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소주는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언어라고, 김요섭 시인은 적었다. 소주는 커녕 알콜이라는 게 식도로 넘어가는 법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이런 문장을 몇 번이고 입안에서 오물거리다가 결국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 나는 이런 문장에 심취하게 된다. 읽을 때 가슴 속에서 쨍하는 파열음이 일어나고 스파크가 튀는 문장들.





그리하여 요즘 나의 사명감은 사물을 새롭게 보고, 가능하다면 참신한 언어로 그걸 옮겨보고자 하는 것인데, 이러한 강박관념이 오히려 나 자신의 진부함을 알게 해준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진실을 말하자면, 문제는 내가 사물의 참신함아 아니라 나 자신의 징표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갈수록 내가 읽고 있는 작품들 또한 더이상 신선함이 없고 진부하게만 느껴지는 것인데, 그것은 순전히 내 자신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어떤 것들, 시대나 세계 같은 것들, 혹은 삶의 대척지 같은 것들과 맞부딪쳐 파열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자꾸만 이를 회피하고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나는 내면의 울림이 아니라 바람결에 잠시 머물다가는 중얼거림 같은 것밖에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읽은 문장들이 나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때때로 내 안에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군대를 가기 전에도, 갔다온 뒤에도 고질적으로 내 안에 언제나 있어왔던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다.


최근 나는 인간성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는 상점가의 실물크기 사진 밖에 떠오르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말하자면, 무언가 긁적이는 듯 하면서도 실상 아무 것도 말하지도 쓰지도 않는데,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할라치면, 아예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지도 않는 자의식의 몸뚱이를 처치곤란으로 비비적 거리고 있을 뿐이기도 햇다. 내 안에 아무런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줄곧 남의 이야기만을 기술좋은 앵무새처럼 조금씩 변형하게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실상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적당한 마조히스트라는 건 쉬쉬해봤자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 그리하여,


산다는 것은 내게 딴은 필요 이상의 "야유"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샌가 나는 이런 문장들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이쯤에서 다시금 내가 알고 있던 문장들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신호였다.나는 다시 긍정적으로 돌아온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나는 이 정신의 독한 독약만을 잊지 않는다. 읽던 책은 던져버리고, 입을 다물어야지. 때때로 막다른 골목에서는 더이상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질주하지 않아서, 막다른 골목은 더이상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또 하나 있는데, 오늘 요즘 듣고 봤던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본 탓이다. 작금 우리의 문제를 깨진 장독에 물을 채워야 하는 콩쥐의 문제와 비교한 이 시를 보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던 나. 이게 08학번 후배님의 시였으니 더더욱 순수하게 감탄할 수 밖에.


우리는 각자 우리의 깨진 장독을 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여전히 물을 부을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최근 1000대가 무너진 코스피 지수 방어를 위해 연기금을 쏟아붓는 현정부의 대처방식에서도 고스란히 증명되었다. 한계를 모르는 블랙홀, 진공청소기, 믹서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파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기 장독이 깨지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는 어디 있으랴.


짐바브웨에서는 화폐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하루 아침에 수많은 돈더미가 쓰레기더미가 되고, 어느 시대에도 고귀한 가치일 줄 알았던 금값도 유동하는데 과연 어떤 종류의 가치가 작금의 사람에게 생의 확신 비슷한 것을 줄 수 있을까, 그러니 한달사이 집세가 20만원에서 35만원으로 올랐대봤자 놀랄 일도 아니다. 그걸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을까. 집주인? 혹은 2MB? 요즘 나는 몇몇 작품들과 이론 속에서만 확인했던 사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이 놀랍도록 고도화된 구조를 넘어갔을 때, 우리가 상정했던 거대한 대타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 다시 문제는 깨진 나 자신의 장독에게로 돌아오고, 내가 때로는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며 활자를 낭비하는 것도 그런 탓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제 도로 기분이 나빠질 참이니까, 이제 진짜 이쯤에서 그만둬야지. 흥. 냉장고 안에는 어머니가 사놓은 소주 한 병이 있고, 이러다보면 나까지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게 될 판이니까. 또한 내가 소심한 남자라는 사실까지도 이제는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 이렇게 내게 비밀이 없으니 "사람이 비밀이 없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고 했던 이상의 말이 참으로 옳은 문장임을 이제 나도 아주 잘 알겠다. 이제 사는 것은 분명 필요 이상의 야유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비가 오고, 오늘은 많이 쌀쌀해졌다. 햇빛은 따뜻해보였는데, 바람은 아니었나보다. 학교 가는 길의 은행나무 은행들이 비바람에 떨어지고 나서 거리에서는 어딘지 적막한 구린내가 났다. 그러고보니 어제는 학교에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지더니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흠뻑 젖었었다. 2개 과목 시험을 치르고나니 그도 다 말라있었지만.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이 녹는 동안 가능한 건 사랑에 빠지는 일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그건 그 짧은 시간에 가능한 일의 범위를 알려주기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도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다름 없었다. 샐린저의 소설 <에스메를 위하여>에서 에스메와의 만남은 1955년 4월 30일의 오후 3시 45분에서 4시 15분 사이의 30분에 지나지 않는 만남이었다. 에스메 또한 흠뻑 젖어 있었고, 30분이 지나도 그녀의 웨이브 머리는 되살아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나중에 두 개의 마주보는 벽이 만나게 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흠뻑 젖은 내 몸이 다 마르고, 비도 그친 거리를 걸으면서 그 시간에 가능했을 수많은 변화들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두고 사라져도 나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


사실 시험은 어제 끝났는데,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조모임 때문에 학교로 갔다. 시간이 남아서 도서관에 들렀다. 쑤퉁의 단편집 <홍분>의 "부녀생활"을 읽었다. 이 소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강공밖에 할 줄 모르는 3대의 여성 야구선수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게 있어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보다야 더 그녀들의 중국 여성의 야구 미학에 끌리고 말았다. "나, 제왕의 생애"에서 내가 가장 마음을 빼앗기고만 존재는 다름 아닌 혜선과 옥쇄 소녀였듯이, 언제나 맹목적이었던 그녀들은 오직 하나 밖에 볼줄 몰랐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서글프고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언제나 남성들은 그녀들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옳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나의 시험 공략은 강공인척 하다가 어쩌다보니 눈감고 번트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 결과 또한 오리무중이다. 교수님들은 어쩜 그렇게 내가 약한 구질에 코스만을 던지는 것일까? 나 같은 남자가 그녀들의 강공 스타일을 동경하는 것도 당연한 일임을 이젠 알겠다.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가 진창에 빠졌을 때.
우리는 곧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 <노래의 책>, "귀향" 78. 하인리히 하이네


시간이 부족해서 더 읽기를 그만두고, 컴퓨터로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도서관에 없는 소설 몇 개를 희망자료신청 하고 도서관에서 나와 조모임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 조모임의 성과 또한 우리 학교 정말 빡시게 굴리는구나 하는 환의에 찬 합의를 이끌어내는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결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결말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강공인척 하면서 본의 아니게 번트만 치고 있다. 본의 아니게. 본의 아니게. 집에 돌아와서, 스타리그 송병구와 도재욱의 경기에서, 송병구의 깜짝 놀랄만한 강수를 보고 조금 그가 부러워졌다가, 이내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밤중에 찾아오므로, 나는 그들을 위해 읽던 책을 펼쳐놓고 잠드는 미덕을 안다. 배트 휘두르는 법 좀 알려달라고 적어놔야 겠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198페이지의 시작은,


없답니다.

 
이 책은 176페이지로 끝나거든요. 그러니, 이 책의 198쪽의 시작을 어떻게든 알고 싶다면, 이젠 밤을 새며 상상하는 수밖에 없네요. 다들 한 주간 고생하셨고, 주말 잘 보내시길. 여불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韓國聖史略 한국성사략>

천오백년 내지 일천년전에는
금강산에 오르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별은, 그 발밑에 내려와서 길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宋學 이후, 그것은 다시 올라가서
추켜든 손보다 더 높은데 자리하더니
開化일본인들이 와서 이 손과 별 사이를 虛無로 도벽해 놓았다
그것을 나는 單身으로 側近하여
내 체내의 광맥을 통해, 십이지장까지 이끌어갔으나
거기 끊어진 곳이 있었던가
오늘 새벽에도 별은 거기서 일탈한다
일탈했다가는 또 내려와 관류하고
관류하다간 또 거기 가서 일탈한다
腸을 또 꿰메야겠다


대학교 1학년 때, 서정주 시인의 <화사집>를 읽던 중 '시를 읽다가 사람이 숨이 멎어서 죽으면 누굴 탓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 이 시를 읽으니, 숨이 멎을 뻔 했던 건 아무래도 좋다라고 느꼈답니다. 천상과 지상, 별과 인간이 함께 하던 삶으로부터, 천오백년. 한국전쟁 이후로 1950년대의 모든 생명은 장이 끊어진 삶이 되었는데, 장이 끊어진 시대와 삶 속에서, 이렇게도 장은 자꾸만 끊어지고, 그 때마다 그걸 이내 꿰메어 이어야 겠다고 쓴 시도 있는데, 숨이야 잠깐 멎은들, 그게 뭐 어떻다고.



장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누워서 공부하다 목을 삐긋해서, 며칠을 고생하고 있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며 시험공부도 쉬엄쉬엄 해가며, 집밖으로 한 발자국 안 움직이고 있네요. 그러다가 윤성희 님의 <그 남자의 책 198쪽>이 영화화 되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단지 예고 영상을 보았을 뿐인데, 그 전에 할말이 많았는데, 아주 할 말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대신에 시험공부가 바쁜 이 와중에 윤성희 님 소설을 붙잡고 있어요. 그러니까, 푸코의 말대로 저자란 죽거나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데, 우리가 끊임없이 그에게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로군요. 영화를 만드는 그분들도 아마 그 책을 많이 읽었겠지요. 그 사람들도 이 소설을 읽고나서부터는 무슨 책을 펴든지 198쪽부터 펼쳐 보았을까요? 그게 궁금해졌답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아마 전 영화를 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왠지 모르게, 아마, 쓸쓸해질 테니까. 무슨 책이든 198쪽부터 찾아 봐야 했던, 그 남자의 비밀스러운 198쪽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건, 잘 상상이 가질 않아서.

이제보니 윤성희 님의 <거기, 당신?> 소설집의 198쪽은 이렇게 시작하네요.

"우리는 4월 1일에 결혼을 했다. 결혼기념일이 생일하고 같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잊을 리 없을 거라고 여자가 말했다."

목 아픈 게 다 나으면, 4월 1일에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기념일이 생일하고 같은 사람이나 찾아봐야지, 그런 생각이나 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깨끗하고 연약한 7
이쿠에미 료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24세. 남자. 지금까지 귀신을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태양을 손에 넣어본 일도 없다. 그러니, 태양을 잃는 고통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아무래도 귀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달에 대해서는, 어쩌면, 아마도,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의 다정함이라는 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다정한 사람들은 자신들만 상처입도록 살아가는 사람이로구나.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햇빛의 반사가 없이도 스스로 빛을 내는 달과 같은, 이야기니까. 이쿠에미 료에게 있어서 달이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나도 어렴풋이는 안다.

그러니까, 정말 너무 좋아하는데, 좋아하므로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존재도 있는 법이다. 이제 만화 같은 건, 얼마 보지도 않는데 문득 잠자리에 들어서 이불을 덮어쓰고 그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 10분 이내,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만화책을 펴들었고 자는 시간은 무한정 미뤄지고 말았다. 사는 게 먹먹해지면, 나는 그녀의 만화를 떠올리고, 그 달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건 아무래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데, 살아있는 사람이 햇빛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달에 대해 생각하고 달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멈춰진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내 생각했었어. 나나, 우리들이, 어차피 같은 마음을 안고 있다면, 언제까지고 함께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 하지만, 안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하루타를, 하루타를, 그리고 칸나를, 잊는다해도,
잊고 누군가와 행복한다고 해도, 칸나도 행복할까? 하루타에게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줄까?
그건 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아니, 하지만 그건 안돼. 하지만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하지만, 하지만, 만약, 나, 그동안 내내
그런 생각만 해왔어. ........칸나.


칸나는, 누구를 좋아했을까? 난 알 수가 없으므로, 이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과거의 한 지점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은 깨끗하고, 연약하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줄 수 있으니까. 다정함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있는 다정함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와 달'에서 아키의 말대로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혹은 기억은 잊어도 이미지를, 감각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힘든 일이니까. 그건 환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영원히 변형시키는 힘의 작용이었으니까. 칸나는 핸드폰 문자를 싫어한다. 하루타가 사고로 죽었을 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먹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비추어 보면 영원에 가까운 태양도,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운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언제나 새로울 수는 없으니까, 삶이라는 건 언제나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이야기였으니까.

"나리는.... 애인 없어요? 이럴 때 같이..."
"내 이름은 아키야."
"아키...는 이런 곳에 같이 올 애인이 없어요?"
"그건 프로포즈 하기 전에 확인해."
"저~기~요~!"
"당신이 왜 할머니를 심하게 따르게 됐는가를 얘기해."
"내, 내 이름은 우라라."
"우라라가 할머니의 광팬인 이야기를 해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지를. 왜 내가 나여야만 하는지를. 그러나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까지 멈출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살아가려면. 그래도, 살아가려면.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어야하니까. 물론 그 이야기의 결말이 모든 것을 이야기주지는 않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나는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 가능할 때.

아라타가 본 나는, 다른 사람을 냉정히 관찰하는 말 수 적은 사람인 모양이다.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위해, 간을 하기 전에 1인분의 식사를 덜어놓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가 사실은 내 걱정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아키 오빠는, 아마, 귀신의 진위는 별개로 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포세이돈 곁에
있어주려고 돌아 왔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투닥거려도, 손을 잡고 편의점에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알고 있다.
아라타,
한여름의 태양빛에 반짝이는 반짝이는 바다는 무섭지만,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라면, 조금은 봐도 좋을 것 같아....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조금씩 내려 쌓이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결말 따윈 이야기에서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그건 결말이면서 결말이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내려 쌓이면 그 모든 사실과 거짓과, 삶까지도 덮어버릴 테니까. 결말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거구나. 이쿠에미 료의 만화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잠이 들곤 했다.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를 꿈꾸면서. 그건 멈춰있는 시간이었지만, 꿈이면서 동시에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꿈조차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연약해서.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어떤 것들이었다.

놀이공원은 정말 즐거웠어.
관람차에서, 그 때...
우리들이 작아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칸나가 강하게 인상에 남았어
칸나, 난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다만,
우리들은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


그녀에게도, 누군가 그 달을 함께 바라봐 주기를. 그렇게, 바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이란...

모나리자에 눈썹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의 의견이 존재한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첫번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중 모델이 된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계속해서 보기 위해여 4년이나 그림을 완성시키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그녀가 먼저 죽어버림으로서 눈썹을 그려넣지 않았다는 이야기, 두번째는 당시 눈썹을 뽑는 귀부인들의 유행 때문에 원래부터 대상에 눈썹이 없었다는 이야기, 세번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눈썹을 그렸으나 어떠한 연유로 지워지고 말았다는 이야기.


나로서는 아무래도 레오나르도라고 하면 피자나 좋아하는 말많은 거북이가 오히려 더 친숙한 판이고, 위와 같은 단편적인 지식 밖에는 없으니, 아예 이 문제에 대하여 상상하는 것은 딱 여기서 중지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할 일이 많을 수록 망상으로 도피해버리고마는 습성 때문에 잠시나마 이 문제를 상상하였는데 굳이 앞의 세가지 이야기 중에서라면 첫번째 이야기에 끌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드라마틱한 사연을 통하여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심한 남자라서.


그러다가 한하운 씨를 자연히 떠올리게 되었다. 실은 이번에 한하운에 대한 발표 준비를 하다가 모나리자의 이야기를 나온 것인데, 이제 나로서는 이 둘을 나눠서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드라마틱한 삶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못지 않을 한하운 씨의 눈썹없는 얼굴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 모나리자의 경우로 말하자면 첫번째 설을 따르기로 했을 때, 눈썹을 그려넣는 것야 말로 곧 사랑의 완성을 뜻한다는 말이 된다. 그녀가 그 전에 죽어버렸으니, 아무래도 어떤 이유로든 그 눈썹을 그려넣을 수는 없게 되었다. 눈썹의 자리에 붓을 대는 순간 그 그림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그리하여 결국 불멸의 사랑이 되지 못한 이 이야기 때문에 오히려 눈썹 없는 모나리자는 불멸의 명작이 된다.


그런가 하면 후년에 크게 병세가 회복되어 식모 수술을 권장빋자 "미칠 노릇"이라고 했던 한하운 씨가 결국 눈썹을 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눈썹을 붙인 뒤의 나의 앞날의 인생을 어떻게 하나 하는 흥분에 망설인다. 눈썹은 거의 다 성공이 된다니 정말로 미칠 노릇이라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P씨에게 식모수술을 안하겠다고 말한다. 잘못 살아 온 지난날과 엉뚱한 생각과 운명의 앞날이 혼돈하는 불연속선不連續線이 그칠 줄 모르게 나를 뒤덮는데, 조락凋落하는 낙엽을 휘물아온 바람은 나에게 부딪친다.


그런데 앞서 세가지 논의 가운데 모나리자의 눈썹이 지워졌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눈썹만이 없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런 발언 자체가 정말로 아름답지 못한 말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라면 눈썹이 없는 삶은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인데,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하운은 인환의 거리를 그리워하며 서러운 생명에 대하여 노래해야만 했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눈썹을 그려넣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었다면, 서러운 생명을 노래하는 것도 사랑의 완성이었구나. 그러니까, 그렇게 이치에 맞지 않아서. 그런데, 도무지가 삶이라는 게 이치에 맞는 것이었던가? 이치에 맞게 모나리자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란 정말 쓸쓸하겠구나 생각하고 만다. 한하운 역시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다가, 이제는 파랑새가 되어 날아갔으니 그 또한 이제 우리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불후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치에 맞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눈썹의 부재를 이해할 수 없듯이, 문둥이가 아닌 사람이 문둥이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끝끝내 눈썹을 심지 않은 한하운이 자꾸만 내 마음에 걸린다. 어쩔 수가 없다. 조락하는 낙엽을 휘몰아온 바람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부딪치므로. 그렇게 우리 모두는 서러운 생명이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렇게 외로운 것이구나.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 <손가락 한마디>, 한하운

그러니까 그는, 더이상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