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도의 여행자들
다카하시 치하야 지음, 김순희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여행자나 여행의 성격에 따라 7장으로 나뉜다.
문인, 학자, 여인, 외국인의 여행으로 나뉘고 구도, 공무, 기타 목적에 따라 분류해 두었다.
그중 외국인의 여행편이 가장 읽을만했다. 일본 땅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외국인의 시선이므로.
공무나 외국인의 여행을 제외하면, 문인이든 여인이든 표면적인 여행목적은 신사참배라고 할 수 있겠다. 여인이나 농민까지도 신사참배를 한다는 명목하게 먼 길떠날 수 있었다는 데에서 우리의 조선시대와는 다른 여유가 느껴진다. 사실, 조선 시대엔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떠날 수는 없었겠지 싶다. 물론 그들이라고 자유로왔던 것은 아니다. 통행증을 받고 까다로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병에 걸려 늦게 돌아오게 되기라도 하면, 다시 관청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부터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민들도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그 때부터 온천이나 유명 신사의 주변이나 도중에 급이 다른 다양한 숙박업소가 있고, 법적으로 숙박비, 도강비 등이 정해져있었다고 한다. 외국인(지볼트의 얘기가 나온다)까지도 그들의 세세하게 기록된 여행안내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니, 그들의 관광지 개발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구나, 한숨이 난다.
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제도
바쿠후는 법으로 숙박비를 규정해 두었다. 1612년 기준으로 일반 여행자가 묵는 하타고야의 숙박비는 사람이 3몬, 말이 6몬이었다고 한다. 사람보다 말의 숙박비가 비싼 것이 흥미롭다. 말 여물은 숙소에서 준비하지만 사람은 직접 해먹기 때문이다. 후에 식사를 제공하는 하타고야가 생기면서 땔감만 파는 숙소는 기친야도라 불리고 싸구려 숙소로 취급된다. 그리고 식사를 제공하는 숙박업소가 일반화된 시기는 여행객이 늘어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수요가 공급을 낳았겠지.
도이야바라는 곳은 말이 쉬어가는 중계소이다. 말 이용 요금도 요금표가 만들어져 있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비싸고, 짐 싣는 말, 사람만 타는 말의 요금 차이도 있다.
강도 전문적으로 건너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위에 따라 요금이 다르며, 물이 불면 법으로 금지해서 절대 건널 수 없었다.
올콕의 후지산 등반기에 도강에 관한 일화가 하나 나온다. 다이로 암살 음모를 알게 된 히코네의 무사들이 에도로 달려가던 중, 카와 강의 물이 불어 도강이 금지된다. 그들은 하루를 머물어야 했고, 다이로는 하루 차이로 암살되었다. 아무리 법이래도 그렇지, 무사라면 죽음을 무릅쓰고든 몰래든, 어떻게든 갔어야 하는 상황 아니었나?
2. 보통 사람들과 관리
역시 올콕의 여행기에서...
하코네를 지나 미시마를 향하던 중, 언덕 아래 찻집 '길가 오두막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올콕은 가난한 여행자도 적은 돈으로 대접받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한 푼 없는 빈털터리라도 쉬면서 물을 얻어마실 수 있다며 주인의 씀씀이에 감탄단다. 이 집에서 수박을 사먹고, 그날 밤 호위병에게 수박을 또 사오게 하는데 돈이 16배나 든다. 그에 대한 올콕의 평.
"이 나라 국민들은 미덕이 많지만 관리 계층은 악덕에 물들어 있다." 그런 점을 많이 보아 온 모양이다. 참고로 그 당시 일본인들은 심마니가 아니면 종교적 이유에서만 후지산을 등반했다고 한다. 후지산은 여러 종교의 창건지로 신성시되는 곳이었으니까.
3. 인심
여인들의 여행기 중 다섯 아가씨가 이세 순례를 떠나는 이야기가 있다.
가난한 그들은 말그대로 무전여행을 떠난다. 요즘같아도 꿈도 못 꿀...이라고 쓰려다보니, 무전여행하기엔 요즘보단 옛날이 낫겠지, 싶다. 대학 1,2학년때만 해도, 무전여행 떠나는 남학생들이 있었는데... 요즘도 가능할까?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부잣집에서 약간 도움을 주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인심이 넉넉해서 숙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여행중 한꺼번에 병에 걸리는데, 한 마을에서 나을때까지 돌보아주고, 죽은 한 명의 장례까지 치러준다. 이런 인심은 아마 어느 나라든 옛날에는 찾아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했던 것은 짚신 인심이다. 조금 넉넉한 여행자들은 아직 신을만한 짚신을 길가 사당 앞 등에 벗어놓고 새신으로 갈아신는다. 덜 넉넉한 사람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오히려 옛날에는 그런 소소한 배려가 있었는데 말이지... 세상은 과연 좋아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