스스로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에게 강제적인 규범을 부과한다.") 칼비노는 문학 텍스트, 질서에서 새로운 무질서가 생산되고, 다시 그러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창조되는 순환적 구조 안에서 바라보며, 그러한 반복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것으로 본다. - P392

칼비노는 하나의 작품 속에서 중심적인 진실을 고집하지 않는 반(反)본질주의적인 독해를 하면서도, 문학의 고전적인 기능, 그러니까 독자들에게 의미를 제시하고 역사와 문화를 대하는 윤리의 태도를 제시하는 일을 중요시하고 있다. 텍스트의 본질적인 중심을 거부하고 표면의 무늬를섬세하게 읽어 내며 형식과 서술 구조를 탐색하다가, 어느 순간 이미지의 연쇄를 끊고 수직적으로 의미를 통찰해 내는 힘이야말로 칼비노가 작품을 읽는 독창적인 시각이라 할 수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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