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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잠에서 깼다 - 러시아 고딕 소설
안토니 포고렐스키 외 지음, 김경준 옮김 / 미행 / 2024년 2월
평점 :
❝오, 무(無)의 세계에 없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별과 태양에 젖어 있는 당신들의 모든 삶은 단지… 스틱스 강 바깥의 삶에 불과합니다. 산다는 건 죽음을 회피하는 행위죠. 사실 ‘무의 세계’에서 도망친 당신네 인간들은 모두 ‘무의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조만간 말이죠. 그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 (<스틱스강 다리>, 403쪽)❞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는 전형적인 마녀가 등장한다. 돈 같은 조건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는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난 지금 잠에서 깼다-사이코패스의 수기>은 끔찍한 살인자의 고백록이다.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입체경-기묘한 이야기>는 신비한 입체경을 통해 사진 속 과거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 이야기다. 기발한 착상에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상상-한밤의 이야기>에서는 스물여섯 살이기도 하면서 여든한 살인 여자가 등장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묻는다.
<칼리오스트로 백작>에서는 초상화 속 여인이 흑마술에 의해 되살아난 후의 소동을 그리며, 환상보다는 현실을 살라고 조언한다. 기괴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작풍이 인상적이다.
<미친 화가>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으로도, 예술의 개인성, 주관성을 옹호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붉은 면류관>은 전쟁으로 죽은 동생의 유령으로 미쳐가는 형의 모습을 그렸다. 폭력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1차세계대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한 작가의 경험이 드러난다.
<심령회>는 코믹한 꽁트처럼 읽힌다. 흉흉한 현실에 사람들이 어떻게 ‘미신’에 의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베네치아 거울-유리인간의 엽기 행각>은 인상적인 작품이다. ‘귀신들린 거울’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행해왔던 클리셰라고 쳐도 ‘도플갱어’라는 독일의 민속까지 차용한 점은 특이하다(이 시대 러시아에서). ‘거울에 갇힌 나’와 ‘거울을 탈출한 나의 이미지’가 선과 악의 대결을 펼친다.
<쥐잡이꾼>은 이 책에서 가장 ‘고딕소설’다운 이야기다. ‘조용하고 인적 없는 방 260개를 연못에 담긴 물처럼 품고 있는 중앙은행 건물(340쪽)’은 고딕 소설의 훌륭한 무대가 된다. 인간과 쥐의 한판 대결을 중심으로 고난에 빠진 주인공의 모험에 로맨스가 가미된, 빠져들어 머물기 좋은 넉넉한 분량에 완벽한 구성, 긴장감까지 갖춘 이 책의 백미이다. 인간의 습성을 모방하는 ‘쥐’는 스티븐 킹이나 H. P. 러브크래프트를 생각나게 한다.
<스틱스 강 다리>는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쟁과 자살 등으로 늘어나는 때 이른 죽음으로 미어터지는 저승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틱스 강바닥에 사는 두꺼비가 등장한다.
<노파>는 기괴한 설정에 엉뚱한 전개의 작품인데 결말이 모호해 미완의 작품으로 읽힌다.
1800년대부터 1930년까지 러시아에서 발표된 고딕 단편 열두 편이 실려 있다. 전형적인 고딕 소설보다는 ‘환상소설’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더 많다. 무서운 이야기들도 있고 신비롭거나 기묘한 이야기,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내는 작품들도 있고 로맨틱하고 진중하거나 당대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 골고루 실렸다. 이런 앤솔러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
사족.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는데, 당시 러시아에 ‘톨스토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세 명 있다는 사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알렉세이 콘스타티노비치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