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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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된 달콤함. 압축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솜사탕 같은 이야기.

많은 인물들이 각자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너무 쉽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싶으면 진정되고 또 어떤 일이 틀어지는가 싶으면 해결된다. 사는 게 이리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사는 이야기’가 감동이나 특별한 의미를 줄 수는 있으나, 이 작품은 아니다.

 

푸릇푸릇 물 오른 시절,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감성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오랜만에 읽으니 많은 게 달라 보인다.

나는 변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작가를 보니, 뭔가 씁쓸하다. 아니, 다행인 건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고수해야 할 ‘무엇’이 있는 게, 작가로서는 무척 다행일 것이다. 독자로서는 좀 식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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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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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은 수질 오염으로 인한 심해 괴물이 등장한다. ‘네스 호’의 괴물이나 ‘봉준호’의 영화 『괴물』을 연상하게 만든다. 상황에 따라 타인을 의지하기도,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의 계략을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에 비유한다.

 

<로취에서의 만남>은 크리스마스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인물이 우연히 신(神)과 조우하며 교훈을 얻는 이야기다.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연극을 소재로 한 <카토>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페르소나의 힘, 예술의 기능을 단초로 인간과 사회를 통찰한다. 거듭 읽을수록 의미가 깊고 넓어지는 이 작품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많이 겹친다.

 

<물 아래서>는 연어의 분비선을 인간에게 이식하여 인어가 된 연인의 이야기다. 현재의 호러나 SF영화들에서 익숙한 설정이라 흥미가 생긴다.

 

일기 형식으로 된 <우리들의 여행>은 과거 ‘남녀 연애백서’를 생각하게 하는 티격태격 연애담이다. 결말이 우습다.

 

오늘날 건강 보조 식품의 오남용을 경고한 듯한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 전염되는 냄새로 인한 소동을 그린 <어떤 냄새>, <패배한 사랑>이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이란 제목으로 묶여 있다.

 

그 외, ‘자기 방귀 구린 줄 모르고 남 방귀 타박준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나는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 등이 실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다.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그저 남미 작가로 퉁쳐지는 데엔 아쉬움이 있다.

작품들마다 매력이 있는데, <카토>가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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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혼
미셸 리치먼드 지음, 김예진 옮김 / 시공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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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사회적인 약속이지만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콘크리트가 아닌 유리 같은 관계랄까. 하지만 이 위태로운 약속에 ‘강제성’이 끼어든다면? 이를테면 이런 거. 두 사람은 바람을 피우거나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게 플러팅 비슷하거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이 정도까지는 이해가 된다. 분기별로 서로에게 선물을 하고 부부만의 여행을 가고, 기타 등등, 이런 사항들이 의무가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를 어기거나 이행하지 못할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 감금되거나 육체적인 처벌이 가해진다면 어떨까.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갓 결혼한 ‘앨리스’와 ‘제이크’ 부부는 ‘협약(the Marriage Pact)’에 참가할 것을 제안 받고 서류에 사인하고 그들의 일원이 된다. 호기심 반 장난 반이었으나 일이 점점 커진다. 그들을 감시받고 평가받는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로 두 사람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육체적 고문이 현실화된다. 그리고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단순히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잘 살아’ 정도가 아니라 ‘잘 살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다’ 이런 수준이니, 그냥 ‘나 안 할래’ 하고 탈퇴하던가 경찰에 신고하던가 그럼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도 안 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부부는 어떻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작가가 그럴 듯하게 설득한다. 판이 짜이고 나니 모든 상황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사랑과 결혼이 과연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협정’이라는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싸움까지 더해지고 폭력의 강도가 수위를 높이니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흥미진진해진다. 두 사람의 앞날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작가가 결혼에 무슨 한이 졌나, 싶을 정도로 가학적인 이야기인데 불편하면서도 그 재미가 쏠쏠하다. 위험천만한 협정의 테두리 안에서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내면이 잘 그려졌다. 긴장감 하나는 끝내준다. 분량이 좀 많다 싶은데(607쪽) 휘리릭 읽힌다. 암담한 엔딩은 여러 상징적 의미를 유추하게 만들어 여운이 길다.

 

전반적으로 ‘스티븐 킹’의 단편, <금연주식회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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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잠에서 깼다 - 러시아 고딕 소설
안토니 포고렐스키 외 지음, 김경준 옮김 / 미행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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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무(無)의 세계에 없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별과 태양에 젖어 있는 당신들의 모든 삶은 단지… 스틱스 강 바깥의 삶에 불과합니다. 산다는 건 죽음을 회피하는 행위죠. 사실 ‘무의 세계’에서 도망친 당신네 인간들은 모두 ‘무의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조만간 말이죠. 그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 (<스틱스강 다리>, 403쪽)❞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는 전형적인 마녀가 등장한다. 돈 같은 조건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는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난 지금 잠에서 깼다-사이코패스의 수기>은 끔찍한 살인자의 고백록이다.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입체경-기묘한 이야기>는 신비한 입체경을 통해 사진 속 과거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 이야기다. 기발한 착상에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상상-한밤의 이야기>에서는 스물여섯 살이기도 하면서 여든한 살인 여자가 등장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묻는다.

 

<칼리오스트로 백작>에서는 초상화 속 여인이 흑마술에 의해 되살아난 후의 소동을 그리며, 환상보다는 현실을 살라고 조언한다. 기괴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작풍이 인상적이다.

 

<미친 화가>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으로도, 예술의 개인성, 주관성을 옹호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붉은 면류관>은 전쟁으로 죽은 동생의 유령으로 미쳐가는 형의 모습을 그렸다. 폭력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1차세계대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한 작가의 경험이 드러난다.

 

<심령회>는 코믹한 꽁트처럼 읽힌다. 흉흉한 현실에 사람들이 어떻게 ‘미신’에 의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베네치아 거울-유리인간의 엽기 행각>은 인상적인 작품이다. ‘귀신들린 거울’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행해왔던 클리셰라고 쳐도 ‘도플갱어’라는 독일의 민속까지 차용한 점은 특이하다(이 시대 러시아에서). ‘거울에 갇힌 나’와 ‘거울을 탈출한 나의 이미지’가 선과 악의 대결을 펼친다.

 

<쥐잡이꾼>은 이 책에서 가장 ‘고딕소설’다운 이야기다. ‘조용하고 인적 없는 방 260개를 연못에 담긴 물처럼 품고 있는 중앙은행 건물(340쪽)’은 고딕 소설의 훌륭한 무대가 된다. 인간과 쥐의 한판 대결을 중심으로 고난에 빠진 주인공의 모험에 로맨스가 가미된, 빠져들어 머물기 좋은 넉넉한 분량에 완벽한 구성, 긴장감까지 갖춘 이 책의 백미이다. 인간의 습성을 모방하는 ‘쥐’는 스티븐 킹이나 H. P. 러브크래프트를 생각나게 한다.

 

<스틱스 강 다리>는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쟁과 자살 등으로 늘어나는 때 이른 죽음으로 미어터지는 저승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틱스 강바닥에 사는 두꺼비가 등장한다.

 

<노파>는 기괴한 설정에 엉뚱한 전개의 작품인데 결말이 모호해 미완의 작품으로 읽힌다.

 

1800년대부터 1930년까지 러시아에서 발표된 고딕 단편 열두 편이 실려 있다. 전형적인 고딕 소설보다는 ‘환상소설’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더 많다. 무서운 이야기들도 있고 신비롭거나 기묘한 이야기,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내는 작품들도 있고 로맨틱하고 진중하거나 당대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 골고루 실렸다. 이런 앤솔러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

 

사족.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는데, 당시 러시아에 ‘톨스토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세 명 있다는 사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알렉세이 콘스타티노비치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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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이웃
이수안 지음 / 문학수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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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수많은 선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선 밖으로 조금씩 밀려났지만 선 밖의 세상이 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울타리가 좀 더 넓어진 뿐이었다. (<정성을 다하는 생활>, 295쪽)❞

 

<소셜 다이닝>은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아이러니와 현대인들의 가면을 기발한 소재와 수다스러운 필체로 유쾌하게 폭로한다.

<반려>는 타인의 불행을 기회로 삼으려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그늘에 가려져 소외되는 인간을 대비시키며 진정한 인간애란 무엇인지 묻는다.

우리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며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앨리스 타운>과 현대인들의 배타성과 집단이기주의를 주거 커뮤니티의 폐쇄성에 빗댄 <홈 스위트 홈>은 연작처럼 읽힌다.

선의와 악의가 공존하는 내면을 보여주는 <테라스가 있는 옥상 별채>는 다면적인 이야기다. 성급한 실수 뒤에 도사린 편견을 고발하는 이야기로 읽히는가 하면, 앞둔 것이라곤 상실과 외로움뿐인 노년의 위태로운 삶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려낸 이야기로도 읽힌다.

 

마지막 두 작품은 이 책의 백미이다.

‘save the best for last’라는 말로 감상을 대신할 수 있는 <도그 워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달한다. 우리의 최선은 아직 남아 있고 최악은 닥치지도 않았다는 위로는 어떤 불행도 결국 넘어설 수 있으리란 용기를 부른다.

정말 별것 아닌 소재로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싶은 <정성을 다하는 생활> 역시 희망과 긍정의 이야기다. 위 두 작품은 눈부신 낙관이 오히려 눈물샘을 자극한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싱그러운 공기가 콧등을 간질이는 초원에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을 남긴다.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담아낸 이야기들이다.

 

여성으로서의 긍지와 연대를 말하려 한 듯한 <세상의 기원>과 다소 모호한 결말의 <모나로부터 모나에게>는 어려운 작품이었다.

 

‘이수안’의 첫 소설집. 따뜻함과 서늘함, 유쾌함과 건조함이 공존하는 아홉 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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