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들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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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쉰여덟 번째 책.

 

★★★☆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에게 도벽이 있다면? 작은 의심은 도화선이 되어 과거의 불행까지 소환해 ‘미스 나이팅게일’의 마음을 소란스러운 지옥으로 만들지만, 제자의 완벽한 연주는 ‘그것으로 충분(17쪽)’하게 만든다. 현실이 주는 작은 위안에 안주하고 삶과 타협하는 결말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까. 현재의 만족은 인생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맞서게 해주는 치료제일까, 아니면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마약 같은 것일까.

 

<장애인>; 타인의 삶에 거리를 두려는 것은 비겁한 외면일까, 사생활의 존중일까. 영어가 서툰 폴란드 형제는 장애인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타인에 대한 이런 무지와 굳이 파고들려 하지 않는 태도는, 제자에게 도난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 캐지 않으려는 (위 작품의) 미스 나이팅게일과 닮았다. 이 작품집 안에 ‘타인’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 중, 가장 강력한 여운을 남긴다.

 

<다리아 카페에서>; 남편과 절친의 불륜으로 이중의 배반을 경험하고 이중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오다가 남편을 빼앗은 친구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불행했음을 알게 된 ‘애니타’는 과연 ‘클레어’에게 용서(연대)의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인가. 암시로 가득한 결말이 인상적이다.

 

<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 범죄를 목적으로 접근했던 자산가에게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머뭇거리게 되는 ‘로잰’의 이야기. 타인을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는 이야기들과는 달리, 타인을 좀 더 알게 됨으로서 스스로의 행동에 변화(혹은 발전)를 경험하는 주인공으로, 위의 <다리아 카페에서>와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읽힌다.

 

<크레스소프 부인>; ‘추근거림’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여자에 대한 ‘에서리지’의 거부감은 미지(未知)는 곧 두려움임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인다. 이야기는 ‘크레스소프 부인’의 사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비교적 드러내는데, 에서리지는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모른다. 엔딩에 이르러 주인공이 갖는 감정은 연민보다 동정에 가까워 보인다.

 

<모르는 여자>;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죽음 앞의 무력함과 더불어 타인이라는 영역은 우리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한 아이가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 아버지가 약속했다. 순종적인 어머니도 약속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을 숨기는 데서 힘을 찾기 위해 도망쳤고, 영원히 돌아가지 않았으며,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다. (127쪽)❞

 

본문 안에서 의미 파악이 어려웠던 위의 문장은 결코 가닿을 수 없는 타인의 진실에 대한 경구처럼 읽힌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어긋나고 되돌아오지 않는 감정은 상처가 될까. 오늘날 스토킹 범죄의 요소가 보이는 이야기로, 이 역시 타인의 진심을 모름으로 생긴 공백을 제멋대로 해석해 채운 결과로 생길 수 있는 소동을 다소 코믹하게 풀어낸다. 현재와 과거를 병치시켜 단순한 친절을 거듭된 오해로 문제를 키우고 긴장을 쌓아가는 구성이 돋보인다.

 

<조토의 천사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도둑질을 한 인물이 판화 작품 속 천사의 모습에 각성 받아 훔친 돈을 되돌려주려 하지만 생각에 그친다. 옳은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 잘 드러난다.

 

<겨울의 목가>; 절절한 사랑 이야기. 그런데 불륜이다. 결말은 당연하고 인물들의 죄책감 역시 마땅하다. 감정의 흐름과 서술, 배경 묘사가 아름답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서 성인이 된 시기를 짧은 분량에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잖게 사라지지 않고 악마들을 풀어놓는다. (202쪽)❞

 

위 문장에서 불륜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 ‘메리 벨라’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자들>; 출생의 비밀이 소재이지만 ‘그 여자가 네 엄마’라는 결말은 없다. 비밀의 열쇠를 쥔 인물의 말은 모호하고 의심을 하는 인물은 함구한다. 인물들을 오리무중 속에 남겨두어 독자들 역시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결말은 <장애인>의 엔딩과 비슷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 간의 거리, 타인이어서 어쩔 수 없는 무지(無知)를 독자들 역시 똑같이 경험한다. 엔딩까지 유지되는 호기심과 긴장감이 매우 좋다.

 

명성은 익히 들어 책 몇 권을 무작정 사놓은 게 오래전인데, 막상 읽은 건 최근이다. 작가 사후 출판된 유고 소설집이라고 하니, 가장 마지막의 작품으로 스타트를 끊은 셈이다. 더 읽고 싶어졌다.

작가가 ‘관찰자’를 고집했던 만큼 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기. 결말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여러 갈래의 생각에 단초를 제공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질문하게 된다. 이거일까, 저거일까. 이야기가 끝나도 그 세계 안에 좀 더 머물게 된다. ‘여운’이라고 해도 좋고 독자를 작품 안에 끌어들이고 경험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별명은 얼핏 ‘레이먼드 카버’를 연상케 하지만 두 작가의 개성이 좀 달라 보인다. 이렇게 말하려니 좀 우스운 게, 카버는 두 권, 트레버는 겨우 한 권 읽었을 뿐이다. 그래도 카버의 소설들보다는 읽기 편하다고 분명하게 말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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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자리에 태워줘
애덤 마스-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에이유앤씨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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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쉰일곱 번째 책.

 

★★★☆

 

‘조그맣고 뚱뚱해서, 왕따 당하는 게 지겨워서(45쪽)’ 학교를 그만둔 ‘콜린’은 우연히 만난 ‘레이’에게 한눈에 반한다. ‘레이’야 말로 킹카 중의 킹카. 바이크 족들의 비공식적인 리더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로 여러모로 비밀에 싸인 인물이다.

바야흐로 부모님 곁을 떠나 레이와 동거를 시작하는 콜린. 동시에 그의 게이 라이프도 문이 열린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을까.

 

시종일관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콜린은 비교적 투명하다. 콜린의 진짜 삶이 레이를 만남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레이와 함께 하는 ‘색다른’ 경험들도 전혀 이질적인 게 아니다. 바이커 그룹 안에서의 ‘주종’ 관계는 콜린의 성적 판타지(‘나를 무시하는 남자만이 진짜 남자인 것처럼, 129쪽’)에 적잖이 부합한다.

 

그런 이유로 레이에 대한 콜린의 감정이 거짓이나 자기기만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대의 외모와 행위가 주는 자극에 콜린이 반응한 거라면,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중에 스스로 깨닫듯이(혹은 고백하듯이) 콜린은 레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전혀 모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레이는? 레이는 철벽에 철벽을 두른 모습으로만 묘사된다. 그 묘사조차 콜린의 눈과 의식을 거친다. 그 모습만으로 레이라는 인물을 독자들이 파악하기란 완전히 불가능하다.

콜린을 가까이 두고 섹스라는 친밀한 행동을 하고 친구들과 더불어 어울리지만, 일반적인 연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다. 가끔 보이는 친절과 배려 역시 사랑이라고 단언하기엔 부족하다.

이 두 사람의 진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작가의 의도처럼 보인다. 이 사람은 안개 속에, 불명확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암시만 흘릴 뿐인 미스터리로 ‘존재했어야 했다’. 실제로 우리는 잘 모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닌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이 작품은 일반적인 ‘퀴어 로맨스’ 서사의 영역 밖에 있다. 이게 바로 사랑이야, 혹은 이건 사랑이 아니야, 라고 하기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겹겹의 층위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도록 독자들을 유도한다.

작가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라기보다 ‘진실한’ 러브스토리를 쓰고 싶었다고 하는데, 과연 진실이 무엇일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릴 때 상대의 무엇이 우리를 자극하는가. 가장 원초적인 어떤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드물지 않게 보이는 성행위 장면이 거슬리지 않는 건 작가가 그 행동을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 분량의 삼분의 일 정도가 레이가 퇴장한 후의 이야기인데, 작가는 이 부분을 콜린의 애도로 채운다. 콜린에게 애도란 기억하기다. 그런데 레이에 대해서 기억할 것이 별로 없다. 뒤늦게 찾아오는 호기심에 후회가 들지만 레이와 함께 한 육 년이란 세월동안 콜린은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애써 잠재웠다. 왜?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암묵적인 약속, 혹은 동의 때문이었다. 레이의 곁에서는 그게 최선이었고 콜린은 최선을 다했다. 콜린은 레이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모호한 감정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건 인간의, 인간적인, 인간을 향한 ‘무엇’으로 보인다. 그 무엇이 무엇일지는 독자들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게 사랑이거나 아니거나, 아무래도 좋지만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먼저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두 사람 사이에 버티고 있는 적나라한 계급의식이, 가스라이팅과 착취, 학대를 전제로 했다며 이들의 관계가 불편한 독자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리고 그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말에 터무니없다고 분명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BDSM(Bondage/Discipline, Dominance/Submission, Sadism/Masochism)’이라는 소재는 인물들의 관계와 소통의 방식일 뿐 이야기를 이끄는 주동적인 장치도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관계 안에 혐오의 시선과 의견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영화와 비교하게 된다. 원작을 읽으며 영화를 위한 각색 작업이 참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기본 설정은 그대로인데 디테일에 변화가 있다. 유머와 드라마가 첨가되었고 레이라는 인물이 (설명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비교적 드러난다.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과 추측으로나마 채울 수 있는 틈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덕분에 그들의 감정 읽기가 다소 쉽다. 영화가 로맨스+드라마의 외형을 갖췄다면, 소설은 콜린의 자신감 회복과 내적 성장을 그린 드라마, 인간의 본능에 천착한 심리드라마로 읽혔다. 작품 어딘가에 언급되듯, ‘푸른 수염’에게 잠긴 방문들이 없었다면 여자들이 끔찍한 살인자에게 매혹되었을까.

 

작품을 돌이켜보면, 가장 두드러졌던 감정은 로맨틱함이나 에로틱함보다 긴장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내밀하면서도 끊임없는 긴장감은 주로 콜린이 주도하지만 그 역시 ‘베일에 싸인’ 레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의 문체가 의외로 수다스럽다. 삼천포로 빠지는 문장들이 더러 있는데 곤란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나 잘 그려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기는 했다. 영국의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 문해력 문제일 수도, 혹은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

 

소설 원제는 ‘뒷자리에 태워줘’ 도 아니고 영화의 원제인 ‘Pillion’도 아닌, ≪Box Hill; a Story of Low Self-Esteem≫이다. box hill은 ‘회양목(boxtree) 언덕’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두 인물의 운명적인 첫 조우가 이뤄진 장소이다. 이곳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난다. 어리광 가득한 번역 제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트콤에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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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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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쉰여섯 번째 책.

 

★★★

 

비밀스러운 과거로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미티’는 이웃집 ‘레나’에게 매혹된다. 빼어난 외모에 인형의 집 같은 저택에 윤택한 살림. 하지만 그 모든 부유함은 레나의 것이 아닌, 남자친구 ‘서배스천’의 소유이다. 미티의 동거인인 노년의 ‘베델’은 아름다운 레나에게 질투 어린 편견을 갖고 있다. 베델에게도 아픈 상처가 있다. 그리고 미티가 보기에 레나는 남자친구의 통제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기본적으로 여성 (퀴어) 서사에 A.I.를 위시한 첨단 과학, 어둠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 남성성의 폭력과 희생되는 여성성, 여성들의 연대, 과거와의 화해, 나는 누구일까, 라는 실존적인 질문까지, 모든 재료들이 이야기 안에서 비교적 조화롭다. 하지만 다소 산만하다.

 

이야기는 주로 미티의 시각으로 전개되는데 미티의 서사는 그냥 평범하다.

정작 흥미로웠던 인물은 따로 있는데 바로 레나. 과연 이 사람의 정체는 뭘까. 첨단 기술이 낳은 결과물일까, 아니면 단순히 트로피 와이프에 불과한, 남성성의 희생양일까. 어느 정도 힌트와 암시만 난무할 뿐, 작품이 끝나고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레나의 정체는 모호한 결말과 더불어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어떤 경우로든 레나는 통제 가능한,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는 존재다. 느닷없이 청소기를 돌리고 제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행동은 자신에게 없는 주체성과 독립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인공성이 농후한 집을 떠나 미지의 초원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레나에게 적절한 퇴장이다.

 

이러한 레나의 캐릭터 성은 양면성을 갖는다. 레나는 첨단 기술의 노예처럼 되어 가는 현 세태를 비판하는 도구로도 기능하고 억압받는 여성성을 대표하는 기능도 하는데, 이는 작품의 감상을 다양하게 해주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을 S.F. 범주에서 읽어도 될까. 큰 반감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스릴러 장르로 소비하는 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퀴어 서사와 살인사건 등은 모난 돌처럼 도드라져 군더더기처럼 보여 작가가 취사선택에 실패한 것처럼도 보인다. 데뷔작이니 만큼 쓰고 싶은 것들을 한 작품에 모두 쏟아 부은 느낌이랄까. 두 작품을 하나로 합친 것처럼도 보인다.

 

첨단 과학 기술을 폭력적이고 억압하는 남성성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지만 이는 어느 정도 작가의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혁신’은 기존의 질서를 와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반란’이다. 첨단 기술은 인간에게 편의를 주는 쪽으로 발전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들은 인간을 길들이다가 결국엔 옭죈다. 기계의 가치는 인간이 그것에 얼마나 종속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온갖 편리한 기계에 굴복하고 인간성을 잃어간다.

 

책장을 덮고 생각해 보면, 이 부분에서 작가의 통찰력이 가장 빛나지 않았나 싶다. 반면, 레나가 정말 ‘도망친 기계’라면, 여성의 외관을 갖추기만 했을 뿐 성별이 없으므로 ‘가족오락관’에서 성대결 펼치듯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여성들의 주체성과 연대를 말하기 위해 꼭 남성을 적으로 돌려야 했을까. 남성을 최대 빌런, 주적으로 삼는 건 어느새 여성 서사의 통과의례, 필수 요소처럼 되어 버렸다. 불필요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오히려 폭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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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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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쉰다섯 번째 책.

 

★★★

 

<당신의 손끝>; 무모하고 얼마간 자초한 불행을 ‘지금껏 겪은 모든 악몽(36쪽)’이라 말하는 ‘효원’의 행동에 공감이나 동정이 가질 않는다. 효원은 수강생을 약탈하고 경험도 없는 학원 운영에 무작정 달려든다. 학원 강사로서의 경력과 학원장의 업무는 별개의 문제다. 심지어 말미엔 본인의 허락도 없이 ‘주영’의 그림을 이용한다. 이런 얌체짓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하는 짓은 얄밉지만 연민을 가져 주세요, 일까. 아니면 이 뻔뻔한 여자 좀 보세요, 일까. 효원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 면죄부가 되어줄까.

 

<태양 아래 반짝이는>; 거의 헐벗기 쉬운 한여름 바닷가라는 공간 배경은 화자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적절한 무대로 보인다. 동료, ‘시현’과의 일탈적 행동으로 탄력받은 화자는 내면의 파괴 본능을 서서히 불러일으킨다.

화자는 직업 윤리를 저버림으로서 자신의 틀, 자신을 옭아매는 사회적 의무를 파괴하고 고의적인 불륜 관계로 타인을 파괴하고자 하며, 동시에 그녀가 속했다고 믿는 계급의 벽을 파괴하려 한다. 이런 파괴적 행동은 여인의 진짜 정체, 본질을 알고 난 후 형태를 바꾼다. 화자가 여자의 ‘이용 가치’를 얼마간 셈하고 있지 않았을까.

 

<피아노>; ‘버린 것이지만 아직도 내 소유’라고 주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다. ‘혜심’이 집착하고 있는 건 피아노 자체보다 피아노 의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아노 의자에 보관된 ‘아이들의 편지’를 되찾으려 한다. 그 편지들엔 자신의 역사에 얽힌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준용’이의 편지가 소중한 주인공이 정작 당사자인 준용에 대해서는 냉정한 아이러니를 통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 이야기로 읽힌다.

 

<그 아이>와 <마스크는 통행증>; 짧은 분량이지만 당대의 현실이 잘 반영된 르포타주이다. 훗날 시대를 연구하는 통속 자료나 사료로서의 의미도 보였다.

오늘날 비틀린 소비 문화를 보여준 <그 아이>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이런 혼란과 공포의 시간들조차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통행증은 마스크>는 짜증과 불안의 정서가 잘 보였다.

 

<익명의 마왕으로부터>와 <유령의 집>; 소품으로 읽히는 두 작품은 공허한 작품들이다.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달리 보이는 게 거의 없다.

<익명의 마왕으로부터> 진짜 악인(성격)이 아니라 악당(역할)일 뿐인 마왕의 하소연이 재치있고 위트 있게 들려진다. 이런 낭창낭창한 톤이 작가에게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유령의 집>은 ‘귀신들린 집’ 이야기를 하나 써야겠다는 욕구와 끔찍한 이미지 하나로 밀고나간 작품이다. 실패한 자영업자 이야기로 읽기엔 부족하다. 이야기에 나오는 공간은 정확히 ‘집’이 아니다.

 

<모자이크> 과연 무엇이, 어디까지기 ‘진짜 나’일까, 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가까이서 보면 색의 조각일 뿐이지만 거리를 두고 보아야 형체와 명암 등이 비로소 보이는 모자이크 화(畵)처럼 여러 모습의 나, 여러 가면을 쓴 나, 결국 그 총체적 합으로서의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 ‘나’임을 말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화자는 모자이크(blur)라는 ‘익명’ 뒤에 숨어 은밀하면서 집요한 폭력을 휘둘러 한 이난을 파멸로 이끈다. 모자이크(익명)는 화자를 보호하고 숨겨준다. 그 뒤에서는 안전이 보장된다. 그러므로 일탈이 가능하고 비난과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 탐색과 폭력의 이야기가 잘 안 붙어 산만하게 읽힌다. 전시된(보이는) 모습과 실재하는 모습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고루하다. 소재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작가의 솜씨도 그렇다. 작가의 고유한 시선이나 새로운 목소리가 없어 보여 지루하고 식상한, 개성 없는 작품으로 읽었다. 어디선가 빌려온 문장도 한몫한다. 여러 모습들을 연출하는 화자의 모습은 ‘부캐’나 ‘페르소나’보다 ‘정신분열’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듯 보인다.

 

<조망> ‘수하’라는 인물이 가장 눈에 띈다. ‘그들만큼 내가 행복해지는 게 어려우니, 그들이 자신만큼 비참해져야 한다고(165쪽)’ 생각하는 수하는 똑같이 불행해지길 바라는, 물에 잠기자 모든 것이 공평해졌다고 생각하는 수하는 평균의 기준을 행복이 아닌 불행에 두는 사람이고, 너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쌤통’의 심리(schadenfreud)를 자명히 드러낸다.

이야기 속에서 ‘물’이라는 소재는 과거의 소거,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갖는다. 이는 ‘삶에 reset이 가능하다면, 다음의 (다시 시작한) 삶은 괜찮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좀 장황하다. ‘수하’의 과거 경험과 현재를 중첩시키는 건 보기에 그럴싸하지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 그저 ‘기교’에 불과해 보인다. 아이의 등장도 뜬금없고 세상에 대해 거의 악의에 가까운 열패감을 갖고 있는 수하가 건네는 위로도 공감이 어렵다. 작품 자체도 공산품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호하다.

여러 면에서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괴 비슷한 점이 많은데,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게 되면 이 작품의 허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작가가 말하는 조망이 ‘眺望’인지 ‘鳥-’인지, 제목에 부연도 필요해 보인다.

 

<딸과 깍 사이> 이 책 안에서 가장 모양새가 잘 나온, 가장 만족한 작품이었다. 직장에서 ‘사형선고’ 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여자가 짝사랑하는 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단순하고 지루한 업무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고뇌와 실제적인 경제력을 해결해 주지만 전혀 즐길 수 없을뿐더러 혐오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업무에 대한 애증이 로맨틱한 감정과 잘못 보낸 전체 메일 같은 사건 등으로 잘 포장됐다. 직장인으로서의 번민이라는 외부적인 면과 짝사랑이라는 내면적인 면을 양립시키면서도 서로 부딪힘 없이 잘 조화시킨 구성이 인상적이며, 유연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솜씨도 좋아 보인다. 원한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뜨개질’이란 소재도 실수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는 관대함, 또 다른 기회와 가능성을 위한 것 같아 유용하고 적절해 보인다. 이야기의 온도도 10도 정도 올려주는 데 기여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좋았고 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현실적인 노동, 삶의 고단함, 노동 현장의 인물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가 많다. 좀 더 현실에 밀착한, 현실 지향의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부희령’의 작품집 ≪꽃≫을 생각나게 하는데, 부희령의 이야기들보다 피상적이고 얄팍하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고려한다면 심각하게 거슬리는 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들마다 관통하는 일관적인 core가 있어, 표제를 의식하게 된다. 행동의 의도, 선의와 악의, 그리고 그것이 오해되고 곡해되는 양상들이 읽히는데, 작가의 실제 지향점이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작품집 전체를 아우르는 이런 통일된 감각은 작품들의 완성도를 떠나 모종의 미적인 균형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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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온 소년
개럿 카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파머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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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쉰네 번째 책.

 

★★★☆

 

아일랜드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 아이가 한 명 발견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정적이고 성실한 어부 ‘앰브로즈’가 입양을 결정한다. 옛날 표현대로라면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빤히 알 정도로 워낙 작은 공동체라 앰브로즈의 섣부른 행동이 스캔들을 부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앰브로즈 부부는 아이에게 ‘브렌던’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에게 ‘바다에서 온 소년’이란 별명을 붙여준다.

 

브렌던이 이끄는 뭔가 신비롭고 영적인 이야기가 예상되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드라마틱한 오프닝에 비해 아이는 평범하게 자라고 이야기의 중심도 아니다. 앰브로즈와 ‘크리스틴’ 부부는 투철한 공동체 의식에 가족애까지 겸비한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부부의 아들 ‘데클란’이 브렌던에게 질투를 느끼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배경으로 서로 아끼고 존중할 줄 아는 이웃들이 등장한다. 소위 ‘빌런’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착한 소설’이다.

이다지도 착해 빠진 소설이라니.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독자를 조바심 내게 만드는 국면도 거의 없다. 이런 느슨한 소설이 과연 재미있을까.

 

충분히 재미있다. 시작하자마자 이야기에 푹 빠져서 읽었다. 초반 원고만 보고 출판사들이 경쟁했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이 작품의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인물들이 생생하다’는 말은 식상하지만 그 표현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가족에 헌신하면서도 빠르게 변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앰브로즈는 현재의 ‘아재’ 세대의 특징들을 답습한다. 친정아버지와의 애증과 갈등을 억눌러야 하는 크리스틴이나 아버지를 두고 입양된 형제와 경쟁하는 데클란도 저러지 말았으면 하면서도 이해가 간다. 혼기를 놓쳐 병든 아버지와 함께 집에 남은, 크리스틴의 언니 ‘필리스’는 또 어떤가. 자매의 고집불통 아버지 ‘유넌’ 또한 충분히 동정이 간다.

 

이야기는 이들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고 데클란도, 브렌던도 성장하지만 이 작품은 가족 소설에 더 가깝게 읽힌다. 여기에 브렌던을 둘러싼 마을의 소문, 형제 간의 질투와 경쟁, 장래에 대한 고민과 방황, 부양과 간병의 문제, 가장의 실직과 죽음 등의 사건들이 미묘한 균열과 파장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들은 당황하거나 갈등하고 싸우기보다 타협하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쪽을 택한다. 이들에게 과거는 있으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혹은 가족을 둘러싼 걱정이 있으나 그건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이다. 그들은 현재에,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한다.

 

반목이나 갈등보다 삶 자체에 주안점을 둔 이야기는 문득 의심이나 회의가 들거나 난데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우리가 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묻는다. 이 착해 빠진 이야기는 위기 자체는 심각하지만 인물들이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차라리 경쾌하다. 삶의 허들을 쉽게 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태도는 안일하기보다는 현명해 보인다. 어마어마한 태산 앞에서 좌절하느냐, 한 걸음이라도 산을 향해 다가가느냐는 우리의 결정이고 이는 곧 ‘용기’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도시가 배경이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폐쇄적인, 다소 고립된 느낌의 바닷가 마을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처럼 보인다. 풍광 묘사도 생생하지만, 작가는 바다 위에서의 조업 현장을 매우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다. 번역 과정에서 난관이 있었을 법도 한데, 매끄러운 우리말 문장으로 옮겨온 역자의 능력과 수고 또한 언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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