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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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읽은 책이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이고 이 소설은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나는 겨우 읽었다. 재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지루했다. 내가 이 책을, 리뷰를 쓸 정도로 어지간히 이해했을까. 아는 만큼, 본 만큼 적어보자.

기본적으로는 로맨스다. 초로의 화자가 과거에 실패한 자신의 연애담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무대는 2차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의 이탈리아. 파시즘, 인종법, 반유대주의 같은 단어로 작품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설명되겠다.

엘리트(의사)였으나 지금은 블루칼라 계급이 된 유대인 가정의 아들이 유대인 귀족, 핀치콘티니 가(家)의 딸 ‘미콜’을 짝사랑한다. 화자에게는 사랑보다 귀족 가문의 대저택, 특히 아름다운 정원(≪비밀의 화원≫에 나오는 신비롭고 드라마틱한 장소는 아니었다)을 향한 동경이 먼저였다. 주변을 맴돌다 우연히 그 집 딸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사랑에 빠진다.

이런 이야기뿐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옆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탈리아의 문화, 회화, 역사, 정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자국의 독자들이라면 모를까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부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그냥 대화구나, 하고 넘길라 치자니, 이런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그리고 인물들도 대화에 꽤 진지하게 임한다. 이 부분이 꽤 지루했고 책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모르는 것투성이니 자괴감마저 들었다면 너무 엄살일까.

결과적으로 남는 건(그나마 내가 즐길 수 있었던 건) 첫사랑 이야기뿐인데, 그것조차 사랑의 애절함이나 절절함, 풋풋함 같은 감정이 별로 전달이 안 됐다. 화자는 망설이고 주춤거리고 용기를 냈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더니 결국 첫사랑을 뺏긴다(이런 고구마라니). 결국 핀치콘티니 가문의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결말을 맞고 주인공은 용케 생존한다.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이 작품을 ‘홀로코스트 문학’의 범주에 넣고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의아스럽다. 역사적인, 대대적인 인종 학살 사건을 그저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독자들 코앞에 들이대고 있는 ‘신시아 오직’의 무자비한 단편, ≪숄≫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그저 결말에 잠깐 언급되는 정도일 뿐이다.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과 형식적으로 비슷하다. 정서적으로는 허무와 나른한 자의식 범벅인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케 한다. 두 작가 모두 별다른 애정은 없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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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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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왜? 일단 우리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굳이 생존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도 원한다. 한 유명한 스님은 욕망을 내려놓으면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고 말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지극히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시기하고 증오를 품는다. 그리고 많은 것을 욕망한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기저엔 불안이 있다. 불안과 욕망은 한 자궁에서 잉태된 쌍생아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은 하향비교보다 상향비교에 더 익숙하다. 어떤 대상을 늘 선망(羨望)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원한다. 저걸 가지만 얼마나 내가 완벽해 보일까. 나의 가치를 높여주므로 저것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나는 초라해진다. 그래서 불안하다.
광고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욕망으로 둔갑시켜 결국 그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나쁜,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반대로 그건 원동력일 때가 많다. 성취 욕구를 자극하여 뭔가를 이루게 만든다. 슬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릴 것이다.

여기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타인에 대해 불안하고 과거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 즉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들도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앞이 보이지 않고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 들고 그런 불행감에 빠진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스무번>의 주인공 부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앞으로 닥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외부의 타인들이 만들어서 주입한 불안에 시달린다. 낯선 지방의 외딴 집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주는 소외와 두려움에 치매 노인을 가두고 약물을 임의로 투약한다는 그들의 비밀, 협박에 다름없는 주변 사람들의 폭로와 걱정, 충고와 권유가 가중된 불안에 잠식되는 인물들을 통해 안전과 행복을 담보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의 불안을 없애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불안에 대처하는 양식있는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호텔 창문>의 주인공 ‘운오’가 겪는 불안은 과거에서 비롯된다. 제 탓도 아닌 과거의 죽음에 대한 강요된 애도를 끊으려는 고민에 화재 현장에서 보았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존재, 그를 구하러 들어간 소방관의 생사 여부로 더욱 무거워진 불안은 고향 형이 들려준 원인이 불분명한 화재 사건의 이야기로 증폭된다. 작가는 명백히 자신의 몫이 아닌 책임을 떠안게 됐을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결코 답을 구하지 못할 의문들이 앞으로의 삶을 계속 간섭하게 그냥 두어야 할까.

아내의 관점으로 일관되어 진행되는 <홀리데이 홈>은 타인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정소령’의 남편 ‘이진수’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인물이다. 아내가 아는 건 남편의 피상적인 모습뿐, 그에 대해 실제로 아는 건 뜻밖에도 그리 많지 않다. 작가는 타인의 ‘알 수 없슴’을 깨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편향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순식간에 이방인이 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신(불안)을 드러낸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안 보는 걸까. 끊임없는 힌트와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 꽤 유용한 정보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리코더>의 수오는 큰일 이후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무영은 제 경험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사람이다. 위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재기할 수 있는 수오와는 달리 무영은 제풀에 꺾여 불행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그런 수오가 사라졌다. 뒤에 남은 무영은 의문과 의심을 떠안는다.
기록과 반복 재생이라는 리코더의 기능처럼 (기록된) 삶의 구간마다의 패턴도 (fractal 이론을 인간의 인생에 대입할 때)반복의 성질을 갖는다. 예측할 수 있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짐작하여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삶의 진정한 묘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각자의 상황을 함구하고 있는 모녀 이야기인 <플리즈 콜 미>의 ‘미주’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술에 의지해 딸과 사위 집에 머물며 스스로를 눈칫밥 신세로 전락시킨다. 모녀는 서로에게 비밀이 있기에 서로를 도울 수 없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살 길이 나올까. 사라진 남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시간은 무궁해 보이지만 삶이 우리에게 허용한 시간은 유한하다. 그 시간을 기대와 희망으로 채울 것인가 불안과 걱정으로 채울 것인가. 분명한 건 우리가 약속받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삶의 본질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좋은 날이 되었네>와 <미래의 끝>에서도 반복된다. 두 작품 모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삶, 희망 대신 절망이 들어찬 각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좋은 것은 다 흘러(196쪽)’가므로 나쁜 것 역시 다 흘러간다고 바라도 될까. 고이거나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의외로 다행한 일이다. 당장은 어둡고 막막해도 찰나의 빛줄기는 기대할 만하다. 비극적인 상황에 작가가 던져주는 희망은 티끌 같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후견>의 ‘소명’은 과잉된 선의의 희생양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주인공보다 그 부친인 ‘정호인’이 더 눈길을 끈다. 과잉의 원인은 분명히 사랑이었을 터이고 그 사랑은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었을 것이다. 아비의 그런 마음은 딸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학창시절의 추억을 빼앗는다. 무엇보다 나쁜 건 소명이 제대로 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성장한 지금, 소명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언급했듯이 ‘불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배경음악처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설정들(방에 갇힌 치매 노인, 큰어머니의 전화, 발신인 불명의 전화벨 소리 등)이 있어 화자의 불안을 자극하는데 그 감정은 독자들에게도 전이된다.

작가는 설명하거나 단정하기보다 방임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불친절해 보인다. 독자에 따라 그게 불만일 수 있으나, 내게는 작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많아 보이는 빈틈은 여백으로 보였고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도록 자극하는 것처럼 읽혔다. 작품에 참여한다고 할까. 드러난 피상의 이면을 상상하게 됐다. 생각하고 고민하며, 나라면 어땠을까, 이야기에 이입하게 됐다.

편혜영의 소설은 오래 전에 읽은 ≪아오이 가든≫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의 스타일이나 천착하는 이슈 같은 건 모르겠고, 인물들에게 다소 가혹하다는 것, 무턱대고 낙관, 다 잘 될 거야, 이런 것보다는 비관, 운명론자 같은 시선 등은 알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다간 큰코다쳐. 섣부른 희망 따위,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나아.
맞는 말 아닌가. 그런 냉정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끝>에서 느껴지는, 온몸을 감싸는 온기 같은 걸로 짐작컨대, 인간에 대한 강한 호의는 간직한 것 같다. 삶과 인간은 동일한 듯 보여도 전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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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실종에 관한 48 단서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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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번역서를 모두 찾아 읽고 신간 소식이 들리면 서점에 나오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냉큼 읽는 국외작가 탑 텐을 뽑을 때, 그때그때 달라지긴 하지만 변치 않고 리스트 안에 드는 작가가 있다.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대프니 뒤 모리에(Daphne du Maurier)’,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온다 리쿠(恩田 陸)’, 그리고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이 작가가 1938년 6월 생이니, 올해(2024년) 꽉 채워 여든여섯이다. 그리고 아직 현역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판된 게 재작년(2022년)이다. 이 작품은 최근작도 아니다. 올해, ≪Butcher≫란 제목의 장편을 출간했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부지런히 일 하길)
내로라하는 어마무시한 다작가다. 필명이 두 개(Rosamond Smith, Lauren Kelly)나 되고 그 이름들로 발표한 작품들도 상당하다. 게다가 ‘올-라운드-플레이어’다. 소설, 시, 희곡, 넌 픽션, 전기 등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 이상 글을 쓴다고 하니, 다작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 사람은 보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로 분류되지만 작가 입장에선 약간 억울한 평가다. 동화, 영 어덜트 소설, 로맨스 같은 작품들도 상당한데, 장르 소설 작가로 국한된 독자들의 인식은 작가의 능력이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안에서 가장 잘 발휘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책임도 아주 약간 있는 게, 작가의 그런 작품들만 번역해서 내놓는다. 작가의 유명하고 성공한 작품들이 주로 그 쪽인 이유일 테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마냥 범죄나 폭력에 집중하는 건 아니다. 범죄가 나와도 암시를 줄 뿐, 폭력 장면을 대놓고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두는 건 인간의 악의(malice)와 범죄 심리이다. 범죄 행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그 저변에 작동하고 있는 심리, 동기를 주로 다룬다. 특정 사건이나 장면, 문장 같은 단편적인 요소들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서스펜스를 서서히 쌓아간다. 한 순간의 임팩트보다 작품 전체가 주는 효과를 노리는데, 그런 속도감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작가의 팬이 된다.
작가가 주는 스릴은 다른 의미로 ‘쫄깃하다’. 독자들을 겁주지 않고 마음의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저 아래 숨겨진 악의를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결국 독자는 그것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화한다. (그래. 나도 저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작가 이야기를 (내가 아는 한에서) 줄줄이 읊는 이유는, 정작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비교적) 신작이라 반갑게 읽었고 꽤 만족했으나 께름칙한 부분이 분명 있긴 한데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약간 모호하다.

이야기는 중년의 ‘조진 풀머’가 과거에 사라진 언니, 지역의 유망한 예술가였고 집안의 상속녀였던 ‘마거리트’와 그 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플롯의 중심엔 언니의 실종이란 사건이 있고 지면의 대부분은 화자의 생각과 의견, 이야기로 채워진다.
언니의 실종 사건 자체는 일종의 도화선이다. 작가는 언니의 실종에 대한 비밀을 풀기보다 화자 자신이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 그것에 받은 영향, 당시 주변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등에 집중한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쓰다 만 것 같고 심리 스릴러 정도로 퉁치려니 뭔가 부족하다.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화자 자신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언니에게 열등감이 있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한편으론 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나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 딱 그 정도. 조진은 화자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부정하고 다른 기억(진술)로 덮으려 한다. 당시 사건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데, 그 중엔 의문스러운 퇴장도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아니라면 왜? 어떻게?
베일을 벗기다 만 작품의 모양새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독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말을 지어야 한다.

정확한 그림을 구하는 독자들은 속이 터질 것이다. 하지만 반쯤 열린 문을 기웃거리며 상상하고 유추하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매력적인 작품이겠고.
나는 어느 쪽일까. 반반이다. 마거리트의 실종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의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게 좋다. 사건 자체가 미해결이고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많이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조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불투명함은 신발 안의 돌 같다. 어차피 일인칭 시점이고 회고와 고백이 주가 되는 작품에서 화자 스스로가 반쯤 숨어 있는 모습은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도대체 왜?

그럼에도 잘 읽힌다. 푹 빠져들어 읽었다. 힌트와 암시가 무의식을 자극해 독자는 끝까지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긴장이 좋았다.
모호함이 여운으로 남는데 그것이 화자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조진으로 말하자면 그게 가능한 인물이다. 독자들의 동정과 연민을 자극하는 방식이 약간 독특한데, 언니의 성공과 화려함에 가려진, 가족 내의 그녀의 하찮은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완전히 열리지 않은 조진의 마음, 그 문 뒤에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치 혼자만 보는 일기에조차 솔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소심함이랄까, 비겁함, 나약함이 느껴진다. 모든 사람이 용감하지는 않다. 읽은 후 이틀 정도는 조진이, 이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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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실종에 관한 48 단서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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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문을
기웃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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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처방해 드립니다 1
이시다 쇼 지음, 박정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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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같은 분위기의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직장인.
입바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동료가 꼴 보기 싫은 직장인.
생활에 지쳐 아이들에게 공감을 못 느끼는 엄마.
자신의 완벽주의로 피곤한 사업가.
잃어버린 고양이를 아직 잊지 못하는 여자.

교토 시 번화가, 찾기도 어려운 틈새 골목, 막다른 끝의 건물 5층. 간판도 없고 대기 환자도 없고 의사 한 명(니케)에 간호사 한 명(지토세)이 있는,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고코로 병원’에 갖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실 이 곳은 (그렇게 소문이 났을 뿐) 정신과 클리닉도 아니고 상담소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나설 때 고양이 한 마리씩을 들고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의사의 처방이다. 그렇게 고양이와의 뜻밖의 동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자신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며 (스스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고민을 해결할 자구책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걸 아직 깨닫지 못했거나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 ‘답정너’라는 말이 있듯이 답은 이미 자신 안에 있다. 사람들이 타인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그저 단순한 동의이거나 그것을 깨닫도록 이끌어줄, 혹은 용기를 북돋아줄 작은 힌트나 동기부여인 경우가 많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도 자신 안의 답을 스스로 찾는다. 고양이들은 그것을 돕는다. 물론 고양이들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독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건 바로 이런 지점에서 비롯된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연작 형식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인 동시에 ‘고코로 병원’을 매개로 이어진다. 마지막 단편이 하이라이트인데 앞의 네 편은 이를 위한 빌드-업이다. 각 이야기마다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하는(혹은 해결을 위한 단서를 주는) 동시에 고코로 병원에 대한 비밀이 베일을 벗는다. 니케와 지토세의 정체도 서서히 드러나려다가 마는데, <2권에서 계속>이랜다. 작가는 아마도 시리즈를 기획한 것 같다.
작품집의 백미는 마지막 단편이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인물이 상실과 이별, 그에 따르는 슬픔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모습을 통해 상실의 대가가 언제나 슬픔은 아니며 그것을 딛고 일어설 용기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작가는 전한다.

형식적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마유미’ 시리즈를 연상하게 한다. 통통 튀는 유머와 슬픈 무드의 공존, 주인공 커플이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라는 점, 연작 단편집이라는 게 그렇다.
‘고양이 대여소’가 무대인 ‘시게마쓰 기요시’의 연작 단편집 ≪블랭킷 캣≫도 생각난다. 콘셉트나 형식이 비슷한 작품집이 그 외 몇 편 떠오르지만 (이 작품집에 있어서) 그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되는 고유성이 있어 서로의 매력을 갉아먹지 않으면서 하나의 틀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일본 문학시장엔 (정말) 장르화(-化)가 되었을 정도로 고양이를 소재로 한 소설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솔직히) 대단히 흥미롭거나 엄청난 통찰이나 각성을 기대할 만한 작품집은 아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즐거움, 오락으로서의 읽을 거리로서는 충분하다. 이야기 진행은 유려히 흐르는 물 같고 캐릭터들은 개성 있고 시작은 평범하나 진행은 독창적이다. 가까이 두고 거듭 읽을 책은 아닐 수 있지만(그럼에도 난 두 번을 읽었지만) 들인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출판사 자칭) ‘힐링 소설’이다. 언젠가부터 ‘힐링’이라는 단어가 남용되는 것처럼 보여 싸구려처럼 보인다. 단어 자체가 싫은 것보다 여기저기 생각없이 아무데나 갖다 쓰는 모양새에 의미가 바랬달까.
거의 모든 소설의 주된 기능은 ‘힐링’이다.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거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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