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죽은 친구가 흡혈귀가 되어 돌아왔다
나니에 / 더클북컴퍼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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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가 진심으로 참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생긴 얼굴에 서글픈 표정을 짓자 다른 사람보다 배나 안쓰러워 보였다.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는데 모진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사는 것도 힘든데,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건 얼마나 힘이 들까.

희주가 내 등 뒤에 있다. 석 달 전에 죽었다. 죽고 나서 되살아났다. 흡혈귀가 되었다. 내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나는 왜 내가 희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희주를 몰라야 정상이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자신 있게 ‘그’를, 타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말에 희주가 웃었다. 눈에 애교살이 접히고 뺨에 보조개가 잡혔다. 참으로 시원하면서도 예쁜 웃음이었다. 대체 저 집안은 하나 있는 아들을 어떻게 저렇게 잘생기도록 낳아 놓았을까.

나는 깊게 잠든 희주를 보며 생각했었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희주는 이렇게 해가 뜨면 잠들어 버리는 걸까.

같이 사는 게 불편하긴 해도 그가 완전히 죽어 버리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부고를 들었을 땐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실감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슬플 것 같았다. 어쨌든 희주는 내 친구였다.

사막에 폭우가 내린다. 혹은, 사막에 폭우가 내리는 꿈을 꾼다. 누군가는 사막에서 익사하고, 누군가는 설원에서 불에 타죽는다.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사랑으로 죽고,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증오로 재생한다.

희주는 먼 사막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내게 돌아온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흡혈귀로. 낮에는 비록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힘과, 예리한 감각과, 사람을 매혹하는 기술과,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돌아온 것이다.

괜찮지 않았다. 얼음송곳이 심장으로 들어가 사정없이 온몸을 훑고 다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괜찮던 다리까지도 쑤셔 왔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손을 땅을 짚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닥을 짚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얕게 구역질을 했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사고로 시퍼렇게 멍이 든 심장과 폐를 아껴 써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엎드리고 싶었다. 엎드려서 심장에 압박을 가하면 좀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다. 삶이 가늠할 수 없는 지옥이라고만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두려움을, 무서움을,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죽고 싶다는 말보다는 훨씬 소극적인 말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능동적이라면 살고 싶지 않음은, 누군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다리는 말이었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먼, 아득한 지하,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지식들, 지각, 멘틀, 핵 이런저런 것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발아래의 공간, 그곳에서 흘러든 신성하고도 아름답고, 또한 섬뜩한 목소리.

나도 흡혈귀가 되고 싶었다. 희주를 잡아먹기 위하여. 실은 흡혈귀가 된 희주가 24시간 언제나 외롭지 않게 지켜 주고 싶어서.
아, 그렇구나 나는.
희주를.

입술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부드럽고,
상상하던 것보다 차갑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와 인연을 맺으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었다. 나의 선조는 참으로 어리석거나 미친 사람이 분명했다.

누군가 내 심장에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두르고 희주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 내 심장을 이렇게 꾸몄다고, 그러니 제발 봐 달라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갈라 그렇게 보여 줄 수 있었다.

한참 기능을 잃었던 내 머리는 희주에 관한 기억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혼란스러운 기억의 용광로가 식으면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뱀이 속삭인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되는지 꼭 보여 줄게.

"희주야, 나 입 맞춰 줘."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나는 널 경멸해.
그러나 나는 희주에게 입맞춤을 조른다.
우리, 이 대화 없던 일로 하자.

가끔은 죽음의 세계가 가까웠다.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압도적인 세계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파열된 잿빛 뇌와 보랏빛 내장의 세계이다. 붉은 피와 새파란 창백함의 세상이다.

도시의 불빛은 강물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불빛이 만든 세계는 지상의 세계보다 훨씬 다채로우며 섬세하다. 바람에 따라 쉽게 일렁이고 깨어지지만 모든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수명이 짧은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우리는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아득했다. 아니, 모든 것이 멀었다. 가까운 것은 희주의 숨결뿐이었다. 조금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숨결이었다. 단지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희주를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숨 쉬고 있는데.

우리는 드뷔시의 월광을 들었다. 흔하고 자주 들리는 곡이니 이 곡을 들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이날 밤을 떠올리게 되리라. 달빛은 밝았고, 수면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어리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아득해지는, 고요한 세상.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흡혈귀가 앉아 손끝을 겹치는 밤.

나의 흡혈귀.
나는 오로지 나의 흡혈귀만을 걱정했다. 아무리 비가 온다지만 흡혈귀에게 햇볕은 너무 강했다. 태양은 비에도 지지 않았다. 물에 축축하게 젖어 빛이 바래 버렸더라도, 귀신에게도 흡혈귀에게도 공평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지.
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지.
이러고 보니 어떻게 흡혈귀가 되는 걸까. 많은 책에서는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것만으로는 흡혈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흡혈귀의 피를 빨아야 진짜 흡혈귀로 탄생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제는 희주가 죽었다거나, 살아났다거나, 또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희주와 입맞춤을 했고, 하는 중이었고 꼭 살아 있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동안은 입맞춤을 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모든 삶에서 나는 남겨진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 섬이 있다면 희주가 유일했다. 희주를 제외하면 나는 몸을 기댈 암초조차 없었다.

내 기억들이 한 군데로 뭉쳐 휘저어지고, 재배열된다. 나는 또 많은 것을 잊는다. 나는 판공초의 기억을 잊는다. 그때 내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를 잊는다. 높은 하늘을 날던 연과 그 연과 나란히 날아가던 새와, 그러니까 믿을 수 없이 높이 날던 그 새를 잊어버린다. 손을 뻗으면 바로 우주로 향하던 그 천공을 잊는다. 한강변을 잊어버린다. 달빛을 들으면, 그날의 강물이 생각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작고 섬세한 불빛들을 잊는다. 나의 흡혈귀와 손끝이 닿아 있던, 그 손끝이 유난히 뜨거웠음을 잊는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상태로 있어 주면 충분했다. 물론 되살아나면 좋고, 애초에 죽지 않으면 가장 좋았다.
나는 몸 안의 모든 의지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가끔은 바보긴 해도 여러 번 같은 수에 당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희주를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저 인생에 가느다란 선을 남긴, 친구로만 기억하게 되리라.

희주는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또 죽었다. 나는 살았고, 계속 살아 있다. 아마도 계속 살아 나가리라.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를 다하면서.
나는 무덤 옆에 눕는다. 부질없는 짓이다.

희주는 이 무덤 속에 없는데, 무덤으로 돌아올 가능성조차 없는데. 하지만 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무지갯빛으로 폭삭 내려앉았던 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꿈을, 그리하여, 희주가 다시 내 앞에 허기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남는 것은 한 줌 재의 가벼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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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게임에서 만렙거지를 주웠을 때 1 [BL] 게임에서 만렙거지를 주웠을 때 1 1
마린코드 / 글로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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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조용히 게임하려던 생활이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 거 같은데……. 그렇다고 다시 빠져나오기에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오르카는 그리핀이 마음에 들고 있었다.

다만 지금 오르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감뿐이었다. 그리핀이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는 감.

마지막 모습은 아름다운 소금 사막에서 그리핀이 여우 귀를 쫑긋대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리핀은 졸린지 자신의 뺨을 매만지더니, 퐁! 곧 여우로 변해 오르카의 다리를 앞발로 긁었다. 안아 달라는 거였다.

그리핀은 푹신한 이불을 덮고 기분 좋게 몸을 웅크렸다. 처음으로 그가 이름을 불러 주니, 별것도 아닌 일인데 특별하게 느껴졌다.

너른 품에 휘말린 여우는 버둥대다가도, 곧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랑 이렇게 쉬니까 좋은 거 같아." 그의 나른한 속삭임에 애꿎은 상념들이 모두 휘발되고 말았다.

그리핀은 소리 없이 기분 좋게 웃었다. 자꾸 별것도 아닌 거로 칭찬해 주는 오르카가 좋았다. 그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더 좋았다.

"야, 뭐 잊는 데 연애가 최고야. 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도현은 사회적인 미소만을 머금은 채 결혼식만을 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싫어."

여우 키워야 해.

오르카가 깐죽대던 여우의 주둥이를 쥐며 혼냈다. 그리핀은 입이 꼭 막혀서도 눈을 휘며 키득거렸다. 오르카가 귀 끝까지 빨개진 걸 발견해 버려서. 우리 형 순진해서 어쩌나.

"너한텐 좋게 보이고 싶어서 욕심낸 거지, 너 괴롭히는 놈들한테까지 좋게 보이고 싶진 않아."
"……."
"난 내가 편하게 게임하는 것보다 네가 더 중요해."

잠시 울음이 멈추길 기다려 주던 오르카는 작은 여우 몸을 안아 들며 말했다. 여우 꼬리와 귀까지 서글픔에 축 처져 있었다. 그간 참았던 눈물이라도 다 흘리는지 눈물길이 선했다. 오르카는 여우 몸을 계단에 앉혀 두곤 서러운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넌 선택만 해."
"저는……."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
"네가 손해 보는 건 없어."

그리핀은 잠시 작게 숨을 고르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다시 세져서, 꼭 형을 지켜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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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의식한 순간 잔잔한 수면 위로 파문이 인 듯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생소하고 어색하면서도 발아래가 붕 뜬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뭔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이상한 해방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에도, 타인과의 관계에도 미숙하고 서툴러 상대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감정들을 얼굴과 눈빛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는 아주 순수한 소년.
그 천진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건 그냥, 우연이었고 실수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오늘의 멍청한 짓에 추가될 법한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충동적인 호기심으로 그 녀석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건 안 된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으로 그 녀석을 좇으며 그 남자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그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근사한 성인 남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그를 의식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안 된다. 어떤 의미로든 위험한 남자다.
자신의 본능이, 그리고 육감이라는 게 그렇게 이르고 있었다.
관심도 갖지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그와 함께 일순 멈춘 듯했던 시간과 공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가 한 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결국 이 남자가 내 인생을 망칠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꿈꾸던 삶은 평범하고 조용한, 어느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완벽한 삶이었다. 대단한 성공을 하겠다는 야망 같은 건 없지만 보통의 아이들처럼, 아니 그 아이들보다 더 완벽한, 누가 봐도 잘 자랐다고 할 만한 인생을, 지금껏 꿈꿔 왔다.

모든 걸 내던져 버리더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충동에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꿈속의 그는 냉랭해 보이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현실의 그는 더없이 매섭고 차갑기만 하다.
꿈속의 그와 현실의 그 사이의 괴리에 문득, 만약 진짜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만났다면 그의 태도도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겨우 세 번째의 만남에 그렇게까지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도 웃기지만 자신이 먼저 그를 따라갔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꿈속에서조차 자신은 재영이와 재원이를 버리고 이 남자를 선택했다.
그저 꿈일 뿐임에도,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묵직한 죄책감이 뱃속 깊이 내려앉았다.

그와 자신이 완전한 타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게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봤자 결국 그것들은 모두 가정일 뿐이다. 이미 엄마는 그 순간 선택을 했고 자신 역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다.

이제 와 과거의 선택을 바꿀 수도, 지금 이 현실을 되돌릴 수도 없다.

지금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지금 그에게 얼굴을 보이면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킬 것 같아, 싫다. 그라면 언뜻 비치는 찰나의 감정조차도 읽어 낼 것 같아서, 무섭다.

의식 아래 깊은 곳에 깔려 있는 희미한 감각의 기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조금이라도 그걸 내비치고 싶지 않다.

아주 간혹, 사람은 순간의 충동과 착각으로 자기 무덤을 파기도 한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이젠 이 사람이 뭘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하고 자신이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이 남자는 평생 변하지 않을 거다. 변해야 할 이유도 없고 변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이 질리지 않는 남자와 함께라면 이 세계의 끝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소원은 어떻게든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마 마지막 소원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이 이상의 행복은 존재할 수 없기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하고 있다.
다만, 단 한 가지 바라는 건…….

아니,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하다는 감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형에 시선이 끌리지만, 그 뒤에는 불길하고 기괴한 그의 분위기에 절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아주 소극적인, 하지만 명확한 그 의사 표현에 잠시 멈칫한 그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조금 당황한 듯 그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위로 이내 미소가 흐른다.

늘 바라 오던 건 이런 일상이었다.
평화롭고 잔잔하고, 누구나 누리고 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느긋한 보통의 일상.

자신은 크리스천도 아니고 소원 따위는 빌지 않으며 산타클로스 따위는 더더구나 믿지 않지만 만약 올해의 소원이 내년에 이루어진다면 매해 같은 소원을 빌고 싶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역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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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자연히 눈이 떠진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아, 그 사람 있다’라는 거였다.
등 뒤에서 끌어안긴 채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을 감싼 체온과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에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사람의 육감이란 예리하다. 뭔가 꺼림칙하다 느껴질 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이곳으로 도망친다고 그와 자신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도, 그 외의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진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이 기만의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면…….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과 함께 눈꺼풀 위로 닿아 오는 그의 입술에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다시 악몽을 꾸더라도 이 사람이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온갖 복잡한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아직도 그 녀석은 과거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던 과거가 지금까지 그 녀석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던 거다.

회피이자 비겁한 전가다.
결국 모든 건 자신이 선택한 거다. 결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핑계일 뿐 이미 자신은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한 뒤 따라올 책임과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죄악감이 무서워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린 채 지금의 행복한 일상이 깨질까 무서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시선을 돌리곤 그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현실을 무시했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완벽하게 지워 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애매한 태도에 그 남자 역시 계속해서 상처받고 있었고, 재원이 역시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냉랭한 태도와는 달리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후이기에, 자신이 변명이라도 해 주길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른 척 지나간 것 역시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찾아온 거냐는…….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를 닮아 푸른빛을 띨 정도로 검고 깊은 눈동자가 당장 눈물을 흘릴 듯 일렁거리는 모습에 아연해졌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아픈 그 단어에 말없이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재원이의 손이 강하게 손목에 휘감겨 온다.

이어지는 꿈같은 이야기에 수려한 녀석의 얼굴을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그와 너무나 닮은 얼굴로 그 남자처럼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재원이가 너무 안타깝고 가여워서 슬퍼졌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낯선 기분에 멍하니 땅을 바라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기 전 걱정했던 것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은 차분하고 마음은 한없이 고요했다. 또 한 번 그 녀석의 삶을 뒤흔들고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를 상처를 주고도 자신은 괜찮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다.
그저 조금 공허하고 지친 기분이 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아냐. 오히려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무시해 버린 거야. 내가 도망쳐도 당신이 잡아 줄 거라는 건 알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 이젠 나도 지쳤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당신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아무 죄책감 없이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고 그 안에서 안락하게 머물렀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렸다.

이미 자신의 마음이 확실한 형태를 드러낸 이상 더는 그의 등 뒤로 숨어 버리는 짓은 할 수 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끝날 관계라면 최선을 다해 이 시간을 지키고 싶으니까. 최후의 순간, 그를 제대로 안아 주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잠든 사이에도 자신의 어깨를 안고 있는 그 팔에 그제야 최근 악몽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그에게 꼭 안겨 있었던 게 떠올랐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걸 싫어해 그다지 붙어 자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요 몇 달간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수없이 ‘그날 그곳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 봤지만 그래 봐야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지만 그날 그곳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그와 자신은 결국 이렇게 되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만나 지금 이 자리에 있었을 것 같다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드물게도 풀네임을 부르는 부드러운 그의 음성에 그를 돌아본 순간 가볍게 입술이 겹쳐졌다.
다정한 인사 같은, 상냥한 입맞춤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이미 10년 전의 일임에도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르는 건 그 풍경 속에 선 남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탓이었다.

가슴을 치는 통증도 죄악감도 여전하지만 이젠 그 역시도 자신의 지병으로 안고 가야 한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할 생각은 없다.
그저 지금 눈 부신 태양 아래에 선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를 안아 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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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 / 링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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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일상의 소요 속에 묻힌 채 살아가며 이젠 저 담 밖과 안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그 선을 긋는 데에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아니, 단지 기만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단둘이 살다 보니 동화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자신이 근원적인 부분에서 많이 닮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던, 그래서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버티는 게 피곤해 차라리 혼자인 게 편했던 과거와 달리 너무나 평화로운 지금은 혼자인 걸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무뎌졌다는 건, 그만큼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니까.

너무 무뎌져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성격을 제외한 모든 걸 갖고 태어나 그 덕에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니 이 사람에게도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한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공평하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오늘만은 저 지긋지긋한 비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그와 함께할 때의 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아주 가끔뿐이지만.

대부분은 너한테 관심 없어.
분명 그의 말대로, 자신은 타인에게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스쳐 가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건 잘 알고 있지만 과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의 관계에 끝이 온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고 그 끝이 절대 좋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명확한 진실이기에,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현실 도피일 뿐이라도 그게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간 치열하게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싸웠지만 어떻게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그 길고 지리멸렬한 전쟁 끝에 자신은 너무나 지친 채였다.
더는 생각을 하는 것도, 뭔가를 시도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젠 편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진짜 지우고 싶었던 게 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간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잠시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둔 진실들이 흘러나오며 결정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도망쳐 버릴지 스스로 선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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