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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구효서 장편소설
구효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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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타로는 친구의 강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은폐되고 폐기되는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 중 하나인 윤동주에 얽힌 원고를 찾아 먼 길을 떠나기에 이른다.

그 원고에는 반항심 가득한 소녀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들은 과묵한 청년 윤동주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윤동주가 처음에 우리글로 썼다가 경찰의 강압으로 직접 일본어로 옮긴 번역본 시가 있었다.

 

사실 이 책에는 화자가 둘이다. 겐타로가 원고를 찾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 원고에서는 요코라는 소녀가 자신의 이야기와 동주의 이야기를 나란히 풀어가고 있다.

요코는 아이누(홋카이도에 사는 소수민족)인데 그 사실을 모른 채 나가사키에서 학대당하며 살던 소녀. 가출해 도착한 교토에서 동주를 알게 된 것이다. 

겐타로는 재일조선인인데, 자이니치인게 내 인생이란 무슨 상관? 이라는 태도로 살던 청년.

즉, 세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해서 진행되는데 그들 셋의 공통점은 모국어의 상실을 겪었다는 점이다.

겐타로가 좇는 원고뭉치는 저항시인이라는 별칭에서 저항이 아닌 시인에 방점을 찍고 아파하는 윤동주의 교토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기록이었다. 그에게 시란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말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지, 간도에서는 어떤 상실을 겪었는지를 알게 된 후 겐타로와 요코는 달라진다. 

 

경향신문에는 요즘 고은 시인 인터뷰가 실리고 있는데 마침 이번 토요일자에는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 이야기가 등장했다. 식민통치 후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조선어 말살정책을 펼치기로 한 일제는 조선인 스스로 제 말을 없애달라는 호소문을 제출하게 했단다.

그리하여 친일 작가들은 이런 청원을 낸다.

'총독각하! 내선일체 동조동근 그리고 대동아공영을 위하여 낡은 조선어를 폐지하고 문명의 국어시대를 열어주소서' 운운~~

그러면서 인터뷰 기사에서는 호주 작가 데이비드 말로프의 말을 들려주는데 당시 윤동주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내 모어가 더 이상 사람들의 입속에서 살아있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 나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깊은 전율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내 종족의 죽음을 모두 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늘 조용하고 과묵하던 윤동주가 한 번 핏대를 세우는 장면이 있다. 거기에서 윤동주는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이제는 조선의 말까지 빼앗아 머리도 가슴도 모두 일본제국의 사악한 본성에 부복하도록 만들자는 거 아닌가. 대포나 총칼보다 무서운 게 너희들의 국어라는 무기야.

말이 같아야 한다고? 같아지는 게 아니라 빼앗기는 거지. 말을 빼앗기면 다 빼앗기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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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적초 - 비둘기피리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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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질 때까지 -
초능력이 저주라고 생각했던 이야기

번제 -
초능력을 저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

구적초 -
초능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던 이야기 

줄거리 안 밝힐 자신 없으니 앞으로 이 책 읽을 분은 여기까지만~~ ^^;;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구척초의 두 등장인물은 자신들의 성공이 초능력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초능력 없이 잘 해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열등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내게 초능력이 없었더라도 저사람만큼 할 수 있을까? 초능력을 빼면 나는 무능한 사람이 아닐까... '라는.  따라서 초능력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는데...
그런데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초능력이 열등감의 근원이 될 수 있다면 천재로 태어난 사람들도 괴로워하기도 할까?  '난 천재로 태어났을 뿐이지 내가 쌓은 실력이 아냐...' 라고?  아마 그렇진 않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니 살짝 유쾌해진다.  천재들은 자신의 업적이 자신이 이뤄낸 게 아니며 이 천재성이 사라지면 이빨빠진 호랑이가 될 거라며 두려워하고, 일반인들은 천재를 살짝 무시하고...  그런 세상. 범인(凡人)의 입장에서 꿈꾸는 세상이랄까!
어쨌거나 다카코 양,  초능력 없어도 다들 잘 사니까 너무 걱정 마숑~
 

그런가하면 번제에는 초능력 때문에 자신을 외톨이로 만들고 어둠속으로 뛰어드는 인물이 나온다. 
태왕사신기의 기하 같은 재주를 갖고는... 촛불이나 주르륵 켜면서 담덕 같은 사람이랑 하하호호 놀고 지내면 좋을 것을, 쯧~
능력을 지녔으니 정의구현을 해야겠다고(!) 나서고야 마는데, 이젠 그 피해자도 원치않는 복수를 대행하는 그 마음은 어떻게 봐야할까. 정의 따위는 핑계고 실은 - 본인도 자각 못할 지도 모르지만- 권력이나 힘을 갖고 있으면 휘둘러보고 남의 위에 있는 느낌을 즐겨보고 싶어지는 마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느끼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신이 된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닐지... 
준코 양에게 해주고픈 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보세요.

 마지막으로 스러질 때까지의 초능력이 고통스럽던 아이. (사실은 이게 첫번째 이야기)
요건 내가 좀 엉뚱한 데만 신경쓰며 읽느라...  
도라에몽이 79년에야 나왔다고?  이런, 꼬맹이 때부터 알던 캐릭터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에 친구가 초등학교때 자긴 가필드 얼굴 달린 털실내화 신었다고 했고, 난 초등학교땐 가필드란 녀석의 존재조차 몰랐다...그런 얘길 했는데 그러고보니 정말 가필드는 나 초등학생 때 있긴 있었던 건가 - 책읽다 말고 조사 들어감... (가필드는 78년생이란다... 빠른 곳은 고학년 땐 가필드 캐릭터를 썼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살던 동네는 많이 늦었나보다)
그런 잡생각과 딴짓을 하며 눈으로만 읽다보니 아 또 등장인물의 마음을 못 읽었었나보다.
도모코 양이 자살 시도할 때 난 '얘가 대체 갑자기 왜 죽겠대?' 이러고 있었으니....
너 힘들었구나. 괜찮은 척 버틴 거였구나...  미안하다. 독자가 그것도 몰라주고.... =.=
근데 되돌아온 그 고통스러운 초능력을 갖고 앞으로 괜찮겠니.
마지막 장면에서 미리 본 미래는 예쁜 그림이었으니 괜찮았지만, 앞으론 어쩔래나. 가엾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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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터넷
최민호 지음 / 따뜻한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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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간에 교감하고 소통하는 장치인 인터넷의 대척점을 생각하며 만든 단어 아웃터넷.

소설 속 발명품인 텔레스코프라를 이용하여 식물과 소통하는 시스템을 칭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벡스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거짓말 탐지기를 식물에 연결하여 모니터에 나타나는 파장의 변동을 보며 그 것이 식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하여 인기를 끌었더랬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나타나면 불안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면 기뻐하고... 더 나아가선 자신을 돌봐주던 주인이 여행 중 위험한 상황이 되면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그걸 감지하고 불안한 파장을 나타낸다거나...

그런데 어느날, 식물을 태우는 등 위협적인 실험을 하던 사람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거지말 탐지기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벡스터는 식물이 겁에 질려 죽은 척 위장을 한 거라고 변명했던가... 뭐 그랬지만 그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게 되지...
그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뭐야, 완전 사기꾼이구만~'하면서 넘어갔는데, 그 책의 저자는 중립적으로 소개하면서도 뭔가 아쉬워하는 듯 보였었다. 식물을 오래 가까이하다보면 애완동물을 기를 때처럼 소통하고 사람보다 더 자신을 이해하는 듯 느끼게 되어 벡스터의 주장도 믿고 싶어져 그런 건지...

 

후르마쓰 부녀는 식물이 어쩌면 인간보다 고등한 사고를 하는 존재라 여기고 있고 어쩌면 벡스터의 뒤를 잇는 듯한 연구를 계속한다.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 식물을도 사고하며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식물의 감정을 인간의 언어로 변환하는 기계를 개발한다.

반면 막스 쉬뢰더 연구원의 소장 쉬뢰더 씨는 식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개발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고 유전자 합성을 통한 품종 개발을 계속한다. 벡스터 실험실에 마지막에 등장해서 벡스터에게 사기꾼이란 낙인을 찍었던 그 남자 같은 존재랄까...  쉬뢰더 씨가 골몰하고 있는 것은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를 결합한 꽃 튜라플라네스의 개발이었다.

그리고 그 두 식물관 사이에 젊은 주인공 마순원이 있다고 해야할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그 학생은 독자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 (그앤 식물 전공이 아니다보니 여기저기 가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게 된다) 그리 중요하지 않고, 제프가 그 중간에 존재하는 중요한 인물인 듯하다.

제프는 과학자이긴 하지만 개발보다 보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산업적 이용보다 관찰과 분석 자체에서 의의를 찾는 젊은이이다.

여러차례 순원에게도 자연 앞에 오만하지 말것, 식물 등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다루다가는 오히려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랬던 그인데.. 어째서 막상 튜라플라네스가 완성되자 스스로 나서서 더욱 독성을 강화하는 실험을 제안하고 직접 수행하고 끝내 사람이 죽도록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게다가 박사도 동의하고 함께 수행하던 실험이었는데 왜 끝끝내 그 실험 내용을 숨겼던 건지도.
저자는 어쩌면 문명을 이용하면서 환경보전을 외치는 서양식 환경주의자를 곱게보고싶어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드네? 전통적 동양식 환경주의랄 수 있는 - 나무 신령을 숭배하는 모습 등은 곱게 봐주면서 말이다.

또 한가지 신경쓰이는 내용은 뜬금없이 등장한 사막 녹지화 계획. 꽃 하나 합성했다가 그 사단이 났는데 거대한 사막을 별 고민 없이 녹지로 만들겠다고 나서도 괜찮은 걸까.... 우려 된다.

텔레스코프를 연결해서 사막의 선인장이나 습지의 식물들 그리고 오래 살아온 나무 신령에게 부디 물어보고 착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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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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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싶은 책이었는데,

영화가 개봉한단 소식에 그렇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읽어야겠다 - 책으로 읽은 거 영화로 봐서 만족스러운 경우는 드무니까-라고 미루어왔는데 어쩌다보니 개봉 직전 그냥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영화는 못 보겠다, 이건... 책으로 읽었으니까라는 이유가 아니라 너무 우웩~스러울 것 같아서.  지저분한 오물 천지 묘사며, 시체가 썩어나는 거리며... 너무 상상하며 읽었나보다. 결말부분이 차이가 있는 모양이라 좀 궁금하긴 한데...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선 며칠동안 밥도 못 넘기는 건 아닐까.... 뭐,내 식탐이 그 정도에 굴할  없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날 한 남자가 아무 이유없이 시력을 잃는다. 그 후 그 남자가 - 볼 수는 없지만 -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실명이 전염되고, 전염된 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염된다.

정부는 실명한 그들을 철거예정이던 정신병원 건물에 모아놓고 관리한다.

"정부는 정부의 정당한 의무로 간주되는 행동을 긴급하게 이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위기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민을 보호가기 위한 조치였다."라고 거듭 방송하지만 사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고, 전염이 두려워 아무도 접근해서 연구할 수도 없으니, 실명바이러스(?) 보균자들의 사망과 함께 실명병도 사라지길 바랐던 것일게다.

그러니 그 건물 안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만 모여서 지내게 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사람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 그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속속들이 관찰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고, 자신도 보이지 않으니 마음대로 행동하고 수치심을 잃어간다. 그런데 오히려 앞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보기가 민망하고 고통스럽고 처참한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보이는 나를 봄으로써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는 이야기인가.

여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나타나고, 인간답기 위해선 그에 저항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있는 병실인 우병동 1호실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하게 그들이 소설의 준주인공이니까...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 아내의 시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시선이란 꼭 육체적인 시각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들은 첫번째 눈먼 사람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 작가는 자신의 집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자 비어있던 그 집에서 현재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지내고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작가라며 자신조차 볼 수 없는 글을 남기는 무의미한 짓을 한다. 자신은 비록 시력과 함께 이성도 잃은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빼앗겼지만 현재 사는 집의 주인이 나타나자 원주인과 타협하여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할 생각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이성을 기대하고 눈먼 육체에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걸까. 그게 바로 자신을 보는 시선의 유무가 아닐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보는 눈. 그것은 아마 눈멀었어도 눈멀지 않을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소설대로라면 극히 일부 사람의 경우에만.

 

그냥 한번 너희들을 시험해본 거야...라는 듯이 모두들 이번엔 아무 이유없이 눈 멀었던 순서대로 앞을 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 한 시기동안 이런 실명상태를 거치게 되고 그동안 남을 믿고 의지해야하고, 다른이들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사람을 도와야만 한다면 어떨까? 이타심과 배려심이 깊어지지 않을까?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전이라고해야하나... 그런 것이 있는데(우리나라에선 예술의 전당에서)  아주 캄캄하게 해놓고 시각장애인들의 상황을 겪어보도록 만든 전시이다. 경험해보면 꽤나 느끼는 것이 많다던데 그런 느낌을 위한 재앙이었던 걸까? 이 재앙 후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그런데 꼭 실명이 아니더라도 '인생 끝'이라는 느낌의 고통스런 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지만 그 시기를 지난 후 성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망가져버리거나 악해져버리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쓸데없는 상상같기도 하다.

작가는 볼 수 없었다가 다시 보게 된 사람들이 어떠하리라 묘사해 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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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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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무중력증후군의 자가진단용 증세를 들여다본다.
-호흡곤란, 오한, 잦은 기침,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울렁거린다, 환영 또는 환정, 충혈, 초조감, 불면증, 흥분, 충동적 행동
이런 내겐 하나도 없네. 난 지나친 건강체질인게다. 소설에 공감할 수 없을만큼!
대체 어떤 사람들의 증상이지? 홧병이랑, (오염된 공기 속에서 밥도 안 먹고 계속할 정도의) 인터넷 중독, 운동부족을 합치면 저런 증세가 나오려나~~
병명으로 봐선 지구 중력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증세인데 말야...
지구를 떠나고 싶어하는, 지구의 중력을 거부하고 무중력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성공적으로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 못한 나로선 공감이 갈만한 배경인데, 왜 이렇게 내 얘기야 싶은 부분이 없는 걸까.  직장 옮겨댄 횟수라면 나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안 되니 신기한 노릇이다.
공감할 거리가 없는 얘기라면 새롭게 '그런 거였어? 아하~' 하고 깨달아지는 부분이라도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소설 속에서 달은 자꾸만 새끼를 친다.
그러나 새 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작아서 맨눈으론 볼 수 없다고 한다.
천체망원경을 지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보일 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새 달의 탄생, 존재를 믿는다. 뉴스에서 끊임없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대중이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명거리. 자신의 일탈을 변명할 이유를.

무중력증후군이란 것도 매스컴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었다. 그 병 역시 실재하는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지구의 중력이 버거운 무중력증후군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 그저 환영할뿐.  
소설을 읽는 내가 두번째 달이 생기고 그때문에 사건이 생기길 바라는 이상으로 그 세계의 거주민들도 뭔가가 생기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새로워지지는 못하고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 대로 행동한다. 만녈필 사건의 유행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하면 만년필을 들고 설치고, 편의점 털이가 기승이라면 편의점으로 몰리고, 무증력증후군이 발생했다고 하면 너도나도 무증력증후군인 것 같다며 병원으로 쇄도하고. 다들 매스컴의 지시대로....
아, 쓰면서 지겹다. 흔히 볼 수 있는 설명이잖아. 매스컴이 상황을 과장해서 쓰면 대중은 그걸 소비하고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진실은 왜곡되고 새로 쓰이고, 뭐가 진실인지 알 수없어지고.... 잊혀지고.... 다시 처음부터....

각각의 에피소드들도 많이 본 듯한 설정, 들어본 유머...
뉴스거리 하나에 우르르 몰려가고 폴짝거리게 만드는, 똑같은 삶의 지루함을 강조하려 했다면 성공이다. 
소설 속 무중력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지구의 중력에 얽매여 행동하듯이, 이 소설도 이미 나도는 이야기들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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