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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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소설의 배경과 ‘코넬 울리치’ 풍의 구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들만으로 작가의 ‘장르적인 취향’ 운운하기엔 단서가 빈약하겠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 썩 잘 해냈다. 중반까지는 흥미를 돋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호기심도 생긴다. 잘 읽힌다. 하지만 결과 먼저 적자면,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영화의 시놉시스처럼 읽힌다.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야기는 마치 인정사정 안 봐주고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 같다. 이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는 얘기보다 ‘폭주한다’는 감상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야기가 주입된다. 독자 머릿속에 그저 밀고 들어오는 이야기는 매력없다. 소위 능동적인 독서가 힘들다는 얘기다.

거의 모든 설정이 ‘모’ 아니면 ‘도’다. 이 정도면 동화나 설화에 가깝다. 이런 극단성(혹은 막장성) 역시 좋은 재료가 될 수 있겠지만, 작가는 그 재료를 다루는 방법을 잘 모르는 듯 보인다. 작가는 거의 모든 경우에 너무 진지하다. 건조하고 유머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쌈마이’를 ‘쌈마이’스럽게 다룰 때 쌈마이의 쓸모와 가치가 증명된다.

 

중반 이후로 속도가 갑자기 뚝 떨어지며 지루해지는 데엔 이유가 있다. 각 챕터마다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켜 변화를 주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야기 전체의 리듬에 완급이 없다. 인물들마다 하소연하기 바쁘다. 사연 풀이 이상은 아니다. 내내 이런 식이니 독자는 기 빨린다. 맥이 빠져서 책을 들고 있기가 힘들다.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모호하다.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종교를 고발하는 줄 알았더니 부동산 시장의 그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느닷없이 ‘가족’의 환상을 깨려고 나선다. 깃발이 여러 개라고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다. 깃발들끼리의 원근이 중요하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깃발, 또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깃발. 이 작품은 희미한 깃발들이 서로 질세라 펄럭대는 모양새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한 ‘빌런’들이 진정한, 모두들 공감할 수 있는 악당인지도 더 숙고했어야 했다.

 

출판사나 서점에서는 이 소설을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선전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자칫 편견을 심어줄까 우려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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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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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강제 이주의 역사를 되짚어 보게 만들며, 낯선 타국에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아들을 삶에서 배제시킨 아버지에 비유한 <고려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탈북민으로 영국에 정착한 아버지를 둔 2세들의 이야기로서, 낯도 노도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외로운 배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크로머>, 80년대 스페인이라는 배경, 카자흐스탄 고려인인 인물, 스파이, 오인된 신분 등의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한 소재로 ‘쇼’에 불과한 국제 정세 틈바구니에 끼인 약소국가의 운명을 한 개인의 불행한 삶과 겹쳐 보여준 <코마로프> 등도 좋았다.

 

그 외,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고향을 찾은 인물을 통해 기억의 힘을 증명하고 희망을 전달하는 <달의 골짜기>, 뉴욕을 배경으로 여행이나 모험에 불과한 이민자로서의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타인의 손을 맞잡으려는 이야기인 <보선>, 1881년 연해주 고려인 정착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서술한 작품으로, 유령보다 더 무서운 침략당한 역사를 보여주려 한 것 같은 <벌집과 꿀>, 1600년대의 일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전쟁 포로로 붙잡혀 온 조선 아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사무라이의 이야기인 <역참에서> 등이 실려 있다.

 

시공간은 다양하지만 인물은 공통적이다. 그들의 배경과 역사, 사연과 상황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다. ‘디아스포라 문학’란 바로 이런 것, 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외롭고 고요한 이야기 저변엔 슬픔이 흐른다. 이야기마다 아픔이, 갈팡질팡하는 정체성과 역사에 남겨진 크고작은 생채기가 스며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아픔을 헤아려 문학으로 승화시킨 이야기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작가 ‘폴 윤’의 존재가 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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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 블랙 ㅣ 블랙 캣(Black Cat) 14
앤 클리브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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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평범하고 범죄 동기도 단순하며 ‘레드 헤링(red herring)’일 게 분명한 용의자도 너무 뻔하다. 단서들을 추적하고 살인범이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에 긴박감이랄까, 독자를 궁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장르적인 묘미가 부족했다. 범죄의 진상이 밝혀질 때에도 그냥 그랬는가보다, 해버린다.

 

‘에드거 상’ 수상작이고 작가의 고향(영국)에서 TV드라마로 만들었을 정도로 성공작이었다지만 내겐 다소 지루했던 작품. 다 읽고 며칠 지나면 휘발될, 그런 부류의 이야기. 못난 작품은 아닌데, 이 작품만의 독창적인 매력, 개성이 별로 없다. 사실, 이 정도의 미스터리는 흔하지 않나.

 

작풍은 ‘코지(cozy) 미스터리’의 분위기에 경찰소설의 요소가 적절히 섞여 있다. 설원의 섬을 배경으로 까마귀, 피 등이 어우러져 상상되는 색채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던 건 인정한다. 이야기 자체보다는 무대 세팅과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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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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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부유한 철도업자의 부인, ‘메리언’이 남편의 사업 실패와 건강 악화와 더불어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동네의 청년 ‘닐’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메리언의 변모가 과연 타락일까. 우리로 치면 사대부 안주인이 가세가 기울자 주막을 차려 술을 팔고 돈 버는 재주는 있지만 신분이 낮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런 모양새인데, 어렸을 때부터 메리언을 흠모했던 닐은 그런 변화를 안타까워하지만, 남편 없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메리언에겐 유일한 ‘삶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을까.

 

메리언의 삶에 일어난 파란과 닐의 시선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삶을 지속할 용기가 있는가. 그 과정에서 삶과 시대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과연 사회의 가치란 불변의 것인가. 타인의 삶을 재단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짧은 분량이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면 마치 대하소설을 읽은 기분이 든다. 기나긴 세월을 통과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깊고 조밀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유려한 번역. 이 책을 출판한 곳이 1인출판사라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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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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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베르기요트’는 부모의 유산 분배 문제를 계기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가족들과 재회한다. 반갑기는커녕 껄끄러운 만남은 갈수록 ‘진짜 유산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폭력의 긴 그림자에 여전히 갇혀 사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은 폭력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거나 침묵한, 그로 인해 또 다른 가해를 하는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다른 가족들에게 베르기요트는 폭력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깨뜨린 장본인이다. 내부고발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베르기요트가 어렸을 때 ‘당한 일’은 거의 막바지에 드러나는데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고 작가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가장 아픈 부분은 (큰오빠를 제외한) 가족들 중 누구도 피해자 편에 서주질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고 의심하며 ‘공공의 적’으로 몰고 간다.

 

들쑥날쑥한 시간 구성과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기억은 마치 시퀀스를 잘게 쪼개 마구 섞은 것 같은 영화, 혹은 악몽처럼 보인다. 이는 오히려 알코올의존증세까지 보이는 주인공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림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이차 가해’를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독자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이차 가해자들에게 이입하도록 설계된 듯 보인다.

 

작가의 고향인 노르웨이에서는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소설로 알려진 이 작품에 반목하는 소설이 뒤이어 출판됐는데, 작가의 동생이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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